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03화 (40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403화

    89. 저주(1)

    ‘아주 완벽한 수면 치료제였지.’

    그녀의 목소리와 특유의 어조는 입 학식 날 햇병아리들에게 덕담을 해줬을 때부터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날 단잠에 빠지게 했다.

    그때도 자장가를 만든다면 참고할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나윤희가 잠이라도 푹 이룰 수 있게 참고하는 것 도 나쁘지 않겠다.

    단원들 중에도 말 못할 스트레스로 불면증을 겪는 이가 알게 모르게 있을 터.

    공개적인 일을 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러지 않을 수 없다.

    ‘괜찮겠지.’

    잘 때 듣는 편안한 곡을 만들어 봐야겠다.

    다음 날.

    멀핀을 호출했다.

    “한국에 일주일 정도 다녀올 거예요. 푸르트벵글러나 케르바 일정은 어때요?”

    “조절 가능합니다. 두 분이 어렵다 해도 파울 리히터 악장도 있으니까요. 유장혁 회장님께서 반가워하시겠네요.”

    “할아버지도 만나겠지만 녹음하러 가는 거예요.”

    멀핀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예정된 일은 없습니다만 혹시 새로 뭔가 구상 중이신가요?”

    “네.”

    멀핀이 기쁘게 웃는다.

    “여유가 생겨도 쉬지 않으시네요. 좀 더 편히 계셨으면 하지만 보스의 새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멀핀이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아부처럼 들리지 않아 그녀의 신뢰 에 더욱 고마울 뿐이다.

    나름대로 추측을 내놓는다.

    “설비는 이쪽이 나으니 굳이 한국 까지 가서 하려고 하신다면 중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혹시 차명 운 지휘자인가요?”

    “ 아뇨.”

    “아, 설마 박건호 피아니스트.”

    “아니에요.”

    “최성신은 유럽에 있으니…… 어쩌 면 손가을 피아니스트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 피아니스트라면 가우왕 씨가 있으니. 모르겠네요.”

    혼자서 이런저런 추측을 하던 멀핀 이 웃으며 이제 알려 달라고 하기에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박말자 선생님이요.”

    “••••••네?”

    눈을 굴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멀핀 이 다시 물었다.

    “한국에는 천재가 여럿 있다고 들었는데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나 보네요.”

    “초등학교 다닐 때 교장이었어요.”

    “교육자셨군요. 보스가 함께할 정 도로 음악에도 조예가 있다니 대단 한 분이시네요.”

    “그러진 않을걸요?”

    멀핀이 답답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설명을 바랐다.

    “그건 아닌데 사람을 재우는 데는 최고였어요.”

    “네?”

    일주일 뒤.

    케르바 슈타인과 파울 리히터가 빈 자리를 부탁하고 한국으로 향했다.

    〈피델리오〉아시아 투어 때도 들렸지만 공연 때문에 콘서트홀과 호 텔에만 있었을 뿐.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온 것은 오랜만이다.

    분명 조용히 왔는데, 어찌 알았는지 가는 곳마다 난리도 아니었다.

    “배도빈! 배도빈이야!”

    “배도빈 씨! 이번 귀국 목적은 무엇입니까!”

    “진짜 배도빈이네? 많이 컸다!”

    “예정 중인 행사가 없는 것으로 알 려져 있는데 무언가 준비 중이신 건가요!”

    팬과 기자들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달려들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 누군 가 다치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피델리오〉와 천만 관객을 넘긴 덕분에 한 번 더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이쪽! 이쪽 좀 봐주세요!”

    “다음 한국 공연은 언제쯤 예정되어 있습니까!”

    “오빠! 어떡해! 나 방금 눈 마주쳤어!”

    “미친. 왤케 착하게 잘 컸어?”

    “NBC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방송국에서도 온 모양.

    피델리오 투어 때는 3개 대륙을 연속해서 이동하는 바람에 그 외 일 정은 최소화했는데 그 아쉬움을 달 래줘야 했다.

    “조만간 자리 한번 만들 테니 그때 하죠.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고생했습니다! 그러니까 10분, 아 니, 5분만요!”

    “아저씨! 좀 비켜요! 도빈이 안 보 이잖아요!”

    방송국은 어떻게든 스케줄을 잡으면 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모여든 팬들은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렵다.

    이렇게 되었으니 인터뷰는 못해도 저들과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야겠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 께 피해 가지 않게 사인은 저쪽에서 해드릴게요.”

    “사진! 사진 찍어주세요!”

    “그래요.”

    “대박. 대박! 나 미칠 것 같아!”

    “미치지 마요.”

    사진 한 장으로 좋아해 주니 이쪽 이 더 고맙다.

    4시간 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꽤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인근에 와서 전화를 드리자 대문까지 냅다 뛰어나오셨다.

    “어이구, 내 새끼!”

    근육질 풍채는 여전하시다.

    꽉 끌어안으시는 힘이 버거울 정도 라 숨이 막혔다.

    “잘 지내셨죠?”

    “못 지냈다! 연락 좀 자주 하면 어 디 덧나느냐!”

    호탕하게 웃으시는 걸 보니 건강하 신 듯해 안심했다.

    “그래, 얼마나 머물다 가느냐?”

    “일주일 정도 있으려 해요.”

    “에잉. 한 일 년쯤 푹 쉬다 가지. 도빈아, 원래 회사라는 건 말이다 주인이 없어도 굴러가게 해야 하는

    법이야.”

    “그럼 돌아갈 때 할아버지도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그럴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가족이 함께 있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으니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은데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래, 피곤할 테니 일단 쉬어라. 저녁 때 보자꾸나.”

