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408화
89. 저주(6)
다음 날.
나윤희와 악기상을 찾았다.
니아 발그레이가 추천한 곳이라 무척 기대했는데 여러 현악기가 줄지 어 있어 과연 장관이었다.
양질의 올드와 준수하게 음을 틔운 모던까지.
세계 각지의 마이스터들이 만든 작 품을 빠짐없이 모아둔 듯하다.
‘이런 곳이 있었나.’
나윤희도 놀랐는지 고개를 바삐 움 직인다.
“허허. 귀한 손이 오셨구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푸근한 인상 의 노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 사람이 니아 발그레이가 말했던 바이올린 제작의 명장, 로렌초 조반 니인 모양.
이탈리아 크레모나 출신이라 들었다.
“반갑소. 로렌초 조반니라 하오.”
“반가워요. 배도빈입니다.”
“나, 나윤희라고 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주인과 불새를 모를 리 없지. 허허.”
로렌초 조반니가 푸근하게 웃었다.
서글서글하니 좋은 인상이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는가?”
나윤희가 망가진 바이올린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렸다. 다소 걱정스러운 눈치인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고칠 수 있을까요?”
“어디 봅시다.”
로렌초 조반니가 목에 걸고 있던 안경을 쓰곤 면장갑을 꼈다.
목이 부러진 바이올린을 안타깝게 관찰하더니 감상을 늘어놓았다.
“20세기 초 프랑스 제품이로군.”
올드와 모던을 나누는 100년이란 시간에 걸쳐 있는 바이올린이었던 것 같다.
“마감 상태를 보니 실력 있는 사람 이 만든 듯한데 어떻소.”
조반니가 나윤희를 보았다.
“모르겠어요.”
누가 만들었는지 라벨이 붙어 있는 경우도 드물고 있다 하더라도 바이올린에 붙어 있는 라벨은 믿을 게 못 된다.
위조가 많아 100년 이상된 올드 바이올린의 경우에는 직접 연주해 봐야만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있다.
나윤희도 마찬가지였으리 라.
로렌초 조반니가 곧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좋은 물건이지만 놔줘야 할 듯싶소. 애석하게 됐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해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지 나윤희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대학 입학을 기념으로 아버지께 선물받은 바이올린이었으니 족히 8년을 함께했을 터다.
연주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길들였는지 알 수 있어, 안타까웠다.
나윤희가 자책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많이 좋아하나 보오.”
“네••••••
흐음 하고 신음한 로렌초 조반니가 턱을 쓸며 다시 한번 나윤희의 바이올린을 살폈다.
“어디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도록 하지요.”
“아!”
반가운 소식에 나윤희의 축 처진 어깨가 바로 섰다.
“최대한 흉내는 내보겠지만 본래 소리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크 게 기대하진 마시게.”
그러나 조반니는 현실을 확실히 해 두었다.
“원래 있던 녀석의 아들이라 생각 하면 될 게요. 허허허.”
쓰고 있던 바이올린을 고친다 해도 한 번 망가진 바이올린이 제 성능을 보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리는 어디까지나 조반니의 말대 로 위로로 여길 뿐이다.
나윤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실망 감을 감추지 못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그나마 위로가 된 모양.
나윤희가 마음을 굳히고 케이스째 넘겼다.
그러고는 전시되어 있는 바이올린을 구경하는데 아무래도 무대 위에 서 쓸 물건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어때요?”
짙은 고동색의 바이올린을 가리키 자 의뢰받은 바이올린을 두고 나온 조반니가 웃으며 나섰다.
“허허. 역시 안목이 있구려.”
그가 바이올린을 내려 나윤희에게 보여 주었다.
앞판과 뒷면에 남은 거친 느낌이 확실히 오래된 물건처럼 보인다.
“2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물건이오. 소리가 기가 막히 지.”
조반니가 활을 건네며 안쪽의 시연실을 가리켰다.
