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98화 (39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98화

    87. 세계 정복(1)

    가우왕과 배도빈의 광역 도발에 피아노계가 발칵 뒤집혔다.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배도빈이 가우왕 이외에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호언장담한 초절기교, ‘가우왕’이 공개되자 세계 각지의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달려들었다.

    귀로 들었을 때와 악보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피아니스트를 비롯한 업계 종사자 들은 배도빈과 가우왕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만든 놈이나 친 놈이나.’

    ‘이게 악보라고? 손가락 고문 매뉴얼 아니고?’

    모든 이가 ‘가우왕’이 현존하는 최고 난이도의 곡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좋은 방송 소재로 여겨 현역 또는 은퇴한 피아니스트가 ‘가우왕’에 도전하는 방송을 기획했는데, 비교적 젊은 나 이에 은퇴했던 또 한 명의 레전드, 미카엘 블레하츠도 참여했다.

    그러나 일주일간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습한 그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하하. 이거 안 되겠는데요.”

    “현역 때라면 가능하시겠죠?”

    “글쎄요. 기교만이 피아노의 모든 건 아니지만 확실히 도빈 군의 말대로 이 곡을 연주할 사람은 가우왕뿐 인 것 같습니다.”

    해당 방송을 시작으로 ‘가우왕’에 도전하는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악보 공개 후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완벽히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올라오는 동영상도 화음 처리나 시작음 또는 중간음을 제외하 여 난이도를 낮춘 편곡된 버전뿐이었다.

    그럴수록 가우왕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아〜 어쩔 수 없구만. 계속 남아 있어줘야겠네.”

    배도빈이 그런 가우왕을 마땅치 않게 보다가 엉덩이를 걷어찼다.

    “억!”

    나뒹그러진 가우왕이 벌떡 일어나 배도빈의 볼을 잡았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또 내 엉덩이를 걷어차!”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귀찮게 해요?”

    배도빈도 지지 않고 가우왕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탈모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이 약점이 된 가우왕은 순순히 배도빈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 너도 피아니스트 필요하잖아.”

    “다른 사람 필요 없어요.”

    “네 입으로 말했잖아. 베를린 필하모닉의 피아니스트는 최고여야 한다고. 게다가 내 후임이 시시껄렁한 인간인 건 사양이지.”

    가만 생각해 보니 가우왕의 말이 본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배도빈은 엉덩이를 한 번 더 걷어차 버리는 것으로 가우왕을 용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최지훈은 즐거운 듯 웃을 뿐이었다.

    배도빈은 그런 최지훈에게도 짜증을 느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알아서 들일 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차지한다고 선언해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넌 뭐가 좋다고 자꾸 실실대?”

    “재밌잖아. 니나 누나도 참가할 거래. 성신이 형도 엄청 화난 것 같아.”

    배도빈은 최지훈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제는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배도빈은 당사자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1년 뒤로 예정되어 버린 베를린 필하모닉 퍼 스트 피아니스트 공개 오디션을 받 아들이기로 했다.

    “손은 어떤데.”

    “많이 좋아졌어. 젊어서 금방 낫는 거 같대.”

    의욕이 넘치는 모습에 배도빈이 한 숨을 내쉬었다.

    한편.

    세상 모든 피아니스트를 자기 아래로 여긴 가우왕의 광역 도발에 넘어 간 여러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유독 독기를 품은 사람이 있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기교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 라 자신하던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타협하지 않았다.

    가우왕이 연주했던 원곡 그대로를 연주하기 위해 악보를 탐하고 또 탐했다.

    그러기를 벌써 3주째.

    “ 리자?”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않고 연습실 에서 틀어박힌 엘리자베타를 걱정한 매니저가 그녀를 찾았다.

    끊이지 않았던 피아노 소리가 들리 지 않았다.

    매니저는 엘리자베타가 지쳐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자나? 너무 어두운데.’

    형광등을 켜자 피아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리자베타를 볼 수 있었다.

    “ 리자?”

    매니저가 다가가도 엘리자베타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흐 느끼기 시작했다.

    “어? 울어? 잠깐만.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끄읍. 끅.”

    놀란 매니저가 달래자 엘리자베타 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 주변 이 퉁퉁 부어 있었다.

    “끅. 끄윽.”

    “뭐야. 뭔데. 응?”

    “……워.”

    “워?”