    인사를 나누고 어렸을 적 쓰던 방을 찾았다.

    예전 그대로 먼지 하나 없이 관리 되어 있는 모습에 할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청소하시는 분이 하셨겠지만.’

    아무튼 그리운 곳이다.

    똑똑“

    “도련님, 접니다.”

    “네. 들어오세요.”

    김재식 실장이다.

    미리 부탁했던 일을 알려주러 온 모양.

    한국으로 오기 전 재학 당시 한국 초등학교 교장 박말자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청했는데 벌써 찾은 듯 하다.

    역시 유능하다.

    “고생하셨어요. 지금은 어디 계신 대요?”

    “안타깝게 재작년에 타계하셨다고 합니다.”

    “아.”

    하긴, 시간이 꽤 흘렀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그 당시에도 꽤 고령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무리는 아니다.

    속으로 애도했다.

    “고생하셨어요. 어쩔 수 없네요.”

    “별말씀을. 73세에 큰 병환 없이 가셨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고령이라는 기준이 달라 져서 그리 많은 나이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큰 병이 없는데도 눈을 감기 이상한 나이도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나이를 헤아렸다.

    “할아버지가 올해 아흔이셨나요?”

    “여든아홉이십니다.”

    할아버지는 조금 특이한 경우.

    10년 전에도 10년은 더 살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한 지금이라 해도 89세라면 고령 중의 고령이다. 내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합한 것 보다 많을 만큼.

    방금 보았던 그 건강한 모습이 도리어 신기할 정도다.

    조금 걱정되는데 그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김재식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실 만하죠. 그래도 꾸준히 관리하신 덕에 정정하십니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머님이 태어난 뒤로 회장님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버릇처럼 아 빠가 아니라 할아버지로 생각하면 얼마나 슬프겠냐고 하셨죠. 정말 꾸 준히 관리해 오셨습니다.”

    다른 형제 없는 어머니.

    게다가 늦둥이셨다고 하니 할아버 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셨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두 분 이야기를 하 시면서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자주 연락해 주세요. 회장님은 항상 도련님들 이야기만 하십니다.”

    “그럴게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김재식 실장이 방을 나섰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어.’

    할아버지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다.

    나이를 굳이 묻지 않아 잘은 몰라 도 아마 푸르트벵글러가 한국 나이 로는 벌써 여든일 것이다.

    작년에 크게 앓았던 사카모토도 비 슷한 나이니 세월이 야속하다.

    처음 만났을 땐 팔팔하던 히무라가 벌써 쉰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도 보내줘야겠다.

    하려던 일이 없어지니 요 며칠은 정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제주도에 있는 별장에 머물렀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음악과 산해진미를 즐기고, 산책도 하며 풍욕을 즐기다 보니 그간 쌓였던 피로가 씻기는 듯 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제법 추울 거라 생각했는데 쌀쌀한 뿐, 도리어 기분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다만 할아버지가 새벽잠이 없는 것 이 걱정되었다.

    “하하! 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일 이야. 걱정 말거라. 그보다 도빈아, 가지고 싶은 건 없느냐?”

    “갑자기요?”

    “생일이지 않았느냐.”

    “그런 거 안 챙겨도 돼요.”

    “껄껄. 스무 살이 되더니 어른스러 워졌구나. 할애비한테는 괜찮으니 말해 봐.”

    베를린의 저택, 베를린 필하모닉, 푸르트벵글러호, WH해운을 주셨으면서도 더 주고 싶으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구입하진 않았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도 사주시려고 했다.

    “이번엔 제가 해드릴게요.”

    “음?”

    “어서요.”

    할아버지가 눈을 끔뻑끔뻑하시더니 호탕하게 웃으셨다.

    “기특하구나. 기특해. 하지만 할아 버지는 괜찮다.”

    “후회하지 말고요.”

    “흐음. 그렇다면 받고 싶은 게 있긴 한데 말이다.”

    배영빈의 〈THE DOBEAN〉으로 얻은 로열티가 800억 정도였으니 여유롭다.

    뭘 바라시는 어지간하면 사드릴 수 있을 거다.

    “김 실장.”

    “네, 회장님.”

    “가서 종이랑 색연필 좀 가져오게.”

    김재식 실장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 만 고개를 숙였다.

    “뭐 하시게요?”

    “그런 게 있다. 껄껄껄.”

    잠시 후.

    할아버지께서 흰 종이와 색연필을 건네주셨다.

    “자, 불러줄 테니 고대로 쓰면 된다. 알겠지?”

    “뭔데 그러세요?”

    “아, 어서.”

    순순히 색연필을 들자 고민도 없이 곧장 입을 여셨다.

    “안마권. 나 배도빈은 할아버지가 바랄 때 30분간 어깨를 주물러 드 린다.”

    질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어서!”

    “진심이세요?”

    “다른 부모들은 다 받는다더라! 진 희 고 녀석도 너도 도진이도 도대체 가 귀여움이 없잖느냐! 철만 일찍 들어가지고! 가끔 어, 재롱이라도 부려주면 얼마나 좋으냐!”

    아무래도 진심이신 듯하다.

    안 그래도 목청 좋으신 분이 성을 내며 소리치니 귀가 아플 정도다.

    “아, 어서!”

    한숨을 쉬며 바라는 대로 해드렸다.

    “여기요.”

    “이 녀석이, 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짜게 굴어? 열 장 은 줘야지!”

    내 나이 75세에 이런 걸 쓰게 될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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