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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07화 (40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07화

    89. 저주(5)

    배도빈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기운 차린 거 같아서 다행 이네.”

    차채은은 웃으면서 초대한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배도빈의 예상보다 사람이 꽤 많았는데, 익히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또래 친구들도 있는 것으로 보 아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응. 한동안 적응 못 해서 힘들어 했으니까.”

    배도빈은 갑작스레 유학 와서는 독 일어가 어렵다고 징징대던 차채은을 떠올리곤 속으로 웃었다.

    “얼마 전에는 한이슬 평론가랑 친 해졌나 봐. 같이 찍은 사진 보여주 더라.”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 차채은이 진로를 바꾸지 않는다면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괜찮겠지.”

    “형, 나 저 케이크 먹고 싶어.”

    배도진이 옷을 잡아당겼다.

    “그래 음식 좀 떠 오자. ……잠깐.”

    고개를 돌린 배도빈은 연회장 한쪽 에 서 있는 11층 케이크를 보곤 깜짝 놀랐다.

    층별로 서로 다른 색을 이루고 있는 거대 케이크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배도진이 눈을 빛냈다.

    “맛있겠지?”

    “저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아?”

    “응. 내가 선물한 거야.”

    “네가?”

    “차를 사 줄까 했는데 이미 아버님 께 받았다고 해서. 실은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거든. 생일이니까 케이크? 무난하지?”

    “저게 무난하다고?”

    배도빈은 피셔 디스카우나 진칠삼 같은 거구만 한 크기의 거대 케이크에 질리고 말았다.

    “형들 거도 가져다줄까?”

    배도진이 최지훈과 배도빈을 번갈 아보며 물었다.

    최지훈이 기특하게 여기며 응했다.

    “그럼 조금씩만 부탁할게.”

    “맡겨줘.”

    “조심해.”

    “응.”

    배도빈의 당부를 이해한 것인지 배도진은 쉽게 대답하고 11층 케이크 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안녕.”

    배도진이 양손에 접시 하나씩, 왕 소소가 4개의 접시를 가득 채워 나 타났다.

    온갖 디저트가 종류별로 산처럼 쌓 여 있어, 디저트를 좋아하는 배도빈 조차 놀랄 정도였다.

    나윤희와 진달래, 나카무라 료코도 함께 있었다.

    “그게 다 뭐예요?”

    “스트레스.”

    왕소소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아 디저트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나윤희가 도진이를 도와 같이 들고 있던 케이크를 내어놓았다.

    “무슨 일 있어요?”

    배도빈이 케이크를 건네 받으며 물었다.

    “가우왕 씨랑 브라움 악장이 싸워 서 속상한가 봐.”

    왕소소가 먹다 말고 배도빈을 보았다. 시선을 마주하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쫓아내면 안 돼?”

    “이미 벌어진 일이잖아요. 내년에 가우왕이 우승 못 하는 걸 바라야 죠.”

    배도빈의 대답에 왕소소는 좌절했고 최지훈은 주먹을 쥐며 의욕을 보였다.

    “……역시 저주뿐인가.”

    혼잣말을 한 소소가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모두가 어색해하고 있는데 배도진이 케이크를 먹으며 물었다.

    “저주가 뭐야?”

    “배가 아프게 한다든지 넘어지길 바라는 거야.”

    “바라면 이루어져?”

    "응."

    “어떤 원리야?”

    소소는 나름대로 설명을 시작했고 배도진은 그것을 관심 있게 들었다.

    “이상해. 놀리는 거지?”

    “아냐, 도진아. 저주는 있어.”

    “암암. 있고말고.”

    소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배도진은 나카무라 료코와 진달래까지 나서자 고장 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최지훈이 웃 으며 배도진을 달랬다.

    “아, 누나.”

    “ 응?”

    나윤희가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일 퇴근 전에 잠깐 내 방에 들 려줘요.”

    "응."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경품 추첨, 진달래의 축가, 선물 개봉식 등 일행은 준비된 일정을 충 분히 즐겼다.

    그날 가장 반응이 좋았던 선물은 진달래가 주문 제작한 베토벤 봄잠 바였다.

    등에 베토벤의 험악한 얼굴이 대문 짝만 하게 박혀 있었는데, 다들 그 특이한 모습에 웃고 말았다.

    * * *

    다음 날 퇴근 시간 즈음.

    어제 했던 약속대로 배도빈을 찾은 나윤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배도빈이 악보를 건넸기 때문.

    예상하지 못한 일에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만 뻥긋거릴 뿐이었다.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잠자는 숲속의 공주.

    그 아래 ‘바이올리니스트 나윤희에 게’라고 적혀 있었다.

    “누나가 제일 잘 연주해 줄 거 같아요.”

    고개를 들었다가 숙였다가 하며 악보와 배도빈을 번갈아보던 나윤희는 한참을 그런 뒤에야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새, 생각도 못 했어. 정말, 정말 받아도 돼?”

    “그럼요.”

    나윤희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불새는 찰스 브라움을 위한 곡을 대신 연주했던 경우였고, 온전히 곡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더욱이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에게 서 받았으니, 나윤희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무리해서 연습하지 말아요. 난이 도가 있는 곡은 아니라서 괜찮을 것 같지만.”

