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93화
85. 긍지(5)
배도빈과 가우왕이 탑승한 리무진은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가우왕이 투덜거리자 어이가 없어진 배도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차서 말을 말자는 생각이었는데 가우왕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꼬맹이 주제에. 네 부모님이 얼마 나 걱정하시겠어? 너 말도 없이 온 거지? 어?”
“닥쳐요.”
“투어는 어쨌어? 제대로 하긴 했어? 네가 없으면 지휘는 누가 해?”
배도빈이 가우왕을 노려봤다.
몸만 성했다면 당장 걷어차 버릴 셈이었지만 그가 무척 여위어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두 사람은 애써 시선을 피해 창문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가우왕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
그는 더러운 연주를 할 바에야 차라리 영영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각오를 하기까지 고민이 없을 리 없었다.
평생을 갈고닦고 아름다움을 탐하여 보낸 세월과 노력들.
이제 곧 원하는 경지가 눈에 아른 거리는 상황에서 차마 자신의 음악이 더러운 일에 이용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미를 향한 그의 갈구가 자꾸만 망설이게 했다. 그럴수록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영영 피아노를 못 치게 될 수도 있다고.
식음을 전폐당한 혹독한 상황에서 그는 괴로워했다.
“됐어요.”
배도빈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는 본인이 그 입장에 놓였어도 가우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나치가 자신의 교향곡을 선전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배도빈의 눈은 뒤집혀졌다.
희망의 찬가였던 9번 교향곡, 합창.
그것이 비열하고 잔인한 나치의 선전 음악으로 사용되어, 그들의 정당 함을 알렸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그렇기에 배도빈은 가우왕의 소식을 듣는 순간 극가 죽음을 각오했을 거라 생각했다.
‘음악’이 그렇게 이용될 것을 그가 용납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만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도 그를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 두려웠다.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두 음악가는 그 이상의 대화를 필요치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와 됐다는 짧은 답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량 내부가 다시금 조용해졌고.
WH 그룹의 격납고에 도착할 무렵 가우왕이 깜짝 놀랐다.
“뭐야, 이게!”
배도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가우왕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반나절 뒤.
“가우야!”
“내 새끼, 내 새끼!”
배도빈의 전용기를 타고 곧장 베를린으로 향한 가우왕은 공항에서 뒤 따라온 소소, 애태우고 있던 가족들 과 재회할 수 있었다.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왜 이렇게 말랐니.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됐네! 그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아픈 데는? 응?”
60세가 넘은 가우왕의 부모와 고 모들은 오열하며 아들, 조카를 살폈다.
앙상한 팔과 여윈 얼굴을 보곤 어 찌나 고생했을지,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가우왕도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 했던 가족들을 본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기껏 여행 보내줬더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는 애써 눈물을 참아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리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 어뜨리며 몸을 떨고 있는 동생을 보았다.
나윤희가 소소의 등을 밀어주었고 오빠 앞으로 다가간 그녀는 차마 어 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얼마나 걱정했을까.
가우왕은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을 달래주기 위해 양팔을 벌렸다.
2주 뒤.
독일 정부는 가우왕 일가의 망명 신청을 이례적인 속도로 승인하였다.
독일 국민들은 긍지를 지켜낸 피아니스트와 그 가족을 환영하였고 관 련 내용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에 따라 여러 사람이 중국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우려했으나, 중 국에서는 관련 사안을 한 사람의 과잉 충성으로 규정하였다.
“조사 결과, 강유징 전 특별 보좌 관과 그 비서들이 왕가우 씨를 구 금, 협박했음이 밝혀졌습니다.”
관련자에 강력한 처벌이 있을 거라 약속한 중국 정부는 ‘가우왕’이 망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에 유감을 표명하면서 그를 인정하였다.
동시에 ‘왕씨 일족’에 대한 어떠한 보복도 없을 거라 발표하여,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미심쩍은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중 국 정부의 신속하고 상식적인 대응 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중국의 이미 지를 지키는 데 성공하였고.
모든 비난은 강유징 전 특별 보좌 관과 그 무리로 향했다.
2024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스 캔들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내 머리. 내 머리는 어떻게 되는 건데!”
“하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영양실조와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 적인 증상인 것 같으니.”
그러나 긴 시간 유폐되어 있던 가우왕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영양 부 족으로 탈모라는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강아지 아저씨, 걱정 마. 내가 대 머리 꼭 고쳐줄게.”
“대머리 아니야! 쉬면 낫는다고!”
“강아지 아저씨는 복슬복슬한 게 좋아.”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누구 보고 개래? 어? 내가 개처럼 생겼냐?”
“왕왕. 키힛
요양을 마친 가우왕은 배도빈의 얼 굴과 그가 넘겨준 악보를 번갈아 보았다.
“ 야.”
“ 고맙죠?”
“고맙긴 개뿔. 이걸 지금 치라고 만든 거냐?”
제목부터 ‘3개의 손을 위한 소나 타’였는데 가우왕은 배도빈이 자신 에게 엿을 먹이는 거라 생각했다.
