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402화 (402/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402화

88. 선생님과 수다꾼(3)

‘너만 모름’의 배도빈 특집은 담당 PD의 우려와 달리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까지 범접할 수 없는 거인으로 만 여겨졌던 배도빈과 애매하게 고 귀한 혈통의 찰스 브라움 그리고 깐 깐하고 마초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마누엘 노이어의 모습은 팬들에게 색다르게 다가갔다.

ㄴ 내 왕자님은 저렇지 않아 -ㅠㅠ

ㄴ 찰스도 사람이야. 치질 좀 걸릴 수 있지.

ㄴ 배도빈 진짴그 킈그그 마누엘 노이어 가발 벗겨졌을 때 슬쩍 등 쓸 어주는 거 봤어?

ㄴ 이상한 데서 스윗함ㅋㅋㅋ

ㄴ 하……. 방송국 새끼들 진짜 답도 없다. 배도빈은 물론이고 찰스 브라움이랑 마누엘 노이어도 얼마나 대단한데 저딴 식으로 표현해 놓냐.

작가들 다 짤라야 함.

ㄴ 싫었으면 저 세 사람이 저렇게 했겠어?

ㄴ 또또 과몰입하네. 다 방송이고 대본이잖아. 실제로 배도빈이랑 찰스 브라움이랑 마누엘 노이어가 저 러고 놀겠어?

ㄴ 아니, 음악만 해도 충분한데 저렇게 광대짓 할 필요가 있나?

ㄴ 베를린 필하모닉 자체가 팬에 올 인하는 악단인데 뭐. 팬 서비스 난 좋구만.

ㄴ 난 저런 게 더 멋있더라.

여러 반응이 있었지만 팬들은 카리 스마의 배도빈과 고결함의 상징과도 같은 찰스 브라움, 베를린의 상남자 마누엘 노이어가 모두 팬을 위해 일 부러 망가졌다고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들의 본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베를린 필하모닉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방송은 되도록 나가지 말자.”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실세 카밀라 앤 더슨과 이자벨 멀핀은 방송 출연 제 안은 신중히 결정하기로 결탁하였다.

***

한이슬 평론가는 영국으로 떠나기 전 차채은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세계 클래식 음악의 중심, 베를린으로 유학 와 꾸준히 좋은 글을 쓰는 차채은이 귀 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글에는 다소 어린 티가 남아 있지 만 어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이 당차고 유망한 후배에 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문제는 차채은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채은아, 나 내일 런던으로 가는데 가기 전에 차 한잔하자.”

- 왜요?

“왜긴. 보고 싶으니까. 어떻게 지냈 는지도 궁금하고.”

-전 안 궁금한데.

“그러지 말구〜”

- 알겠어요.

두 시간 뒤.

차채은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한이슬은 파랑색 저지에 두툼한 패딩을 대충 걸치고 나온 차채은을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맞이했고.

차채은은 세미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한이슬을 떨떠름하게 여기며 마주 앉았다.

“왜 불렀어요?”

“그냥. 글 이야기로 수다 떨고 싶어서?”

한이슬의 말에 차채은은 조금 놀랐다. 답답한 마음에 음악과 글에 대 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그녀는 리드가 주최한 파티장을 찾았고 실

망했다.

업계 사람들과 만나면 갈증이 조금 해소될 줄 알았지만 친분을 나눌 뿐,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 리는 아니었다.

또 편집장만 인사를 건넸을 뿐, 어린 그녀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다.

“……저 말고도 많이 이야기하시던데.”

“응. 업무적으로는. 하지만 다들 체면 차리느라 솔직하진 못해. 나도 그렇고. 아, 뭐 마실래?”

차채은이 메뉴를 보다가 답했다.

“에스프레소……

“그럼 난 바닐라 파르페. 여기 이 거 맛있더라.”

잠시 후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어린애로 보이기 싫어서 주문한 에 스프레소를 맛본 차채은이 얼굴을 심하게 구겼다.

처음 느껴보는 쓴맛에 놀란 차채은 이 잔을 내려놓자 한이슬이 슬쩍 물었다.

“그거 좀 빌려도 돼?”

“가져가요.”

한이슬이 웃으며 바닐라 파르페에 에스프레소를 끼얹었다.

“이렇게 먹으면 진짜 맛있거든. 자.”

경계하던 차채은이 수저를 들었다.

에스프레소에 젖은 바닐라 아이스 크림은 과자와 함께 어우러져 혀를 녹이는 듯했다.

“맛있어.”

“그치?”

한이슬이 한 번 더 파르페를 떠먹는 차채은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엔 무슨 글 써?”

“그냥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어요.”

“난 레몽 도네크 이야기 쓰고 있어. 그 사람,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로 정말 칼을 갈았나 봐. 토스카니 니 그 꼬장꼬장한 인간이 후계자로 낙점했을 정도니까.”

차채은은 그러든 말든 파르페에 정 신이 팔려 있었다.

“평단에서도 최근에 그가 지휘했던 모차르트 협주곡을 주목하고 있어. 빈 필하모닉 이상의 완벽한 시대연 주였다고.”

“ 네.”

“하지만 팬들은 그들이 얼마나 대단 한지 잘 모르니까. 너무 안타깝지.”

훌륭한 음악이 대중에 미처 다 전 달되지 못하는 것은 차채은이 생각 하기에도 아쉬운 일이었다.

차라리 런던 필하모닉이라면 긴 역 사와 훌륭한 연주로 인정받는 편이었다.

특히나 토스카니니가 총감독으로 부임한 뒤로는 베를린, 빈, 암스테르 담, 런던 심포니와 함께 유럽 빅5에 손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베를린과 암스 테르담이 너무나 앞서간 탓에 실질 적인 매출 차이는 크게 벌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겠네요.”