    “응!”

    나윤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 악보를 다시금 살폈다.

    “고마워.”

    나윤희가 몸을 들썩였다.

    “한 달 정도면 되죠?”

    “아, 아니. 2주. 아니, 1주일이면 괜찮아.”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일정은 멀핀이랑 상의하고 적당하게 잡아요.”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들썩이는 걸 넘어서 당장에라도 나가고 싶어 했는데 그 마음을 눈치 챈 배도빈이 웃으며 물었다.

    “먼저 퇴근할까요?”

    “응. 난. 흐.”

    곡을 새로 받았으니 내일까지 기다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나윤희는 배도빈을 먼저 보내곤 그 길로 개인 연습실을 찾았다.

    악보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이 펼쳐졌다. ‘잠자는 숲속 의 공주’라는 부제처럼 어떤 이야기가 느껴져 연주를 하지 않았음에도 즐거웠다.

    ‘괜찮을 것 같아.’

    배도빈의 말대로 난이도가 그리 높은 곡은 아니었다.

    도리어 기교가 뛰어난 나윤희에게는 다소 심심할 정도였는데 연주를 시작하니 그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버릴 것 같았다.

    ‘좋다.’

    잔잔함이 좋았다.

    반복되는 주 선율이 조금씩 달라지 는데 그것을 어떻게 더 부드럽게 표 현할지를 생각하니 즐거웠다.

    사이마다 들어 있는 불안한 화음들 은 아직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곡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선 에서 긴장감을 더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읽고자 틀리더 라도 멈추지 않고 연주했다.

    초견을 마친 나윤희가 바이올린을 내렸다.

    ‘ 피곤한가?’

    좀 더 공부하고 싶은데 오늘따라 몸이 나른했다.

    그러나 곡을 받았다는 기쁨에 고개를 저어 잠을 쫓고는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각 지시문의 의미를 조금 더 이해하고자 구역을 나눠서 연습 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미지가 구체 화되었다.

    ‘도빈이는 천재야.’

    글과 영상이 아니라 단지 음악만으로 이렇게나 선명한 서사를 그려낼 수 있다니.

    나윤희는 머릿속에 잡히기 시작한 저주받은 공주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밤이 깊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연 습하던 나윤희는 어느 정도 곡에 익 숙해졌고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30분간 이어지는 소나타.

    너무도 큰 기쁨 탓에 피로도 잊고 무리했던 탓인지.

    연주를 하던 나윤희는 자신도 모르 게 잠들기 시작했다.

    * * *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쳤어. 미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습실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바이올린은 목이 부 러져 있었다.

    대학생 때부터 쓰던 정든 바이올린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아무리 피곤했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떡해.’

    고칠 수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목만 부러진 게 아니라 뒷판도 조금 들어가 있다.

    “하아아.”

    곡을 받았다고 너무 들떴던 것 같다. 이렇게 칠칠맞아서야 어떻게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라고 할까.

    얼굴을 감싼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은 뒤에야 조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1시.

    깜짝 놀랐다.

    어제 대충 1시쯤까지 연습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나 오래 잠들었을 거 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소소랑 료코, 달래, 도빈이가 보낸 메시지와 전화가 잔뜩 와 있었다.

    ‘걱정하겠지.’

    막 일어서려 하는데 연습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랐는데, 도빈이가 다급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미, 미안해. 걱정했지.”

    “놀랐잖아요.”

    무심해 보여도 정이 많으니 걱정했을 거다.

    최근에 가우왕 씨 일도 있었으니까.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도빈이가 테이블에 놓아둔 바이올린을 보고 말았다.

    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었는데.

    악장이 되고 나서는 똑 부러진 모습 보여주고 싶었는데, 자기 악기 하나 관리하지 못하니.

    나 같은 건 악장으로 있을 자격도, 도빈이의 곡을 받을 자격도 없다.

    뭘 잘했다고 자꾸 울려는 걸까.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피곤했나 봐. 연습하다가 잠 들었는데.”

    진심 어린 눈을 보니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실망했겠지.

    “오늘은 일단 들어가서 쉬어요. 차 불러줄게요.”

    “아, 아니야. 괜찮아.”

    “쉬어요. 걱정되니까.”

    “••••••응.”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효과가 너무 좋잖아.”

    그때 도빈이가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들었는데 도빈이가 망가진 바이올린을 살피며 말했다.

    “이거 못 쓰겠네요. ……미리 말을 해줄 걸. 미안해요.”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자기 악기 하나 간수 못 하는 내 잘못이야.”

    정말 구제불능이다.

    “아뇨. 저도 이거 연습하다가 계속 잠들었거든요.”

    “..어?”

    “불면증 겪는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만들려고 했는데, 괜찮게 나온 모양이에요. 누나까지 잠들었을 정 도면.”

    도빈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설명 없이 도 그런지 궁금했어요. 오늘은 돌아 가서 쉬고 저녁 때 같이 악기 보러 가요.”

    “나 뭐가 뭔지……

    “제대로 연주한 거 같아요. 하루 만에 익힐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많이 기뻤나 봐요.”

    "으윽."

    “신경 쓰지 말아요. 누나 잘못 없으니까. 바이올린 망가진 게 미안한데……

    도빈이는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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