다시 태어난 베토벤 410화
89. 저주(8)
콘서트홀은 마치 저주라도 걸린 듯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블러드 와인은 마치 몽마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관객들을 유혹했다. 그들이 바라는 위로를 들려주며 잠 들게 했다.
그 달콤함에, 저마다의 이유로 지친 관객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그저 단잠을 이룰 뿐.
최고의 휴식이 주는 쾌락에 천천히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었다.
쌔액쌔액.
어렴풋이 들리는 숨소리와.
“드르렁. 컥.”
코골이를 듣는 순간 나윤희는 그 어떤 박수갈채를 받았을 때보다 기뻤다.
‘자고 있어!’
나윤희는 지금껏 받았던 가장 적은 박수를 받으며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편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G장 조,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감상하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의 채팅창도 새로운 글이 올 라오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ㄴ 살아 있는 사람?
ㄴ 와 씨. 이게 뭐냐? 나 중간부터 졸아서 못 들음.
ㄴ 우리 아빠 지금 코골고 계심.
ㄴ 지루한 건 아닌데 정신 차리고 보니 졸고 있었네.
ㄴ 그렇게 졸림? 난 게임하면서 들 어서 잘 모르겠는데.
ㄴ 객석 보느 다들 자고 있넼ㅋㅋㅋ
잠에서 깬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며 채팅창이 다시 활발해질 무렵에야 콘서트홀의 관객들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배도빈의 신곡을 분석하기 위해 나 선 평론가나 기자 중 일부를 제외하 고는 대부분 잠에 취한 상태였다.
“뭐지.”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
배도빈의 신곡이니, 평소라면 공연이 끝나자마자 수백 개의 기사가 올 라오는 게 당연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몇몇 언론에서 오늘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전했을 뿐.
고요한 밤이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제대로 알 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 날부터였다.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충격의 현장 속에서!]
【베를린의 마왕이 가장 상냥한 흉기를 만들었다!]
[불새 나윤희. 세계를 잠재우다!
[콘서트흘을 찾은 관객 모두 잠들 어버리다】
【배도빈, “불면증을 겪는 분들을 위 해 만들었습니다.”]
【나윤희, “관객 대부분 주무셔서 기 뻤어요.]
【가우왕, “아니 그래서 마지막은 어떻게 끝나는데? 들을 수가 없잖아!”]
3,500명의 관객을 모두 재워버린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작곡가 배도빈과 연주자 나윤희의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던 이들조차 달려들게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숙면을 취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들조차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들으면 잘 수 있다는 소문 때 문이었다.
방송과 SNS을 포함한 1인 미디어 에서 나윤희의 연주를 듣고 10분만에 자게 되었다는 경험담이 올라 왔다.
ㄴ 안 졸렸는데요, 자버렸습니다.
ㄴ 수험생 금지곡 추가요.
ㄴ 아 진짜 너무 신기해ㅋㅋ 진짜 틀고 생각없이 듣다 보면 졸려ㅋㅋ
ㄴ 도저히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수가 없다.
ㄴ 중간부터 들으면 됨ㅋ
ㄴ 나윤희 최소 푸린 아냐?
실제로도 첫 발표회 이후 이틀 더 공연이 있었지만 관객들을 전멸시키는 현상이 이어졌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첫 공식 항해 준비를 마쳤을 무렵에는 유럽 내 몇 몇 상담센터와 정신과에서 불면증 환자에게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를 듣는 것을 추천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 정도 진행되자 음악계는 물론 의학계 등 학계에서도 관련 일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고.
베를린 국립 음대 음악치료 대학원의 전임 교수이자 학계 최고 권위자 브레멘 슈마허는 언론을 통해 자신 의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발표되고 계속해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물으시지만 이미 여러 경험 담을 통해 수면 현상이 밝혀졌습니다.”
“인정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 서는 여러 요인이 있는 듯합니다. 가장 비슷한 사례는 빗소리입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하나의 멜로 디가 불규칙하게 변형되며 이어집니다. 연주자는 음량을 최대한 얇고
깊게 표현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최면 상태로 빠지게 하죠. 수면에 이르기를 돕기도 하며 수면 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효과가 있다 고 봅니다.”
“불특정 다수가 듣는 곡이 수면을 유도하는 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도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사 결과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300명의 실험군을 대 상으로 한 결과 어느 하나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수면 효 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초연 때 대 부분의 관객이 잠들었던 것에 반해
기자와 평론가들은 대부분 깨어 있었죠.”
“무조건 잠드는 건 아닌가 보군요.”
“수면 자체가 여러 요인이 충족되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드물 죠. 그러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수면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 만은 확실합니다.”
브레멘 슈마허 교수의 발언 이후에도 여러 권위자들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내었다.
이미 나윤희의 연주로 불면증을 어느 정도 해소했던 이들은 아예 앨범을 구입하거나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장기 이용권을 구매한 상 태였고.
그 어떤 곡보다 빠른 추세로 사용 되기 시작했다.
