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95화 (395/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95화

86. 마왕과 사자와 용사(2)

“하하하하하하하!”

가우왕이 의기양양하게 웃어대는 와중에도 그가 ‘3개의 손을 위한 소 나타’를 연주해냈단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왜 가만있어?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냐! 하하하하하하!”

“……네.”

“ 뭐?”

“대단하다고요.”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이 곡을 혼자 연주할 수 있을 거 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애초에 기교에 특화된 가우왕의 매 력을 끌어내기 위해 함께 연주할 초 절기교를 만들 생각이었다.

가우왕도, 그의 팬들도 화려한 곡을 좋아하니까.

두 사람이 나눠 연주해도 상당한 난이도.

단언하건대 어지간한 피아니스트 두 사람이라도 버거워할 것이다.

분명 그런 곡인데 혼자 해낼 줄이야. 자존심이 육체를 지배했다는 말 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거 진짜 또라이 아니야?’

대체 최근 몇 주간 무슨 짓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 뭐가?”

“혼자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아니라고요. 몇 번이나 말해요.”

가우왕이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번 다그치니 만족스럽게 웃고는 고백했다.

“진짜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 든 ”

가우왕은 자신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절대 못 놓지.”

당시 이야기를 풀어내기를 꺼려하여 캐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영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을 거라 생각 했던 것 같다.

그 간절함과 집착으로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붙잡았다는 말인데.

그가 얼마나 필사적이었을지는 굳이 함께 있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불가능한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다시 해봐요.”

“그, 그렇게 좋았냐.”

“ 네.”

“너 평소랑 달리 좀 순순하다?”

그렇게 잘난 척했으면서 막상 칭찬 해 주니 쑥스러운 척한다.

“시끄럽고 빨리 다시 해봐요.”

“너 이게 얼마나 체력 소모가 심한 줄 알아? 잠깐 쉬었다가.”

가우왕은 고모가 가져다준 과일과 차를 마시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곤 피아노 앞에 앉아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해 보았다.

도중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하지만 완주는 무리다.

내가 아니라 현재로서는 가우왕 이 외에 이 곡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솔로곡으로 할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굳이 나눠 연주할 필요 없으니 기교의 한계를 넘어선 피아니스트만의 곡으로 남겨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

샤워를 하고 나온 가우왕이 타월을 두른 채 침대 위에 누웠다.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진짜 정신이 나간 모양.

미친놈처럼 자꾸만 실실댄다.

어지간히 기쁜 듯하다.

“꼬맹이.”

“왜요.”

“멋진 곡이었어.”

그러고는 곧장 코를 골기 시작했는 데, 아마 직전까지 연습하느라 피곤 한 모양.

“수고했어요.”

한 번 더 듣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이 멍청한 작자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방을 나섰다.

* * *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라.’

빌어먹을 꼬맹이가 만든 곡은 빌어 먹게 선명하다.

격렬하다.

완벽하다.

초원을 누비며 사냥하는 사자처럼 흉폭하고 저돌적인 이 곡을 연주하 다 보면 그 모습이 그려져 괜스레 웃게 된다.

이렇게 간절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꼬맹이에게 지고 난 이후로는 처음 인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벽.

아득히 높고 가늠할 수조차 없이 두터운 벽을 만나 기뻤다.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면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기쁘지 않을 리 없다.

손가락과 손목, 팔꿈치를 철저히 독립시켜 움직이고 그것을 다시 하 나의 움직임으로 통합하는 과정.

결국 다시 기초부터 시작해야만 했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난이도.

숨이 턱 막히는 듯했지만.

‘가우왕’을 연주하면서 비로소 정말 자유를 얻은 듯했다.

쉽지 않았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정말 내가 칠 수 있을까.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끝내 해 내고야 말았다.

결국 녀석이 또 한 번 나를 한 단 계 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가우왕이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하며 만들었을 것 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포기할 수 없었다.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저번 일로 베를린 필하모닉에 소속되었다는 것.

배도빈과 함께 음악을 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바랐던 일이지만 굳이 그러지 않은 이유도 명확하다.

어느 단체에 속하게 되면 알게 모 르게 규정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규칙적인 생활이라는 건 단련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익숙해지는 순간 안주해 버릴 수도 있다.

무리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을 리 없기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배도빈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러한 불편함을 모두 감수하더라도 매력적인 일이다.

‘아쉽지만.’

아쉽지만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녀석이 이미 자신의 피아노를 선택해 두었기 때문.

‘ 최지훈.’

듣자 하니 본래 밴드 피아니스트 자리는 최지훈을 위해 준비되었던 것 같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 고 곧장 합류하기로 했던 모양인데, 어린 녀석이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 나이에 손가락이 망가질 정도로 혹사시켰으니, 최지훈이 배도빈을 쫓 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꼬맹이가 그것을 얼마나 기다렸을 지 뻔하다.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에 피아니스트 자리가 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어중이 떠중이들이 달려들었다.