    “너무 어려워. 끅. 끄윽. 못 치겠어. 끄윽. 거지 같은 놈들. 끅. 씨잉.”

    오죽 억울했으면 울기까지 할까.

    매니저는 말문이 막혔다.

    엘리자베타는 가우왕의 인터뷰를 보고선 그런 도발을 듣고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고 여겼다.

    매니저도 오기 하나로 여러 메이저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한 엘리자베타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응원했지만.

    엘리자베타의 자존심은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앞에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말았다.

    “가우왕도 7주나 연습했대잖아. 분 명 칠 수 있을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끕. 아니, 무 슨 짓을 하면 동시에 여러 멜로디를 치는 건데?”

    “나한테 물어도……. 그런데 너 설 마 베를린 필하모닉 오디션 볼 생각 이야?”

    “당연하지.”

    “어?”

    “최지훈이, 최지훈이 자긴 이길 수 있을 거라 했단 말이야. 퀸 엘리자 베스 콩쿠르에서 못했던 승부를 해야지!”

    매니저는 다시 기운을 차린 엘리자 베타에게 굳이 ‘최는 너랑 승부하는 걸 바라는 것 같지 않은데’라고 말하지 않았다.

    엘리자베타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이어나갔다.

    당연히 실수가 계속되었고.

    “아아아아악!”

    분에 겨운 엘리자베타는 다시 터지 고 말았다.

    한편.

    국제 메이저 콩쿠르에서 꾸준히 상 위권을 수상했던 재원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좌절과 절망을 반복하 고 있을 때.

    북미 최고의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천재 니나 케베리히도 상황은 마찬 가지였다.

    배도빈이 치밀하게 만들어 놓은 악보는 박자를 조금이라도 틀렸다간 손가락이 꼬일 수밖에 없었는데, 본 인만의 리듬감이 강한 니나 케베리 히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외출을 다녀온 샛별 엔터테인먼트 박선영 실장은 피아노 앞에서 고개를 살짝 든 채,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는 니나 케베리히를 볼 수 있었다.

    “뭐해?”

    “아아아아아아.”

    좀처럼 기죽는 법이 없었던 니나 케베리히는 괴상한 소리를 낼 뿐,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멜로디가 변칙 적으로 움직이는데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어 그녀의 머리는 망가지기 직전이었다.

    악보를 확인한 박선영이 니나를 흔 들었다.

    “너 베를린 필하모닉 들어가게?”

    “어?”

    “안 돼! 네가 나가면 우리 뭐 먹고 살라고! 도빈이 없는 거 복구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박선영이 펄쩍 뛰었다.

    니나 케베리히는 그제야 웃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런 말 듣고 가만있을 수 없잖아.”

    배도빈을 통해 음악가란 족속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알고 있던 박 선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화제도 되겠지. 그래서? 칠 수 있겠어?”

    “프흫.”

    “ 응?”

    “흫흐흐히 힣힣히.”

    박선영은 샛별 엔터테인먼트 수입의 42%를 책임지고 있는 간판 스 타가 정신줄을 놓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 **

    피아노계가 들썩이고 있을 때.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는 배도빈을 향한 여러 러브콜을 거르느라 업무가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다.

    하나를 처리할 만하면 여기저기서 문의가 들어와 정상 근무가 불가능했다.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언 론 심지어는 독일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에서까지 배도빈을 바랐다.

    정말 중요한 일은 차마 거절하진 못하고 딜레이하고 있었는데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게 된 카밀라 앤더슨 국장이 졸도할 뻔한 일이 벌어졌는데.

    2032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가 대 한민국 서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그 공식 주제가에 대한 의뢰가 들어온 것이었다.

    “도빈아!”

    카밀라 앤더슨과 이자벨 멀핀 그리 고 멀핀 부장의 비서 죠엘 웨인이 배도빈을 찾았다.

    악보 더미 사이로 배도빈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치 치치치치 치침착해.”

    카밀라 앤더슨이 심하게 말을 더듬었고 이자벨 멀핀과 죠엘 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기행에 배도빈은 일단 경계했다.

    “뭐예요?”

    “오, 올림픽 공식 주제가 의뢰가 들어왔어.”

    “그래요?”

    배도빈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곤 다시 악보 뒤로 숨자 세 직원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것도 안 하게?”

    “이건 하셔야 합니다!”

    “대단한 일이잖아요, 보스!”