배도빈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 앙케이트에도 해당 현상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st 베를린 필하모닉(35.0%)
베를린 환상곡(12.6%), 베토벤 교향곡 운명(12.5%), 드보르자크 교 향곡 신세계로부터(9.9%)
2nd 나윤희(23.1 %)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잠자는 숲 속의 공주 (14.1 %), 스트라빈스키 불새 (9.0%)
3rd 사카모토 료이치(18.5%)
Honor(14.5%), 악마의 축복(4.0%)
4th 가우왕(14.4%)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9.4%), Dobean,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 주곡, 태풍(5.0%)
5th 찰스 브라움(7 3%)
배도빈 바이올린 협주곡 13번(5.3%), 스트라빈스키 불새(2.0%)
그것을 확인한 가우왕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가우왕은 자신이야말로 배도빈이라는 천재가 쓴 곡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베를린 필하모닉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거장 사카모토 료이치조차 자 신 앞에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버터’는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거늘 생각지도 못한 순위 반 전에 손을 벌벌 떨었다.
한편 찰스 브라움도 기겁하기는 마 찬가지였다.
그는 나윤희를 유망한 후배로 아끼 며 그녀의 열정을 아낌없이 도왔지 만 설마 하니 자신을 제치고 올라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 내가 사자 새끼를 키웠나.”
이미 배도빈이 찰스 브라움을 위해 편곡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는 찰스 브라움이 아니라 나윤희의 상징으로 잡아가고 있었다.
스트라디바리우스 파이어버드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을 빼앗겼던 찰스 브라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지만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나윤희 에게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니지.”
찰스 브라움이 이를 바득 갈았다.
“배도빈의 곡을 가장 잘 연주하는 건 나다……. 베를린 필하모닉 이외 에 그런 자가 존재할 리 없어!”
“엣취!”
“감기?”
나윤희가 티슈로 코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주부터 푸르트벵글러호에서 9 박 10일을 보내야 했기에 컨디션 관리는 철저히 했으니 그럴 리 없었다.
“조심하고 있는데. 왜 이러지.”
소소는 나윤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왜, 왜?”
“컨디션 관리 하는 얼굴로는 안 보 이는데. 여기.”
소소가 나윤희의 눈 주변을 가리켰다. 짙진 않지만 다크 서클이 내려 와 있었다.
“요즘도 못 자?”
“……응.”
“왜? G장조 소나타 틀어.”
“그게.”
나윤희가 머뭇머뭇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황 녹음된 게 마음에 안 들어 서. 듣다 보면 아, 여기 왜 이렇게 했을까. 조금 더 눌렀어야 했는데. 천천히 했어야 했는데 하다 보니까
예전보다 더 잘 수가 없어.”
예전 자신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잠들 수 없다니.
침대 위에서마저 어떻게 하면 더 완성도를 높일까 고민하는 게 나윤희답기도 하면서.
“ 바보잖아.”
안타깝기도 했다.
“신경 쓰이는데 어떡해.”
나윤희가 테이블에 엎어졌다.
양팔을 쭉 펴고 의미없이 빈둥대고 있는데 마침 휴게실 문이 열렸다.
“아, 가우왕 씨. 안녕하세요?”
“흥!”
가우왕은 나윤희를 보자마자 콧방 귀를 뀌고 지나가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지냈기에 나윤희는 크게 놀랐고 왕소소는 돌아버렸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으려는 가우왕의 등을 있는 대로 갈겼다. 날 카로운 소리와 함께 가우왕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윤희한테 왜 그래.”
“내가 뭘!”
“왜 무시해.”
“나, 난 괜찮아.”
나윤희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사과해.”
왕소소가 눈을 부라리자 가우왕은 사과 대신 나윤희를 노려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윤희는 가우왕의 부리부리하고 부담스러운 눈빛을 피하려 했지만 가우왕은 나윤희를 정면으로 봐야만 했다.
“너.”
“네, 네.”
소소가 가우왕의 무릎 뒤를 걷어찼다.
가우왕은 반쯤 무릎을 꿇은 상태에 서도 할 말을 계속했다.
“배도빈은 내 거야. 알아들어?”
“네?”
가우왕의 뜬금없는 선언에 나윤희 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체 이 사람 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짜 미쳤네.”
왕소소도 기가 차서 이 답도 없는 멍청이를 어떻게 쫓아낼까 고민하는 데 또다시 휴게실 문이 열렸다.
찰스 브라움이었다.
깐깐하고 자기자랑이 심한 사람이 지만 공정하고 상식적인 사람이라 나윤희도 불새 이후로 의지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찰스 브라움은 허리를 숙여 나윤희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가우왕에게 다가와 그를 밀쳤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짖지 마라, 멍멍이.”
찰스 브라움은 고개를 돌려 놀란 나윤희를 보았다.
“ 괜찮아?”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당장 나 좀 봤으면 좋겠는데.”
“ 네?”
“누구의 불새가 더 화려한지 알아 봐야겠어.”
나윤희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필사적으로 생각해 봤지만 조금이라 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왕소소가 나윤희를 대신해 찰스 브라움도 밀쳤다.
“당장 이번 해상 오케스트라 일정에 넣었으면 좋겠어. 배도빈한테 가 서 말하자고
“흥. 괜찮겠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가우왕이 끼어들었다.
“뭐라고?”
“너 따위 나윤희에 비하면 개미 새끼만도 못하지. 어디 어르신들 노는 데 끼어들어?”
가우왕의 도발에 찰스 브라움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