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04화 (40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04화

    89. 저주(2)

    노천욕을 즐기고 있자니 나른해져 무심코 졸고 말았다.

    의식이 반쯤 잠든 상태에서 들려오는 바람은 날카롭기 짝이 없어 온천 물의 열기와 대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는구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후우.”

    밖은 쌀쌀하기 그지없건만 이렇게 편안할 수 없다.

    할아버지의 취향대로 만들어진 이 곳 별장은 바다를 향해 시야가 트여 있고 그 주변을 숲이 감싸고 있다.

    편백나무로 이루어진 노천탕과 부 드러운 온천물 드넓게 펼쳐진 바다 그리고 다디단 오렌지 주스를 즐기 고 있다 보면 어느덧 잠에 취하고 만다.

    이곳에서만큼은 불면증도 힘을 쓰 기 어려울 것이다.

    때때로 나무가 바람에 스친다.

    사락사락 귀를 간질이고 찬 공기가 폐부를 채우는데도 이렇게나 나른할 수 있다니.

    수면을 취하기 위한 음악이라 해도 아주 잔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얼마나 안락함을 느끼는지가 더 중 요하지 않나 싶다.

    평화 속에서 평온을 느끼기 힘들 듯 반대로 대조적인 상황을 보며 현 재의 내 상태에 만족할 수 있으리 라.

    이런 느낌을 표현하려면 어떤 으두기 가 좋을까.

    ‘현악기가 좋겠네.’

    활을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음색이 다양해지는 현악기, 그중에서도 역 시 바이올린이 좋겠다.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역시 나윤희.

    온화한 면에서는 찰스 브라움이 낫겠지만 부드러운 가운데 치미는 불 꽃을 표현하기에는 나윤희만 한 바이올리니스트도 없다.

    악기와 연주자 그리고 분위기를 떠 올리니 조금씩 악상이 만들어진다.

    하강하다가 한 번 감고 다시 내려 가는 선율.

    ‘화음은 배제하는 게 좋겠지.’

    전개에 중점을 두고 박자 변화도 크게 주진 않는다.

    심장이 뛰는 속도에 맞춰 템포를 잰 다음 평온하게 이어가는 중간마다 가시 같은 불협화음을 배치하자.

    장미 덤불을 지나는 것처럼 조심스 럽게.

    그러나 길게 이어가면 도리어 수면을 방해할 뿐이다.

    장미 덤불을 지나면 짧은 잔디와 아담한 공터를 보여주자.

    아니, 집이 있는 것이 나으려나.

    기왕이면 현대적인 건물보다는 주 변과 어울리는 모습이 낫겠지.

    침대는 넓고 이불은 보드랍게.

    베개는 세 개쯤 있는 것이 좋겠다.

    ‘괜찮네.’

    수마가 또 모습을 드리운다.

    고개를 저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 정도 구도를 잡았으니 목욕이 나 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어머니랑 아버지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언젠가 한 번쯤 가족이 다함께 오고 싶다.

    이틀 뒤.

    참고할 자료를 구할 수 없어 시간 이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제주도에서의 휴가가 꽤 도움이 되었다.

    주 선율을 만들고나서는 이야기가 막히지 않고 이어져 금세 만족스러운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수정을 반복해야만 족하는 나로서는 꽤 드문 일인데 보강 작업 없이 처음 이뤘던 느낌 그대로 끝까지 작 업 했다.

    괜찮은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충족되었고 곡도 완성 했으니 슬슬 베를린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멀핀에게서 전화가 왔다.

    “멀 핀.”

    -목소리가 좋네요. 잘 지내시죠?

    “그럼요. 작업도 만족스러워요.”

    -다행입니다. 이번 곡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그간의 피로를 푸는 것도 중요합니다.

    “걱정 말아요. 더할 수 없이 푹 쉬었으니까.”

    멀핀이 웃고는 본론을 꺼냈다.

    -문의가 들어와 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한국에서 기자회견이나 방송 출연 약속하셨는지요?

    그러고 보니 공항에서 그랬던 기억이 있다.

    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기자들을 그리 달랬다.

    “네.”

    -그러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한국 언론사에서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휴가를 좀 더 길게 잡으시고 한 번 정도 나서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 내키지 않다.

    몇 주간 방송이든 시상식이든 공식 행사에 계속해 나갔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멀핀의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한 달이었을 테지만 한국에서는 아니었죠. 활동을 많이 하지 않으셨음 에도 보스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기회에 인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공항에서 기자들보다 팬들을 먼저 챙긴 것도 그 때문인데, 팬이 바란다면 한 번만 더 출연하는 것도 나 쁜 일은 아니리라.

    “맞네요. 그럼 이번 주 안에 적당 히 일정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기다리니 멀핀이 평소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편하게 말해요.”

    -독일 정부에서 추크슈피체산에 기념물을 재작한다고 합니다.

    남부의 큰 산이다.

    알프스 산맥과 이어진 곳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곳에도 사람의 손이 닿는 모양이다.

    “그런데요?”

    -큰 업적을 세운 위인들의 얼굴을 조각한다고 하는데, 세프와 보스를 포함한다고 합니다. 통보 받은 일이 라 선택권은 없어서 알려드릴 뿐입니다.

    “제가 할 일은 없죠?”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문제없네요. 고맙다고 해주 세요.”

    멀핀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지만 귀찮은 일은 없다고 하니 신경 쓰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완성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다시금 살폈다.

    G장조의 바이올린 소나타.

    완성했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어 마 무리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 보지는 않은 터라 어떨지 확인해 봐 야겠다.

    캐논은 가지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워 베를린에 고이 모셔둔 터라 한국에서 구한 기성품을 들었다.

    제법 말을 잘 듣는 좋은 물건이다.

