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94화 (39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94화

    86. 마왕과 사자와 용사(1)

    가우왕이 몇 주 전의 긴박했던 사건 이후로 쭉 칩거했기에 팬들의 걱 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론도 그러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서 어떻게든 가우왕과 접촉하고자 했지만, 가우왕은 언론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외출 또한 최소화 하여 언론과 팬 들은 가우왕이 현재 어떤 심경인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 직 회복에 힘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상태 가 생각보다 좋지 못할 거라는 추측이 이어졌다.

    칩거 1주째에는 한 파파라치가 병 원에 다니는 가우왕을 포착하면서 논란이 더욱 붉어졌다.

    가우왕의 두피가 적나라하게 드러 났기 때문이었다.

    해당 사진에 충격받은 가우왕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송년 음악회를 전 후로 공식 석상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걱정하는 팬과 동료를 위해서라도 기자회견을 가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지금은 조금.”

    “연습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도빈이 돌아오면 신곡 발표회 가질 거잖아요. 지금부터 홍보해야죠.”

    “그 신곡이 문제인데.”

    카밀라 앤더슨은 항상 당당하고 과 감했던 가우왕을 떠올리곤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혹시 어디 불편해요?”

    카밀라 앤더슨이 걱정스레 물었지 만 가우왕은 차마 곡이 너무 어렵다 고 답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언론에서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배도빈이 가우왕 본인을 위 해 써 준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가우왕’을 만족스럽게 연주하지 못 하는 것이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가우왕의 자존심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전혀.”

    가우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카밀라는 그를 의심스레 살피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어차피 발표회 전에 기자 회견은 가져야 하니까 일정 잡아볼 게요. 도빈이도 돌아오니 같이하는 게 좋겠네요. 그러면 부담이 조금은 덜하겠죠?”

    가우왕이 아직 공식 활동에 부담을 느낀다고 생각한 카밀라는 그가 배도빈과 함께 활동할 수 있게 배려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고 싶은 가우왕에게는 그리 좋은 제안이

    아니었다.

    “굳이 같이할 필요가 있습니까?”

    “너무 그러지 마요. 당신도 이제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이니까 힘들 때는 서로 도와야죠.”

    카밀라 국장의 상냥한 제안과 동시 에 운명의 카운트가 시작되었고.

    가우왕은 그날부터 눈이 충혈된 채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더욱 파고들었다.

    그렇게.

    아시아 투어를 마치고 배도빈이 베

    를린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가우왕은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가우왕’을 완성하지 못했다.

    기자회견 당일.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배도빈과 가우왕이 대기실에 있었다.

    “뭐 하는데 나와 보지도 않았어요?”

    “시끄러워.”

    가우왕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할수록 배도빈은 행복했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됐어요? 가능 하면 내년 첫 공연으로 잡고 싶은데.”

    “ 뭐?”

    배도빈이 능청스럽게 고개를 살짝 틀자 가우왕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1,1월 말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늦어요.”

    가우왕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가 난감해하는 것을 충분히 즐긴 배도빈은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기 전 에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못 하겠죠?”

    “무슨 소리!”

    “이해해요. 못 치는 게 당연하니까. 사실은.”

    “시끄러워! 내가 못 칠 곡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1월 말로 해! 한 번만 더 못 친다 니 하면 가만 안 있어!”

    가우왕의 고집과 발악에 즐거웠던 배도빈도 슬슬 지겨워졌다.

    그래서 사실을 알리려는데 마침 아 르바이트 직원 죠엘 산타가 기자회 견 시작 시간이 되었다고 알렸다.

    “보스, 입장 시간 되었습니다.”

    “네, 고마워요.”

    배도빈은 가우왕과 함께 복도를 지 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못 치는 게 당연하다고요. 말 좀 들어요. 애초에 혼자 연주 ”

    “시끄럽다니까!”

    배도빈은 이 고집불통을 기자회견이 끝나는 즉시 걷어차 줄 거라 마 음먹고 회장에 들어섰다.

    차르르르르륵-

    배도빈과 가우왕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이 손을 바삐 움직였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두 음악가가 자리를 잡았고.

    기자들은 걱정부터 앞섰다.

    3개 대륙 투어를 마친 배도빈도 지쳐 보였지만 가우왕은 그에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했다.

