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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406화 (40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06화

    89. 저주(4)

    마지막 날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홍 승일의 묘를 찾았다.

    “오늘은 도빈이도 왔다.”

    할아버지는 무덤 앞에 앉아 씁쓸하 게 웃으셨다.

    “네가 바라던 것처럼 우리 도빈이 아주 잘났다. 어딜 가도 도빈이 이야기뿐이야.”

    나와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던 친구였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친구라 할 수 있던 유일한 사람.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마주보고 앉은 채 말이 없어진 할 아버지의 뒷모습이 평소와 달리 유독 쓸쓸해 보였다.

    할아버지께 베를린에서 함께 살자 고 말씀드렸지만, 나이가 들면 추억이 많은 곳에 있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하셨다.

    “껄껄. 걱정 마라. 보고 싶으면 안마권을 쓰면 되니까.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겠지? 할애비가 쓴다고 하면 냉큼 와야 한다.”

    “그럴 거면 그냥 베를린으로 가요.”

    “싫다, 요놈아. 껄껄껄껄!”

    잠시 주변을 보았다.

    곧 봄이 올 듯하다.

    “네가 이번에 만든 곡 있지 않느냐.”

    “네.”

    “좋은 일이다;’

    홍승일의 묘를 찾아 그런지 할아버 지는 다소 감상적으로 말했다.

    “음악이 참으로 힘이 되더구나. 이 런저런 일로 스트레스 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게다.”

    더 바랄 것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다. 힘들 때마다 승일이 저 친구의 연주가 참 큰 힘이 되었지.”

    “네.”

    “아버지, 네 외증조부께 가업을 물 려받고 앞만 보고 달렸다.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모든 걸 다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구나.”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는 작게 웃고 있었다.

    “이제 돈이 없어 피죽이나 끓여먹 지도, 독재자 때문에 고통받지도 않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기더구나.”

    “뭔데요?”

    “외롭지. 인간답게 살던 그때가 아 니야. 이 몸뚱아리가 아니라 정신이 힘든 게야. 그러니 다들 가슴에 화병 이 남아 잠도 못 자고 하는 거다.”

    “할애비는 말이다. 남은 시간을 그 런 걸 조금 바꿔보고 싶단다. WH 라이프는 그걸 위한 곳이야.”

    WH라이프라면 얼마 전에 설립된 곳이다.

    도진이가 전공하는 분자생물학에도 투자하기도 했지만 일부일 뿐, 범지 구적 복지사업을 위한 곳으로 알고 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할애비나 너 나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게지. 그러 면 같이 있는 거란다.”

    사람을 위한 일.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큰 효과를 바라지는 않지만 분명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네요.”

    “그렇지. 하하하하!”

    좀 더 자주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배도빈은 어머니 유진희의 화랑에서 하루를, 동생 배도진과 하루를 보낸 뒤 복귀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큰 문제는 없었다.

    유능하고 풍족한 인력이 제 역할을 해주었기에 긴 휴가 끝에 배도빈이 처리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의 기싸움만이 문제가 되었다.

    “뭐가 문제예요?”

    배도빈이 두 사람을 불러다 앉혀 놓고 물었다.

    “저 빌어먹을 인간이 내 피아노에 멋대로 간섭하려는 게 문제지.”

    “저 대머리가 쓸데없이 겉멋만 부 려서 파이어버드의 노래를 방해하는 게 문제다.”

    “뭐?”

    만나자마자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 때문에 배도빈은 기가 차고 말았다.

    솔로였을 때부터 둘 사이가 안 좋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가우왕이 비록 성격이 개차반이고 찰스 브라움이 유독 자기애가 강하 다고는 해도 두 사람 모두 최고 수 준의 스폐셜리스트였다.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솔직한 두 사람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못 잡아먹어 안 달이 나 있으니 배도빈으로서는 이 해할 수 없었다.

    ‘동족 혐오 같은 건가.’

    두 사람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살았고 덕분에 친구가 없었다.

    오직 실력만으로 각자 분야에서 최 고 자리에 올랐으니, 그 고집은 바 뀌지 않을 터.