“응. 그래서 이번 일을 시작으로 조명받지 못하는 악단이나 음악가들을 소개할 생각이야.”

차채은은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잡지와 대등한 입장에서 스스 로 기획하여 어떤 일을 하려는 한이 슬을 부러워하고, 그녀를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스러운 점도 성공한 커리어우 먼이라는 점도 모두 그러했다.

“좋은 일인 거 같아요.”

차채은이 솔직하게 반응하자 한이 슬이 테이블에 기댄 채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우리 일이니까. 그렇지?”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이야기 좀 들려줘.”

“뭘요?”

“음〜 나 싫어하는 이유?”

차채은이 눈을 크게 뜨자 한이슬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티 내는데 모를 거라 생각 했어? 난 너 좋은데. 당돌한 것도 어린데도 생각 깊은 것도 또 글에 진지한 것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래.”

바닐라 파르페와 글에 대한 생각이 같음을 확인한 덕에 차채은이 가지고 있던 마음의 담도 조금 무너져 있었다.

“오케스트라 대전 때 지훈 오빠가 못할 거라 해서요.”

“내가? 내가 그랬어?”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이슬이 곰곰이 당시 상황을 떠올리더니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그랬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최지훈과 배도빈이 잘했다는 생 각밖에 안 들어. 그 엄청난 무대에 서 스무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런 일을 해낼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그래도 연주도 안 듣고 먼저 생각 하는 건 안 좋은 거 같아요.”

“그것도 그렇네. 나도 색안경이 있나 봐. 주의해야겠는데?”

차채은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한이슬이 정말 어른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이슬이 눈을 깜빡이며 관심을 보였다. 귀여운 후배가 마음을 열어주 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차채은이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한가하네.’

한동안 여기저기 상 받으러 돌아다니고 방송에도 출연하느라 바빴는 데, 그것마저 처리하고 나니 확실히 전과 달리 여유가 생겼다.

정기 연주회 정도만 신경 쓰면 됐는데 그마저도 케르바 슈타인이 지 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한결 수 월해졌다.

크루즈는 여름에 개시될 예정이고 그 준비는 착실히 해나가고 있다.

하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데 그간 무리했던 것의 반동인지 자꾸만 졸고 만다.

오늘도 낮잠을 자고 말았는데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더니 나윤희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최근 계속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따라 유독 더 몸이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어요?”

걱정스레 묻자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웃는다.

“아니.”

“ 있는데.”

다시 한번 물으니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불면증인가 봐. 잠을 잘 못 자서. 오늘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평소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시는 사람도 아니라 더 걱정되어 마주보 고 앉았다.

조금씩 마르고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확실히 작년보다 여위었다.

‘일이 너무 많나.’

나윤희는 악장으로서의 자질을 갖 추기 위해 나와 발그레이에게 따로 강습을 받기도 하고, 밴드와 A, B, C팀을 오가던, 악단 내에서 가장 많은 일을 소화하고 있었다.

걱정되어 밴드와 B팀 업무에서 제 외하긴 했지만 아직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약한 소리는 절대 안 하는 사람이 니 더 걱정된다.

“로테이션을 좀 바꿀래요?”

“어?”

“당분간 쉬는 것도 괜찮아요. 이제 손이 부족하진 않으니까.”

“일은 즐거운데.”

“네.”

나윤희가 손을 꼼지락대며 우물쭈물했다. 한숨을 내쉬고 입술을 꼬물 대는 걸 기다려 주니 결국 입을 열었다.

“……새로 들어온 단원들 때문에.”

“네?”

어떤 배워먹지 못한 개자식이 소중한 악장을 속 썩이게 하는지 물어보 려던 차 나윤희가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다들 너무 잘 따라줘서 부담스러워.”

좋은 일 아닌가 싶어서 눈을 깜빡이고만 있는데 진달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으하우아우움. 좋은 아침.”

오후 3시다.

물을 따라 마신 녀석이 나윤희 옆에 앉고는 그녀와 같이 테이블에 너 부러졌다.

“다들 언니 멋있다고 하긴 하더라.”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

“그게 왜 부담스러워요?”

"쯔쯔쯔 ”

진달래가 혀를 찼다.

“이 언니 악장 되고 나서 단원들에 게 안 좋은 영향 줄까 봐 약까지 먹으면서 토도 안 하잖아. 에메트롤이라 했나?”

몰랐다.

“새로 들어온 단원들은 대부분 불 새 때 모습만 기억하고 있고 매일 악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이건 어때요? 저 이게 힘들어요. 하는데 윤 희 언니 입장에선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그치?”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불면증의 원인이 그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악장 취임 후 본래 내면에 가지고 있었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악단에 익숙해지면서 뿌리 깊은 나무처럼 견고한 심성을 볼 수 있어 내심 기뻐했거늘, 이런 고충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단원들이 좋아하는 걸 어쩔 순 없네요.”

“응. 그렇게 의지해 주니까 나도 기뻐. 그냥 내가 너무 소심해서……. 제대로 알려주고 있는 건가 하고.”

그간 바쁜 와중에도 나와 니아 발그레이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이유가 학구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단원들에게도 정확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정말 이런 사람을 악장으로 두어 다행이다.

“너무 걱정 마. 익숙해지겠지. 흐.”

“맞아. 다들 좋아하니까 언니도 너무 부담 가지지 마.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겠어?”

"음..."

나도 딱히 근본적인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응원하면서 그녀가 조금 이라도 쉽게 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잠이라.’

수면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음악이 있을까 고민하며 방으로 올라왔다.

자장가라든지 아니면 빗소리 같은 것이 수면에 도움이 되긴 할 텐데 막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문득 한국 초등학교 교장 선생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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