    할아버지께도 들려드릴 겸 서재로 향했다.

    뭔가 어려운 책을 읽고 계신다.

    저 나이에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건강에 안도하고 감사할 뿐이다.

    “잠깐 괜찮아요?”

    “물론이고말고.”

    고개를 돌리고는 반색하신다.

    “오, 할애비한테 바이올린을 들려 주려는게냐.”

    “새로 만든 곡인데 어떤지 한번 들어주세요.”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줘야지. 어디.”

    할아버지가 자세를 고쳐 잡고 앉으셨다.

    바이올린을 어깨에 받치곤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장미 덤불을 그리듯 고혹적인 선율 로 마음을 빼앗는다.

    아름다움에 취한 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덤불 사이로 들어서고 가시 에 찔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서 서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이끌 려 간다.

    주 선율의 아름다움에 취하면.

    어둡기 짝이 없는 전주를 잊고 만다.

    사이마다 날카롭게 들어서는 불협 화음을 느낄 때야 비로소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낄 터.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이내 장미의 아름다운 자태 와 향기가 유혹하고.

    악마에게 영혼을 붙잡힌 채.

    한정된 자유 속에서 서서히 저항의 의지조차 잃은 채.

    수마가 이끄는 대로 몸과 영혼을 맡길 뿐이다.

    “드르렁.”

    연주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할아버지 가 코를 골았다.

    ‘효과 좋잖아.’

    숙면을 위해 만든 곡에 이보다 좋은 반응도 없을 것이다.

    “할애비 안 잔다.”

    곤히 잠드신 듯해 담요라도 덮어드 릴 생각으로 움직이니 잠든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작게 읊조렸다.

    “더 해요?”

    대답이 없어 조금 더 연주하니 나도 조금씩 졸립다.

    돌아가서 자려고 하는데.

    “안 잔다.”

    이제 보니 잠꼬대를 하시는 모양.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었으니 푹 주 무시게 나가봐야겠다.

    ***

    배도빈이 제주도에 머물고 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는 퍼스트 피아니스트 가우왕과 악장 찰스 브라움의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개성과 자존심이 강한 두 스페셜리스트는 밴드 공연에 있어 한 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았다.

    “네 멋대로 연주할 거면 악보는 왜 봐?”

    “하도 지루해서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천박하기 짝이 없군. 프란츠.”

    “네, 네!”

    “당장 이놈 파트를 빼서 악보 다시 가져와.”

    “웃기고 있네. 야, 꼬맹이. 나를 두 고 저 뺀질이를 세우려는 멍청한 생 각은 하지 않겠지?”

    두 사람의 싸움이 과열될수록 밴드 의 악보를 담당하고 있는 프란츠 페 터의 등만 터져나갔다.

    “이봐. 프란츠가 불쌍하지도 않아? 연습 때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그만들 해.”

    오늘도 어김없이 맞붙은 두 사람은 최연장자 다니엘 홀랜드가 나서도 서로를 향한 이빨을 감추지 않았다.

    “빼, 뺀질이? 이 천박한 대머리가 대체 어디까지 무례할 셈이냐!”

    “대, 대머리! 치질 걸린 버터 놈이 귀 먹은 걸로도 모자라 눈까지 삐었나 본데! 어딜 봐서 내가 대머리 야!”

    두 사람의 유치한 말싸움에 나윤희와 왕소소, 진달래, 다니엘 홀랜드, 프란츠까지 밴드 전체가 진이 빠지 고 말았다.

    “아! 지긋지긋해! 아저씨들 대체 뭐 하는 거야! 연습 안 해?”

    진달래가 소리쳤다.

    “이 녀석이 마음대로 트릴을 넣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듣기 좋더만!”

    “거 봐! 네놈은 내가 튀는 게 싫을 뿐이지!”

    “너 때문에 내 파이어버드의 아름 다운 목소리가 묻히니 하는 말이 다!”

    찰스와 가우왕의 언쟁이 다시금 가 열되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왕 소소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최지훈 언제 와.”

    그녀는 가우왕이 당장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나갔으면 했다.

    오빠가 들어온 뒤로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쫓아내고 싶었다.

    옆에 있던 나윤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가우왕 씨 들어오고 나서 활발해졌잖아.”

    “귀찮아. 지겨워. 재수 없어.”

    왕소소는 단호했다.

    반면 두 사람의 싸움을 단 한사람 만이 관심 있게 지켜봤는데 테메스 마을의 천재 스칼라는 언쟁에 적극 적으로 참여했다.

    “네가 쓸데없는 걸 계속 연주하니까 들어갈 박자를 자꾸 놓치잖아!”

    “신경 쓰지 말고 네 연주나 해! 조율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그럼 그쪽 바이올린은 나한테 맡기는 게 어때?”

    “넌 또 뭐야!”

    “두 사람이 겹치는 부분 때문에 싸우니까 차라리 내가 하면 되지 않을 까 싶어서. 피아노와 어울리는 하프 라니, 궁금하지 않아?”

    “그래, 이 버터 놈과 붙어 있을 바에는 촌뜨기가 낫겠어.”

    “홀륭한 판단이야.”

    “웃기지 마!”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의 연습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김이 샌 진달래는 나윤희와 왕소소 곁으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저 사람들 진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대? 아주 자기만 잘났어.”

    동생의 불평에 나윤희가 웃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은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사회 생활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강한 자부심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잘 들으면 결국에는 음악 이야기하고 있잖아.”

    나윤희의 말에 진달래가 여전히 언 성을 높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윤희가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으니 저럴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생각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멋있는 것 같아.”

    “아니야, 언니. 멋있는 건 아니야.”

    진달래는 아무리 생각해도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이 동네 바보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연주할 때를 제외하곤 그들이 대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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