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09화 (40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09화

    89. 저주(7)

    블러드 와인을 얻은 나윤희는 그 날부터 개인 연습실에 틀어박혔다.

    새로 만난 친구와 친해지기 위함이었는데, 아버지 로렌초 조반니의 말 대로 새침하기 이를 데 없는 바이올린이었다.

    어르고 달래야 겨우 반응해 주어 기존보다 신경이 배는 더 쓰였다.

    그러나 길이 들지 않은 목소리마저 도 사랑에 빠진 나윤희에게는 귀엽 게 느껴질 뿐이었다.

    정기 연주회 마지막 무대로 편성된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발 표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지금도, 블러드 와인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가우왕이라는 재난에 의해 피난 나 온 왕소소는 쿠션에 기댄 채 반쯤 누워 송진 가루를 닦아내는 나윤희를 보았다.

    “흐.”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자꾸만 웃어대 서 드라마 내용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녀는 타박타박 다가가 블러드 와 인을 살폈다.

    “여쁘지?”

    “응.”

    블러드 와인의 진홍빛 외관은 너무 나 고혹적이라 언뜻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듯했다.

    “어떻게 이런 색이 나와?”

    나윤희는 친구가 던진 사소한 질문 에 냉큼 달려들었다.

    “얘 단풍나무로 만들어졌거든. 단 풍잎 같은 색 내려고 엄청 노력하셨대. 천연 염료로는 이런 색이 나오 기 어려워서 덧입히고 덧입히고. 그 래서 그런지 소리가 엄청 진해. 여 기 머리 마감 너무 예쁘지? 무늬가 다른 애보다 훨씬 깊은 거 같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설명을 듣던 왕소소가 입을 열었다.

    “들려줘.”

    “그럴까?”

    왕소소는 너무나 반갑게 반응하는 친구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이올린이 망가진 탓에 우울해했던 모습이 거짓 말처럼 느껴졌다.

    곧 블러드 와인이 어쩔 수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으면서도 수십 년간 제 주인을 찾지 못했던 블러드 와인은 농후한 음색을 자아냈다.

    가장 달콤한 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소소는 블러드 와인의 노래를 듣는 순간 나윤희가 왜 저 바이올린에 매 료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바이올린의 소리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 장 중요한 것은 공명.

    현을 타고 나온 소리가 몸체에서 어떻게 공명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데 블러드 와인은 소리가 퍼지지 않았다.

    우수한 목재와 장인 로렌초 조반니 의 세심한 덧칠 그리고 세공 덕분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주인 없이 잠들 어 있던 탓에 블러드 와인은 새것 그대로였다.

    가능성은 보였지만 좀처럼 제 소리를 내지 못했고 나윤희는 지난 한 달간 블러드 와인의 소리를 틔우기 위해 애썼다.

    노래를 시작한 블러드 와인은 처음으로 목에 압박을 느꼈다. 복부도 마찬가지였다.

    현의 장력으로 인해 바이올린의 목 에 압력이 가해지고, 연주를 할수록 사운드포스트로 인해 뒷판이 밀렸다.

    나윤희는 조급하지 않았다.

    그녀를 설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지만 애정을 쏟았다.

    천천히 블러드 와인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어르고 달랬다.

    C와 G현이 본래 소리를 내지 못 한다고 해서 사운드포스트를 급히 조절하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충분히 팽팽해졌을 때야 조금씩 바꿔나갔다.

    그 과정을 거친 뒤에.

    새침했던 블러드 와인은 온연한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나윤희가 연주를 마치자 소소가 박수로 화답했다.

    “내일 기대된다.”

    “응. 내일 컨디션 좋아야 할 텐데.”

    오랜만에 홀로 무대에 설 것을 상상하니 오늘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G장조 소나타 연주하면 잘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망가뜨렸으니까.”

    나윤희가 방 한쪽에 장식해 둔 예전 바이올린에 눈길을 줬다.

    “연습하다 보니까 의외로 신경 써 야 할 부분도 많고 그러다 보니 괜찮아졌어.”

    배도빈이 선물해 준 소중한 곡을 완벽히 연주해내기 위한 집념과 또 다시 바이올린을 망가뜨릴 수 없다는 마음 덕분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규 연주회는 항상 특별하지만 오늘은 배도빈의 신곡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올해 초 가우왕의 ‘3개의 손을 위 한 소나타’가 크게 성공한 이후 세 달 만의 일이었고 ‘푸르트벵글러호’ 의 첫 공식 항해 전 마지막 무대.

    더욱이 제1회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이름을 떨친 불새 나윤희의 독 주였기에 팬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전야제’였다.

    몇 해 전 확장 공사된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홀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공연 시작 전부터 디지털 콘서트홀에 3백만 명의 시청 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ㄴ 신곡! 신곡!