    “뭐야, 나아진 게 없잖아.”

    “더 심해진 거 같은데?”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도 빠졌다더 니 머리는 그대로네?”

    “가발일 수도.”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그들로서는 6주 이상 불가능에 도 전했던 가우왕이 아직 후유증을 앓 고 있는 거라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찾아와 주신 기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2025년 비전과 올해 시행했던 사업 결과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우선, 피델리오입니다.”

    카밀라 앤더슨 국장이 유럽, 북미, 아시아 투어를 진행한〈피델리오〉 의 성적을 공개하였다.

    준비된 스크린에 베를린 필하모닉 의 로고가 떠올랐다.

    실 관객 수 74만 7,508명.

    디지털 스트리밍 유료 관람객 2억 6,894만 명의 티켓 값을 포함한 전 체 수익은 2조 1,810억 원이었다.

    반년 만에 거둔 성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역사상 가장 흥행한 오페라였다.

    “우리 베를린 필하모닉은 오페라 피델리오와 더불어 이번 아시아 투 어에 푸르트벵글러호를 투입, 유의 미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두 프로젝 트는 앞으로도 긍정적인 시너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카밀라 앤더슨의 말에 기자들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체 오퍼가 결 코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웠다는 기 사 제목을 메모했다.

    “또한 분기별로 시행되었던 자선 음악회 편성을 확대, 밴드 공연을 정규 편성에 추가하였습니다.”

    어린이 타악 교실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이 2024년 한 해 에 소화한 일들은 그들이 전통적인 시각에서의 오케스트라를 한참 넘어 섰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카밀라 앤더슨 국장이 발표를 마치 고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마에스트로.

    피델리오가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의 위대함과 단원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 생각 합니다. 함께한 도이체 오퍼는 최고였습니다.”

    배도빈이 짧고 명료하게 답했다.

    “물론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이었던 마에스트로의 공이 가장 컸겠지요?”

    “아뇨.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의 공 적입니다.”

    기자들은 평소와 다른 배도빈의 태 도에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

    “자기자랑 할 거라 생각했는데.”

    “솔직히 해도 되잖아. 역사적인 기록이었다고.”

    “배도빈이 공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다니, 믿을 수 없는데. 본인보다 단원이랑 도이체 오퍼를 더 높이 샀잖아.”

    “입장이라는 게 사람을 만드는 거겠지. 이제 대기업의 주인이고 또 나이도 성인에 가까워졌으니까 아무 래도 주변을 신경 쓰는 거 아니겠어?”

    “제법 왕다운 느낌을 내기 시작한 거라 판단해야겠지.”

    기자들은 나이를 먹기 시작한 배도빈이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 했다고 이해했다.

    화제는 자연스레 지난 달, 홍콩에 서의 일로 전환되었다.

    발언권을 얻은 한 기자가 팔짱을 낀 채 뚱하게 앉아 있던 가우왕을 지목했다.

    “가우왕 씨, 우선 지난 사건에 유 감을 표합니다. 여러 팬이 가우왕 씨가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 해하십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고 그 뒤에는 도와주신 분들을 찾아 다녔고. 지금은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멀쩡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잔뜩 지친 모습이었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뚫고 가우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른 자세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러기를 1분.

    천천히 고개를 든 가우왕에게서 평소의 불량한 말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한 마디 인사.

    가우왕이라는 인간을 모르는 사람이더라 그가 동료 음악가와 팬들에 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음악이 누군가의 수단으로 사용되길 거부하고.

    소중한 피아니스트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 세계가 함께했다.

    당시 홍콩을 찾은 사람 중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같이 가우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음악가도 분명 있었다.

    기본적으로 더러운 성격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드문 가우왕이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명장들이 찾아와 그의 힘이 되어 주었다.

    가우왕은 그들의 마음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기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홍콩 사건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다시금 화합하는 결 과로 매듭지어졌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무대 복귀는 언제쯤 하실까요?”

    다시 자리에 앉은 가우왕이 삐질삐질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를 대신해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다음 달 말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신곡을 발표할 예정이니 기대 해 주세요.”

    “신곡이 라면.”

    기자들의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네. 가우왕 씨는 현재 헌정받은 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 외부 활동을 자제했던 것도 모두 그에 집 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도빈의 발언에 기자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마에스트로께서 직접 작곡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우왕 씨! 준비는 어느 정도로 진행되셨습니까!”