    배도빈이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입을 뗐다.

    “서로 일정 겹치지 않게 할 테니까 일단 진정해요.”

    두 얼간이는 배도빈의 말을 받아들 일 수 없었다.

    본인이 옳으니 상대가 굽혀야 하는

    데 일정을 분리하겠다니, ‘틀린 상 대’가 무대에 올랐을 때 그걸 지켜 만 볼 순 없었다.

    “저 치질 환자가 여기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라 면 다들 질리고 말걸.”

    가우왕이 입을 열었다.

    “밴드잖아. 라이브라고. 무대 위에서의 즉홍 연주까지 간섭하는 독재 자하고 누가 일을 같이하겠어?”

    “네 그 천박한 시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는 왜 생각지 않지?”

    배도빈이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양쪽의 말 모두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가우왕이나 찰스 브라움과 같이 뛰 어난 음악가라면 충분히 서로 조절 하여 더 나은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일이었다.

    ‘뭔가 있네.’

    문제가 다른 곳에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 말해봐요.”

    “뭘?”

    “말 같지도 않은 걸로 싸우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말 같지도 않다니! 너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들었던 그대로다.”

    두 사람이 격하게 반응했지만 배도빈은 속지 않았다.

    멍청이라고는 해도 음악에 있어서 만큼은 배도빈마저 인정하는 두 사람이었다.

    더 나은 연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 든 하였고 그럴 역량을 갖춘 두 거 장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배도빈이 말없이 기다리자 찰스 브라움이 일어났다.

    “더는 못 있겠군. 난 가보겠어.”

    배도빈도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차라리 따로 이야기하는 게 나을지 도 모른다고 생각해, 찰스 브라움이 떠난 뒤 가우왕에게 물었다.

    “찰스랑 무슨 일 있었어요?”

    “저 약속 있어요.”

    배도빈이 한 번 더 재촉하자 가우왕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예전 일이야.”

    배도빈이 소파 팔걸이에 손을 얹고는 턱을 괴었다.

    가우왕은 그런 배도빈을 보다가 하려던 말을 삼키곤 일어났다.

    “ 간다.”

    그는 배도빈이 잡을 새도 없이 자리를 떴고 남겨진 배도빈은 눈썹을 좁혔다.

    ‘두 사람이 접점이 있었나?’

    클래식 음악계가 좁긴 해도 두 사람 모두 독주를 주로 해왔기에 접점 이 많았을 리 없었다.

    대체 왜 저렇게 서로를 싫어하는지 알 수 없어 고민하던 와중, 배도빈 의 핸드폰이 울렸다.

    차채은이었다.

    [언제 와! 다 왔는데!]

    차채은이 보낸 메시지 아래 고깔모 자를 쓴 차채은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진달래, 그 두 사람 사이에 껴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나카무라 료코.

    그 뒤에 배도진과 함께 마주보고 웃고 있는 최지훈을 담은 사진이 올라왔다.

    배도빈이 그것을 확인하곤 작게 웃 으며 답장을 보냈다.

    [30분 정도 걸려.]

    [ㅇㅇ! 늦으면 딱밤 백 대!]

    잠시 후.

    베스트 웨스턴 호텔에 이른 배도빈은 최지훈과 차채은에게 양쪽 팔을 빼앗겨 버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생일 파티를 이렇게 요란스럽게 해?”

    배도빈이 차채은의 생일 파티가 한 창인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법 괜찮은 장소에 여러 음식이 호화롭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빠가 빌려줬지롱!”

    안으로 들어서자 사진 속에 없던 사람도 몇 있었다.

    배도빈이 모르는 사람도 있었는데 배도빈이 연회장에 들어서자 눈치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 사람들은?”

    “아, 출판사 분들.”

    눈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차채은이 어디론가 후다닥 뛰어갔다.

    “형이다!”

    배도진이 배도빈을 보자마자 녹은 초콜릿이 듬뿍 묻은 브라우니를 들었다.

    그것을 받아먹은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최지훈이 물었다.

    “바빴나 봐.”