기교에 있어서는 스승 크리스틴 지 메르만 이상으로, 세계 최고라 알려 진 가우왕조차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악보였다.
“불새 같은 곡을 만들어 달라면서요.”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서 흐]k#지! 이거 대체 노트가 몇 개야?”
가우왕은 빼곡하다 못해 제대로 알 아볼 수조차 없이 채워진 악보를 배도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래서. 못 해요?”
“누가 못 친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고 나간 가우왕은 곧장 본인의 자택으로 돌아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페트루슈카, 스카르보 등 그 어떤 난곡이라도 정확하게 연주했던 가우왕은 배도빈의 도전을 받아주리라 마음먹었다.
“흥. 이런 곡을 만들면 누가 못 할 줄 알고?”
‘내가 연주하지 못할 곡이 있을 리 없다.’
배도빈과의 경연 이후 깨달음을 얻은 가우왕은 지난 10년간 기교와 표현력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의 자부심과 긍지는 모두 본인의 실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우왕은 호기롭게 첫 음을 눌렀고.
그렇게 2024년이 지날 때까지 피아노 앞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시 머리카락이 풍성해진 가우왕 이 피아노 앞에서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뭐야, 이게.’
연습을 시작한 지 6주가 흘렀음에도 만족스럽게 연주를 할 수 없었다.
가우왕은 조금씩 ‘애초에 연주 가 능한 곡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피델리오〉아 시아 투어를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다.
배도빈이 베를린에 돌아오면 보란 듯이 완벽히 연주해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려 했던 가우왕은 조금씩 초조해 졌다.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배도빈이었다.
“ 뭐야.”
-연습은 잘하고 있어요?
“다, 당연하지! 아주 쉽더만!”
-그럴 리가 없는데.
배도빈의 도발에 가우왕이 바들바 들 떨었다.
피아노에 있어서는 글렌 골드, 크 리스틴 지메르만, 사카모토 료이치 등 그 어떤 거장 앞에서도 당당했던 가우왕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상황 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니! 너 나를 뭐라 생각하는 거냐!”
-자기가 옷 잘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멍청이요.
가우왕은 감금되어 있을 때 이상으로 분개했다. 걷잡을 수 없이 요동 치는 화가 잠시 좌절했던 그를 채찍 질했다.
“끊어!”
가우왕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 고 다시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한편.
가우왕과 통화하던 배도빈은 그가 전화를 끊자 그답지 않게 싱글벙글 웃었다.
곁에 있던 프란츠 페터가 눈을 깜 빡였다.
“가우왕 님이에요?”
“어. 보아하니 아직 연습 중인가 봐.”
“대체 어떤 곡인데 가우왕 님이 어 려워하시는 거예요?”
“볼래?”
배도빈이 파일철에서 가우왕에게 헌정한 ‘3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꺼내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프란츠는 악보를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변변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 승할 만큼 뛰어난 재능의 프란츠 페 터로서도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시작부터 도약이 극단적으로 컸는데.
이후 곧장 양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아르페지오를 이어나가야만 했다.
더군다나 왼손이 27개 음, 오른손 이 22개 음으로 짝이 맞지 않았다.
“하아아.”
시작부터 이러한데 곡이 진행될수 록 가관이었다. 프란츠 페터는 이걸 사람이 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혀, 형은 이거 칠 수 있으세요?”
“아니.”
배도빈의 단호한 태도에 프란츠가 순간 멍청해졌다.
“그게 뭐예요!”
다시 정신을 차린 프란츠가 배도빈을 탓했는데 그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다시 악보를 살폈다.
피아노의 황제라 불리는 가우왕이 라 해도 고생할 수밖에 없는 난이도였다.
그 전에 정말 완주가 가능할까 싶
었는데 가우왕과 통화를 마치고 계 속해서 꿈틀대던 배도빈이 결국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하하하하하하!”
배도빈은 한참을 웃은 뒤에야 얼굴 가득 의문을 품고 있는 프란츠를 보았다.
간신히 진정하고 악보를 흔들어보였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연주하는 거잖아. 악보를 합쳐놨을 뿐이야.”
“네?”
“처음부터 같이 연주하려고 만들었어. 왼손은 똑같이 연주하고 오른쪽은 번갈아가면서 하려고.”
“아!”
배도빈은 가우왕에게 악보를 넘겨 주었을 때를 생각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의 예상대로 가우왕은 복잡한 악보를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애써 의연한 척하는 가우왕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자세한 설 명을 안 하고 있었는데, 그가 멋대 로 악보를 가지고 돌아가 버렸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나 두고볼 생각 이었는데 본인이 저렇게 고집을 부 리며 혼자 연주할 수 있다고 하니,
현재 배도빈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피델리오〉의 아시아 투어가 끝나 고 베를린으로 돌아갔을 때 가우왕 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 상상 하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가우왕 님 불쌍해요.”
“본인 잘못이야. 난 고집부리라 한 적 없어.”
프란츠 페터는 배도빈이 가우왕을 길들이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