머뭇거리는 나윤희의 등을 밀어 연주해 보게 했더니 생각대로 음색이 부드럽다.
다만 그리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어디 불편해요?”
“조금 어색해서.”
나윤희가 바이올린을 받치곤 어깨 와 팔로 크기를 가늠했다.
스크롤을 감쌀 수 있어 딱 맞는 사이즈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같은 4/4 사이즈라 해도 장인마다, 악기마다 조금의 차이가 있을 수밖 에 없다.
나윤희만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한 바이올린을 오래 사용했으니 아주 작은 차이라도 크게 느낄 터.
“약간 큰 거 같아요. 조금 더 작은 사이즈는 없을까요?”
본인만 아는 느낌이니 이렇게 솔직 하게 말해주는 편이 좋다.
“좀 더 작은 거라……. 잠시 기다 려 보시오.”
조반니가 세 개의 바이올린을 더 가져다주었지만 다들 무엇 하나씩 빠진 느낌이었다.
“이건 울림이 부족한 거 같아요. 좀 더 큰……
다섯 번째 바이올린도 거절한 나윤희는 조금씩 우울해졌다.
망가진 바이올린에 대해서도, 앞으로 당장 무대에 올라야 하는 일도 모두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꾸만 거절해서 조반니에 게 미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급하지 말아요.”
“아, 으, 응.”
“악기 고르는 일이잖아요. 타협하지 말고 충분히 생각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 따위 위로가 될 리 없다.
본래 사려 깊어 걱정도 많은 나윤희에게는 안 하니만 못한 위로다.
지금은 앞으로 사용할 바이올린을 고르는 일에 집중해야 할 때.
그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할 순 없다.
“충분히.”
나윤희도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단지 성격상 걱정이 많을 뿐.
자신이 옳다는 걸 지지해 주는 것 만으로도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그런 사람이다.
“네. 충분히.”
"응."
다행히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조반니 선생님, 저것 좀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도록 하지요.”
로렌초 조반니도 기꺼이 나윤희가 처음 지목한 바이올린을 꺼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오늘 당장 살 필요는 없어요. 일 정은 소소나 한스가 대신해 줄 테니까.”
혹시 조급해할까 봐 입을 여니, 나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 게다가 바이올린이 없으면 연주도 못 하 고.”
이제 보니 단 하루 손에서 바이올린을 떼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달이 났던 모양.
‘그런 이유라면 말릴 수 없지.’
마음껏 구경할 수 있게 한 걸음 물러났다.
나나 조반니의 추천을 받지 않고 스스로 악기를 지목해 살피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즐겁다.
어쩔 수 없는 바이올리니스트.
세계 각지의, 유서 깊은 바이올린 들 사이에서 어느새 활기를 찼고 있다.
“혹시 사운드포스트 조정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전시해 놓을 첼로를 볼까 싶은데 나윤희가 크게 놀랐다.
듣기 드문 고양된 목소리다.
“1, 15만 유로요?”
다가가니 한눈에 봐도 괜찮은 물건이다.
15만 유로면 2억쯤 하려나.
물건에 비하면 도리어 싼 편인 듯 하나 나윤희에게는 연봉과 맞먹는 큰돈이겠다.
“마음에 들어요?”
“소리가 얕은 거 빼곤 마음에 들어서 여쭸는데.”
진심인 듯하다.
“가격 생각은 말고 마음에 드는 걸 찾아요.”
“아, 안 돼. 괜찮아. 내가 살 거야.”
“이번 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선물해 주는 거니까 부담 가지지 말아요.”
그냥 사 준다고 하면 이렇게 나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한 말인데 예상 대로 별말 않는다.
‘사적인 선물은 부담스러워도 법인 카드로 사는 물건은 괜찮거든요.’
처음 들었을 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멀핀의 조언은 정확했다.
“천천히 둘러보시게. 어차피 다른 손님도 없으니.”
“감사합니다.”
나윤희는 천천히 넓은 매장을 둘러 보았다.