    신뢰하는 직원 세 사람의 말에 배도빈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랜드 심 포니의 3악장 악보를 놓고 일어났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카밀라 앤더슨이 물꼬를 텄다.

    “엄청난 영광이라고. 무조건. 무조건 해야지!”

    “애초에 보스께선 이런 일에 너무 무관심하십니다. 지금까지 거절만 해왔는데 이제는 그러기도 민망할 지경입니다.”

    “보스와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해서 라도 꼭 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우왕이랑 프란츠 덕분에 밴드는 완전히 독립했잖아.”

    “저번 신규 단원 모집으로 케르바 슈타인 감독이랑 B팀도 이제 정상 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피델리오와 크루즈처럼 큰 프로젝 트도 마무리되었어요.”

    한 사람만 감당하면 되었던 전과 달리 세 명이 달려들자 배도빈도 어 쩔 도리가 없었다.

    국장, 부장, 부장비서의 말대로 2025년에 들어서 배도빈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는데, 작년 한 해 대규 모 개혁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덕분이었다.

    〈피델리오〉의 전무후무한 흥행 덕으로 재정은 풍족해졌고 두 차례에 걸친 인원 확충으로 개인에게 부여 되었던 짐도 줄어들었다.

    덕분에 쉴 틈 없이 바빴던 그간, 틈틈이 준비했던 ‘그랜드 심포니’의 2악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거 말고도 처리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 그들이 언제까지 기다려줄 거라 생각하니? 또 그렇게 관계 서먹해지면 쉽게 풀 일도 어려워진 다고.”

    “그건 무슨 말이에요?”

    “얘 봐?”

    카밀라 앤더슨은 배도빈의 반응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자벨 멀핀이 한숨을 내쉬곤 카밀 라를 대신해 설명했다.

    “독일 정부에서 보스께 공로훈장을 수여한다고 하였습니다. 작년 일인 데 일정 문제로 계속 연기되다 이월 되게 되었죠.”

    “그런 거 안 받아요.”

    “받으라고!”

    카밀라 앤더슨이 답답한 마음에 배도빈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뿐인 줄 아니? 유네스코에서 모 차르트 메달 수여하고 싶다고 한 지 가 벌써 1년 전이야!”

    “그게 뭔데요?”

    “모차르트 서거 200주년을 기념으로 제정된 상입니다. 음악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부여되고, 세프께서는 빈 모차르트 협회로부터 받으신 적 있습니다.”

    “베트호펜 메달은요?”

    없었다.

    “안 받을래요.”

    배도빈의 고집에 카밀라와 멀핀이 얼굴을 가렸다.

    굳이 권위 있는 협회와 심지어 정 부의 선의를 거절하면서까지 본인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명예를 드높일 기회를 걷어차는 배도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죠엘 웨인이 입을 열었다.

    “같은 모차르트 메달이라도 유네스코 메달은 세프가 받으신 빈 모차르트 협회 메달보다 권위 있어요.”

    “그건 받죠.”

    배도빈이 즉답했다.

    카밀라와 멀핀은 어이가 없어 이제 막 정규직으로 전환된 신입 죠엘 웨인을 보았고 그녀는 밝게 웃을 뿐이었다.

    이자벨 멀핀이 기지를 발휘해 흐름을 탔다.

    “올해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에도 내정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받으셔야 합니다.”

    “여유가 생기긴 해도 그런 일에 낼 시간은 없다고 했잖아요.”

    “세프께서도 못 받은 상입니다.”

    멀핀에 말에 배도빈이 관심을 보였다.

    “푸르트벵글러도 관심 없어서 안 받은 거 아니에요?”

    카밀라 앤더슨이 멀핀이 토스한 공에 스파이크를 넣었다.

    “아니이? 마리 얀스 경이 받았을 때 얼마나 배 아파했는데.”

    배도빈의 입이 씰룩였다.

    “좋아요. 그것도 받죠.”

    세 직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말인데.”

    “또 있어요?”

    배도빈이 다시 한번 경계했지만 세 직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아무 리 사랑받는다 해도 여러 협회와 정 부를 상대로 일부러 척을 질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더욱이 본인과 악단의 명예를 위해 서도 미뤄왔던 일을 처리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이참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치우자. 어차피 봄까지는 바쁜 일 없으니까.”

    “보스와 악단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너무 멋있어요, 보스.”

    배도빈은 세 직원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배도빈을 구슬리는 방 법을 깨달은 세 사람의 유혹에 조금 씩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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