    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시청자 수 미친 너~무 현실적이다.

    ㄴ ㅋㅋㅋㅋㅋ 배도빈+나윤희 조합 인데 적은 게 이상하지.

    ㄴ  푸르트벵글러 브람스잖아. 신곡 이랑 나윤희 없어도 충분히 좋아할 사람 많음. 애초에 베를린 필하모닉 시청자 수 많기로 유명하고.

    ㄴ 꼭 이렇게 아는 척 하는 인간들 껴 있더라. 베를린 필 인기 많은 거 몰라서 저러냐? 푸르트벵글러 브람 스 유명한 거 몰라서 저래?

    ㄴ 제가 보기에는 님도 저 님도 똑 같음.

    ㄴ 오오 시작한다.

    ㄴ 왜 다들 머리가 벗겨졌어?

    ㄴ 팀 평균 연령이 50은 될 걸? 이승희가 A 팀에서는 그나마 어린 축인데 올해 마흔둘이잖아.

    첫 무대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지 휘, A팀이 연주하는 브람스 2번 교향곡이었다.

    느긋하게 시작되어 서정적인 선율 이 이어지는 브람스 D장조 교향곡은 특유의 비장미는 옅으나 쾌활하고 힘 있는 곡이었다.

    감정을 고조시키는 일에 있어 따라 올 자가 없는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해석은 그가 왜 브람스 최고 권위자 인지 말해주었다.

    사교회장.

    첼로와 베이스가 기품 있게 나서자 호른이 분위기를 틔운다.

    바이올린도 우아한 자태로 나선다.

    첼로와 비올라가 그에 화답하듯 곱 게 춤추며 어우러진다.

    곡은 한 차례 절정으로 치닫고.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아래 강렬하 고 빠른 연주가 이어진다.

    경쾌하게 춤추는 아가씨들과 그 뒤 에서 홍을 돋우는 연주자들.

    목관 악기들의 펼치는 리듬에 맞춰 현악기들이 스탭을 밟는다.

    1악장이 끝나고.

    2악장이 시작되자 사교회장이 다소 잠잠해졌다.

    열정적으로 춤추던 이들도 연주자 들도 휴식을 맞이해 모두 숨을 돌리 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팀파니가 작게 울리며 창문을 열고.

    이승희 수석이 이끄는 첼로와 다이 넬 홀랜드 수석의 베이스가 고조되었던 분위기를 달랜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열정적인 이들은 곧 다시 춤추기 시작한다. 플루트와 오보에가 어우 러져 박자를 놀리고.

    즐겁기만 한 사교회장 속에서 조금 씩 어두운 기운이 스며든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시기.

    파티가 무르익을수록 적대 세력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적의가 드러난다.

    관객들은 아름다운 광경을 즐기다 문뜩 떠오른 불안함에 가슴 졸인다.

    그러나 천재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 스는 그저 운만 띄울 뿐, 3악장까지 관객들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애태우고 또 애태워.

    그 불안이 해소될 때 즈음에 4악 장에 이르러서도 모든 악기로 하여금 춤추게 한다.

    속내에 감춰진 더러운 감정을 가릴 정도로 우아하고 고운 노래들이 이어지고.

    푸르트벵글러는 거기에 더해 지난 모든 걱정을 불식시키듯 가장 활기찬 연주를 명한다.

    춤추는 이들의 발은 더욱 빨라지고 숨이 차오르고 거짓된 아름다움 속에서 맞이하는 클라이맥스.

    그 활기찬 연주에 관객들은 깜빡 속고 만다.

    트럼본이 앞서 무대의 마지막을 알 리고 푸르트벵글러가 팔을 크게 돌려 모든 악기의 음을 한 점으로 모은 뒤.

    허공에 마침표를 찍으며 끝을 고했다.

    “브라보!”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를 마치자 여태까지 가슴을 졸여왔던 관객들이 하나같이 일어서 박수를 보냈다.

    대기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윤희는 푸르트벵글러의 선곡에 감사했다.

    긴장을 이완시키고 잠들 수 있게 돕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앞선 연주가 이렇게 힘차게 끝난다면 크 게 대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효과가 배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윤희는 신곡 발표에 앞서 분위기를 만들어 준 세프에게 감사하며,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ㄴ 좋은데?

    ㄴ ㅇㅇ. 중간에 좀 의미심장한 게 있어서 졸리는데 딱히 갈등은 없네. 시원하고 듣기 좋구만.

    ㄴ 성격 나쁜 아저씨가 만든 곡임. 실컷 불안하게 해놓고 오래오래 즐 겁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엔딩임.

    ㄴ 왜 그렇게 삐뚤게 보냨ㅋㅋㅋ 좋기만 한데.

    ㄴ 헉헉헉. 신곡 빨리. 빨리!