    “어. 망할 인간들이 계속 싸워서.”

    “망할 인간?”

    “가우왕이랑 찰스.”

    최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멍멍이 아저씨랑 엉덩이 아저씨 싸워?”

    배도진이 걱정스레 물으며 또 한 번 브라우니를 들었다.

    “너 먹어.”

    배도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배도빈 은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받아먹 곤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서 로 나름 이유를 드는데 아무리 생각 해도 납득이 안 되는 거야.”

    “뭐라고 하시는데?”

    “서로 자기 연주 방해하지 말라는 건데 자기들이 언제부터 독주만 했냐고. 그런 거 이해 못할 인간이 아 닌데.”

    배도빈의 말을 듣고 있던 최지훈이 웃었다.

    “두 분 모두 아직도 신경 쓰고 계 신 모양이네.”

    “뭐 아는 거 있어?”

    “왜, 다들 비교하잖아. 바이올린 협 주곡 13번이랑 태풍. 최근에는 3개 의 손을 위한 소나타까지도.”

    최지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배도빈이 고개를 살짝 갸울였다.

    “몰랐어?”

    “그게 무슨 말이야?”

    “잠깐만.”

    최지훈이 핸드폰을 꺼내 펼쳤다.

    둥근 바 모양의 핸드폰에서 액정이 넓게 펼쳐져 나왔다.

    “가우왕 찰스 브라움.”

    곧 검색 결과가 나왔다.

    그 내용은 배도빈과 가장 잘 어울 리는 음악가와 단체에 대한 앙케트 조사 결과였다.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집계되고 있었다.

    1st 베를린 필하모닉(37.0%)

    베를린 환상곡(13.1%), 베토벤 교향곡 운명(13.0%), 드보르자크 교향곡 신세계로부터(10.9%)

    2nd 사카모토 료이치(18.8%)

    Honor(14.7%), 악마의 축복(4.1%)

    3rd 가우왕(16.4%)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9.4%), Dobean,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 주곡, 태풍(7.0%)

    4th 찰스 브라움(16.3%)

    배도빈 바이올린 협주곡 13번(9.3%), 스트라빈스키 불새(7.0%)

    5th 나윤희(8.8%)

    스트라빈스키 불새(8.8%)

    해당 설문조사를 확인한 배도빈은 신기한 나머지 목록을 쭉 살폈다.

    나윤희 아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최지훈만이 1퍼센트를 넘겼을 뿐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가장 큰 희망’과 ‘용감한 영혼’ 두 곡으로 6 위, 최지훈은 오케스트라 대전 2차 전에서 함께했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7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거 기준이 뭐야?”

    “실시간으로 계속 투표가 이루어지 니까 아무래도 최근에 했던게 높은 비율을 얻나 봐.”

    “그렇다고 하기엔 베를린 환상곡은 꽤 된 곡인데 제일 높잖아.”

    “그만큼 좋았으니까?”

    최지훈의 설명에 일단 납득한 배도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피아노 협주곡 C장조, A108을 찾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A108을 투표 하진 않았다.

    씁쓸하게 여기고 있는데 최지훈이 손으로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을 가리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브라움 씨가 3등이었고 가우왕 씨는 5등이었거 든.”

    “근데?”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로 순위가 바뀌었지?”

    “그러네.”

    “그 전에는 태풍이 엄청 인기 있었어. 그래서 2등까지 올랐던 적도 있었고. 13번 바이올린 협주곡 발표되었을 때는 브라움 씨가 제일 위였고.”

    “……대체 뭐가 문제야?”

    “가우왕 씨도 브라움 씨도 지고 싶지 않은 거 아니겠어?”

    “설마.”

    배도빈은 설마 그 두 사람이 이런 것 때문에 그 난리를 피웠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표를 살펴보니 최지훈의 말대로 언 제 했는지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 듯했고 때문에 객관적인 수치로 받 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둘이 아무리 바보라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야.”

    배도빈은 둘 사이에 어떤 심각한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난 맞는 거 같은데?”

    최지훈이 즐겁다는 듯 방실방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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