    “어, 어떤 느낌의 곡인지 설명 부 탁드립니다!”

    배도빈의 신곡이 언제쯤 발표될지 도 큰 관심사였는데 그것이 가우왕에게 헌정되었다고 하니 이번에는 또 어떤 대작이 나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회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가우왕의 머릿속도 더욱 복잡해졌다.

    기자회견 이후 사흘 뒤.

    투어의 여독을 풀고는 가우왕을 찾았다.

    카를로텐부르크가 주변이었는데 급 히 구한 것 치고는 제법 그럴 듯한 집이었다.

    본인 말로는 모아두었던 돈의 절반 가까이 투자했다고 하는데, 확실히 대저택이다.

    가족이 베를린으로 이주하고 그들 과 함께 살기 시작한 소소가 문을 열어주었다.

    표정이 험악하다.

    굶거나 당분을 보충하지 못했을 때 보이던 얼굴이다.

    “돌아갈래.”

    “어디로요?”

    “너희 집.”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묻자 동시에 가우왕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아악!”

    소소와 마주보고 눈을 몇 차례 깜빡였다.

    “저 바보랑 같이 못 살겠어.”

    “ 하하.”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질리기도 했고 슬슬 합을 맞춰봐야 할 시기다.

    “이제 안 저럴 거예요.”

    소소가 2층 첫 번째 방이라고 알려주곤 그 길로 집을 나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우왕의 아버지 왕숭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여보! 얘들아! 어여 나와! 어여!”

    순식간에 가우왕의 고모, 또 그들의 가족까지 합세해서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큰 집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도 같이 고개를 숙였는데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응? 이분이 응? 우리 가우 살려 주신 분이잖아. 응?”

    “가만있자. 이거 이럴 게 아니라. 여보, 빨리 시장 가서 돼지 잡아와. 얼른.”

    주문을 받은 왕숭이 얼른 시장으로 가려 해서 간신히 붙잡았다.

    “밥 먹고 왔어요. 가우왕이랑 연습 좀 하려고 온 거예요.”

    “아! 그래요. 그래.”

    “그럼 어째, 과일 좀 드릴까?”

    “그럼 부탁드릴게요. 말씀 편하게 하시고요.”

    왕숭이 고개와 몸을 떨며 온몸으로 부정했다.

    “아이고! 내 어찌 그럴까! 어여 올 라가요. 올라가.”

    격한 환영을 받고 가우왕의 방으로 들어가니 땀 냄새인지 뭔지 모를 고 약한 냄새가 난다.

    ‘이게 무슨 냄새야.’

    그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엎드려 있었다.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데 결국 실패 했으니 저럴 만도 하다.

    “환기 좀 해요.”

    다가갔는데.

    큭큭큭큭큭.

    가우왕이 웃기 시작했다.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더니 일어나 더욱 크게 웃었다.

    눈을 있는 대로 부라린다.

    “핳하하하하하하하!”

    ‘드디어 미쳤구나.’

    몇 주간 골방에 틀어박혀 연습만 했으니 약간 정신이 나간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피아노라면 누구에게도 안 진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벽을 만났으니 오죽할까.

    “고집 그만 부리고 나랑.”

    “시끄러워! 거기 앉아!”

    가우왕이 또 내 말을 가로막았다.

    “큭큭큭큭. 내가 못 친다고 생각했겠지? 어? 이 내가 혼자서는 못 할 거라고? 똑똑히 들어.”

    혼자서는 절대 연주할 수 없을 텐 데 또 무슨 고집을 부리려는지 지켜 보자는 마음에 앉았더니.

    가우왕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아홉 개의 손가락으로 사자의 포효를 표현했다.

    동시에 도약하는 사자.

    절벽을 뛰어내려온 백수의 왕이 초 원을 뛰기 시작한다.

    두 개의 아르페지오.

    상승하는 왼손은 사자를, 하강하는 오른손은 사냥감을 묘사하며 두 손 이 만났다.

    7분.

    연주를 마친 가우왕은 땀을 뻘뻘 흘렸다. 숨은 가쁘고 광기에 찬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어때!”

    내가 지금까지 가우왕이란 인간을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떠냐고!”

    진짜 미친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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