이제 온전히 자기 페이스로 쇼핑을 하는지 문득문득 서 있다가 중얼거리길 반복했다.
“ 아.”
그러다 반응을 해서 다가가 보니 타오르는 듯한 진홍빛의 바이올린이 유리 케이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흐음. 그건……
로렌초 조반니가 난감하다는 듯 케 이스를 열었다.
곧 흘러내릴 것만 같은 무늬가 꼭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나오는 포도 주 같은 색이다.
“워낙 새침한 아이라 잘 보여주진 않는 물건이오만 한번 연주해 보겠소?”
“네……
“아무도 없으니 여기서 해도 괜찮소.”
나윤희가 진홍색 바이올린을 들었다. 어깨에 받치고는 자세를 잡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안정적이었다.
마치 그녀의 물건인 듯하다.
조심스러운 손짓.
활을 현에 살짝 얹었다.
표면을 충분히 느끼고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좋은데.’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농염.
고혹적인 목소리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몽마와도 같은 음색이다.
짧게 시연한 나윤희는 얼떨떨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좋아요.”
“그거 참으로 영광이로군. 허허.”
반응이 의아하여 방금까지 바이올린을 보관하고 있던 유리 케이스 옆 에 로렌초 조반니의 이름과 1998년 이라는 제작년도가 적혀 있었다.
“직접 만드셨군요.”
그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때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주 인을 못 찾았던 딸이지.”
자기가 만든 바이올린을 딸로 여기는 듯하다.
“따, 따님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윤희가 진홍색 바이올린을 꼭 안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 가만있는데 로렌초 조반니가 크게 웃었다.
“껄껄껄껄. 이런 손님은 처음이군. 내 많은 사람에게 내 바이올린을 팔았지만 정말 재밌는 사람이구려.”
나윤희가 얼굴을 붉혔다.
“블러드 와인.”
조반니가 나윤희에게 다가가 바이올린을 건네받았다. 애잔한 눈으로 그것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음색이 너무 짙어 제대로 사용할 사람이 없었는데, 그대라면 이 고집 쟁이를 잘 다뤄줄 수 있을 듯하오.”
“치, 친하게 지낼게요.”
나윤희는 이미 블러드 와인에 푹 빠져버린 것 같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이스 터 로렌초 조반니는 두 손으로 블러드 와인을 들어 나윤희에게 넘겼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불새와 함께라 면 이 아이도 즐거울 테지. 부탁하오.”
“가, 감사합니다.”
제작자와 연주자가 모두 만족하니 이보다 좋은 거래는 없을 것이다.
케이스나 보증서 등 따위를 챙기고 계산을 하려 하니 나윤희가 침을 꿀 꺽 삼켜, 그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그냥 가시오.”
“네?”
“딸을 어떻게 돈을 받고 팔 수 있나. 그냥 가져가시오.”
“그럴 수는……
“고마우면 이 로렌초 조반니의 딸이라고 소문 좀 내주시구려. 허허허.”
듣고 있다 보니 훈훈하긴 한데, 이 만한 물건을 받고 값을 치르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딸을 팔 수는 없다는 로 렌초 조반니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고민하던 차.
블러드 와인이 든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이 케이스는 얼마죠?”
“허허. 같이 드리는 거니 걱정 마시게.”
“리보니에서 만든 것보다 품질이 좋아 보이네요. 자수도 직접 넣으신 것 같고.”
“아니, 다른 것은 수제긴 해도 원 단은 공장에 의뢰한 건데.”
“아, 이 손잡이도 좋은 느낌이네요. 누나, 쥐어 봐요. 그립이 괜찮죠?”
“으, 응? 응.”
“이 습도계도 참 좋네요. 세심해요.”
“관리를 하려면 당연히……
조반니의 말을 끊었다.
“30만 유로 정도는 되는 케이스네요. 이것도 같이 사죠.”
당황한 그에게 카드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