내부에서도 피아니스트를 새로 뽑자고 했지만.

배도빈은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밴드 활동에서 피아노를 제외시키거나 필요할 땐 본인이 직접 연주해 온 것만으로도 두 꼬맹이의 유대를 짐작할 수 있다.

최지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불청객.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배도빈과 최지훈 사이에 끼어든 모양새가 되었다.

다른 어떤 이유도 빌어먹을 꼬맹이 와 함께하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그 기특한 꼬맹이의 자리를 빼앗을 순 없다.

‘한 번이면 족하지.’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

배도빈과 같은 소속으로 최고의 연주를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또 내 길을 걸어갈 테고 꼬맹이도 그래야만 한다.

그러다 또 마주치면 어울리는 것으로도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우왕이 야수와도 같은 곡을 연주하면 온전히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또다시 세계를 여행하리라.

2025년 1월 24일 금요일.

여론을 의식하듯 길고 풍성한 머리를 유독 강조하는 가우왕의 사진이 베를린시 전역에 내걸렸다.

황제의 복귀 무대는 화려하게 홍보되었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는 평소보다 더욱 큰 관심을 끌었다.

“이거 기부 공연이라지?”

“맞아. 적은 돈이 아닐 텐데 그걸 전부 기부한다니, 배도빈이고 가우왕이고 통 큰 거는 알아줘야지.”

“듣기로는 가우왕이 진행했대. 홍 콩에서의 일을 보답할 수 있는 방법 은 그뿐이라고.”

“그럼 베를린 필하모닉은?”

“가우왕이 부담하겠지.”

기자들의 대화는 정확했다.

가우왕은 개인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자신이 받은 힘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이번 공연은 모두 그의 사비로 진행되었으며, 배도빈은 그가 부담할 금액을 최소화 해주는 정도로 배려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거리에 수천 명의 관객들이 운집해 있고.

전 세계 수천만 명이 모바일, PC 등을 통해 가우왕과 배도빈이 그를 위해 만든 소나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엇! 크리스틴 지메르만이다!”

“최지훈도 있어!”

그때 기자들과 팬들의 이목을 끄는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우왕의 스승이자 현존하는 최고 의 피아니스트, 무결점의 크리스틴 지메르만과 그녀의 두 번째 제자 최지훈.

기자들이 앞다투어 두 사람에게 달 려들었다.

“지메르만 선생님! 가우왕 씨의 신 곡 발표에 대해 들으신 바 있으십니까!”

“크리스틴 폰 지메르만! 첫 번째 제자가 복귀하는데 축하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무작정 달려든 기자들의 ‘저급한 행동’에 불쾌해진 크리스틴 지메르 만의 심기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매번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시네요. 오늘은 관객일 뿐입니다. 유쾌한 기분을 망치지 마세요.”

기자들에게 경고를 한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콘서트홀로 향했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간 그녀에게 벌레 취급을 받은 기자들 은 개의치 않고 최지훈을 향해 마이 크를 돌렸다.

“미스터 최! 회복은 어떠십니까!”

“크리스틴 폰 지메르만을 스승으로 두었다는 것이 사실이었습니까?”

“무엇을 배우고 계신지 자세히 부탁드립니다!”

최지훈이 웃으며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최근에는 조금씩 피아노도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는 기초 부터 다듬고 있어요. 작곡도 배우고 있고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지훈이 인사를 하고 콘서트홀로 향하려던 때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금발의 여성이 외쳤다.

최지훈에 관련해서는 전담하다시피 했던 리스터지의 사라 기자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첫 번째 피아니스트가 첫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그녀는 배도빈과 최지훈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두 사람이 함께 하는 모습을 그렸다.

수많은 팬과 마찬가지였다.

최근 배도빈이 피아니스트를 의도적으로 채용하지 않았고 퀸 엘리자 베스 콩쿠르를 기점으로 그를 위한 곡까지 만들었으니, 배도빈과 최지훈의 팬들의 기대치는 부풀대로 부 풀어 있었다.

그러나 최지훈의 부상과 가우왕을 구출하려는 시도로 망가졌으니.

사라 기자는 최지훈의 속이 말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착한 최지훈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

그러나 헤실헤실대는 표정 아래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는 최지훈이라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거 라 생각했다.

사라 기자와 마주한 최지훈이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웃으며 답했다.

“기대돼요.”

심플한 답변에 사라는 질문을 잇지 못했다.

“어엇! 막심 에바로트다!”

최지훈이 콘서트홀로 향했고 기자 들은 또 다른 거장 막심 에바로트를 향해 분주히 움직였다.

덩그러니 남은 그녀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사라, 의도는 알겠지만 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할 거예요.”

그녀의 파트너가 위로와 조언을 함께했다.

“아니야. 최는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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