    ㄴ 쟨 아까부터 신곡 타령이네.

    ㄴ 배도빈 신곡 더 가져 와! 아니지. 다 가져 와.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A의 연주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현장에서도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과감한 해석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역시 브람스는 푸르트벵글러네.”

    “다음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못 보는 게 아쉽지.”

    “왜? 배도빈이 아니라 푸르트벵글러가 출전할 수도 있잖아. 사카모토 료이치가 복귀했으니 고집을 부릴 만도 하지 않아?”

    “아, 그런가? 하긴. 결판을 못 냈 으니까 두 사람.”

    “에이. 당연히 배도빈이 나서겠지. 무슨 소리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한 일행의 대화가 끝날 무렵.

    무대 위에 구두 소리가 번졌다.

    머리카락을 단정히 말아 묶어 올린 나윤희는 에크루 바탕에 세 개의 세로 줄이 검게 놓인 시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진홍색 바이올린이었다.

    블러드 와인은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한 선명한 색을 과시하며 나윤희 의 품에서 노래할 준비를 하였다.

    ‘저게 뭐야?’

    ‘새 바이올린인가?’

    ‘명품인가? 처음 보는데.’

    ‘파이어버드 아니야?’

    ‘파이어버드는 좀 더 어둡잖아.’

    여러 반응 속에서 배도빈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잠자는 숲속의 공 주’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경쾌한 도펠그리프가 경사를 알렸다.

    국왕은 귀여운 공주를 위해 축제를 열고 요정들을 초대한다.

    나윤희의 블러드 와인은 청아하고 때론 상냥하게 울며, 돌아가며 축복 하는 요정들을 그린다.

    느긋하고 평온한 멜로디.

    앞서 질주하는 듯한 연주를 들었던 관객들은 조금씩 그 화목함에 이완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평화롭던 멜로디 사이에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불길한 소리를 제치고 나선 고약한 몽마가 성을 낸다.

    ‘감히 나만 빼고 파티를 열어?’

    ‘이 아이는 성인이 되는 생일에 물레 바늘에 찔려 죽게 될 거야!’

    몽마의 저주에 깜짝 놀란 왕과 왕비는 두려움에 떨지만 미처 축복을 내리지 못했던 남은 요정이 희망을 남긴다.

    ‘사랑스러운 공주님, 걱정 마세요. 당신은 바늘에 찔려도 깊이 잠들 뿐, 죽진 않아요.’

    시간이 흐르고.

    공주는 총명하고 밝게 자란다.

    나윤희의 부드러운 아르코가 공주 의 활기찬 모습을 그리나 관객들은 여전히 앞선 불안한 멜로디를 잊지 못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곧 불협화음들이 끼어들기 시작한다.

    조금씩 엇나가는 멜로디.

    숨바꼭질을 하며 숨을 곳을 찾던 공주는 어느 외딴 방에 들어서고 그 안에 처음 보는 물건에 관심을 보인다.

    국왕이 나라 안의 물레는 모두 태운 탓에 공주는 그것이 자신을 위협 할 물건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평화롭고 경쾌하던 멜로디는 어느 새 날카로워져 있었고.

    1악장이 끝나는 순간.

    나윤희가 현을 뜯어 비극을 알렸다.

    공주가 바늘에 찔리고.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공주가 잠든 탑은 장미 덤불로 감싸여 있다.

    그간 이웃 나라의 노련한 장군과 유능한 마녀, 용감한 왕자가 공주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이 접근할 때마다 몽마가 다가와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뤄주겠다고 속삭였다.

    블러드 와인의 농후한 음색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느린 멜로디와 만 나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끌어내렸다.

    잠든 장군은 전쟁이 없어진 꿈에 빠져 깨어날 수 없었고, 공주를 구해 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녀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꿈을 꾸었다.

    가장 깊이 들어갔던 왕자마저 결국 몽마의 유혹에 빠져 공주와 행복하 게 사는 꿈에 이르렀다.

    ‘충분히 눌러야 해.’

    나윤희는 그 어떤 때보다 집중했다.

    배도빈이 만든 이 완벽한 선율을 온전히 연주하는 것만 생각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신경은 예민해져 활을 쥔 손과 귀는 정확했고 감정은 충만히 이어졌다.

    2악장이 고요하게 끝나고.

    또다시 시간이 홀러 이제는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조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수백 년간 불어난 장미 덤불은 비 대해졌고 몽마마저 죽고 사라진 가 운데 잠든 공주.

    마치 막 잠들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그녀를 위로하는 건 요정들이 남긴 축복뿐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히.

    연주를 마친 나윤희가 콘서트홀에 마지막 음이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자세를 풀지 않다가.

    ‘해냈어.’

    첫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과 함께 비로소 눈을 떴다.

    그러나 고요함만이 그녀를 반길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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