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92화
85. 긍지(4)
“그나저나 비서장님, 며칠 뒤에 아 주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들었습니 다만.”
“그렇소만.”
비서장은 불쾌하다는 듯 히무라를 노려보았다. 본인이 경고했음에도 왕가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무라는 교묘히 화제를 피 해갔다.
“그렇게 큰 행사라면 축하 공연도 신경 쓰실 텐데, 연락을 안 주셔서 섭섭했습니다.”
히무라 쇼우의 말을 들은 비서장이 놀랐다.
“어이쿠. 이런, 이런. 이거 히무라 대인이 이렇게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소. 하하하하!”
“하하하하. 연락만 주셨다면 좋은 연주자를 소개해 드렸을 텐데 말이지요.”
“ 흐음.”
비서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운을 띄웠다.
“사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소.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오.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역량 은 내 익히 알고 있으니.”
‘그렇겠지.’
히무라 쇼우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 점에서 가우왕 씨는 정말 멋진 후보일 텐데. 어찌 연락은 해보셨습니까?”
히무라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비서장이 눈을 깜빡였다.
‘이 일본놈이 뭐라는 거야.’
그는 히무라 쇼우가 자신을 떠본다는 것을 눈치채곤 불쾌한 기색을 비쳤다.
“뭐, 내 소관이 아니라 모르겠소.”
“이런. 아쉽습니다.”
“거, 뭐가 아쉽다는 말이오.”
“실은 그렇게 중요한 무대라면 함께할 의사가 있다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요. 조건이 까다로워서 조심 스레 여쭤볼 생각이었습니다만, 괜 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함께할 사람?”
히무라의 말에 비서장이 관심을 보였다.
가우왕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축하 공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히무라 쇼우가 무슨 말이 나 할지 들어보고자 했다.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함께한다면 더욱 멋진 무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답답하게 굴지 말고. 대체 그게 누구요?”
“배도빈 입니다.”
“……뭐라고요?”
비서장의 눈이 몹시 흔들렸다.
“누구 앞이라고 허튼소리를 하겠습 니까. 배도빈입니다.”
“그 말이 참이오?”
비서장은 반색했다.
히무라 쇼우의 말대로 배도빈이라 면 세계 최고의 음악가라는 수식어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배도빈이 행사 무대에 참가한 다면 가우왕 일이 불발되더라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아니, 타국의 음악 가가 인정하는 자리가 될 테니, 그들이 바라는 결과물 이상의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그래, 그 조건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가우왕과 듀엣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되니.”
히무라 쇼우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 예?”
“잠깐만 기다리시오. 어디 가지 말고!”
당황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히무라는 비서장이 자리를 옮기자 한숨을 내쉬었다.
‘도빈아, 정말 이래야만 하니?’
【홍콩 기념식 축하 무대에 배도빈 특별 공연!]
[충격 속보! 북미 투어를 마친 배도빈, 곧장 홍콩으로!】
【배도빈의 속뜻은?]
홍콩 행사 하루 전, 기습적으로 알려진 소식에 전 세계가 기함했다.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거절했다가 행방불명 되었다는 행사에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세계 최고의 음악가 배도빈이 나선다는 이야기에 여런과 팬덤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ㄴ 배도빈 제정신이냐? 가우왕이 뭐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는데 저길 나가?
ㄴ 돈독이 올라도 단단히 올랐구만.
ㄴ 아……. 이게 무슨 일이야. 도빈이가 왜 ㅠㅠ
ㄴ 이거 암만 봐도 이상하지 않냐? 그 배도빈이 저런 데 나간다는 거 자체가 이상하잖아.
ㄴ 단순히 욕할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가우왕 풀어주는 걸로 뭐 거 래 같은 거 한 거 아니야?
ㄴ 할 게 따로 있지. 저기가 어떤 무대인데. 배도빈이 지금까지 쌓아 왔던 이미지 한순간에 개판될걸?
ㄴ 그만큼 가우왕이 소중하다는 거 아닐까.
ㄴ 그럼 지금까지 배도빈 응원했던 사람들은 대체 뭐가 됨?
ㄴ 암만 봐도 이번에는 아님. 배도빈이 너무 성급하게 판단했음.
ㄴ 맞아. 저렇게 해서 풀려난다고 해도 가우왕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 자기가 가장 아끼는 음악가가 자기 때문에 신념을 굽힌 거잖아.
ㄴ 가우왕 성격이면 무슨 짓 저지를지 모르지…….
ㄴ 아아, 진짜 제발 이러지 마 ㅠㅠ 나 심장 약하단 말이야.
배도빈의 행보를 옹호하는 입장과 비난하는 입장,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 얽히고 있는 와중에.
배도빈이 홍콩 행사 당일 중국에 방문했다.
“마에스트로!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마에스트로 배! 무슨 목적으로 참가하신 겁니까!”
“지금 심경은 어떠십니까!”
“상황 설명 부탁드립니다!”
2024년 최고의 특종을 노리고자 전 세계 모든 언론사가 홍콩에 집결 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음악가 1만 명이 속속들이 홍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들 사이로 배도빈이 탑승한 리무진이 이 동하였고 그 광경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배도빈이 행사장에 이르고.
강유징 특별 보좌관과 대면했다.
“이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에스트로.”
배도빈은 강유징이 내민 손을 거들 떠보지도 않고 차갑게 물었다.
“가우왕은 어디 있죠.”
“하하. 그보다 먼저 인사를.”
“어디 있죠.”
“……데려와.”
강유징이 손짓하자 곧 그의 비서들 이 가우왕을 데리고 응접실에 들어 섰다.
짙은 화장으로 가리려 했으나 가우왕은 누가 보아도 상태가 좋아 보이 지 않았다.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배도빈이 이를 악다물었다.
그때 슬며시 고개를 든 가우왕이 배도빈을 보고선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팔을 뿌리쳤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대화는 나중에 해요.”
배도빈이 눈짓을 보내자 그를 수행 하고 있던 WH그룹의 사설 경비원 과 의료진이 가우왕에게 다가갔다.
배도빈이 분노로 가득 찬 가우왕의 얼굴과 몸 손을 쓰다듬었다.
“말해. 여긴 왜 왔어!”
“오랜만에 연주나 같이할까 해서 왔죠.”
배도빈의 대답에 가우왕의 얼굴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강유징 특별 보좌관을 향했다.
“너. 너어어어!”
가우왕이 강유징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WH그룹의 경비원과 의료진 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거 오해 말게, 가우. 이 일은 여기 마에스트로 배가 직접 제안한 일이니 말이야.”
그 순간 가우왕이 행동을 멈췄다.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이며, 망설 이며 고개를 돌린 가우왕의 눈에 배도빈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슬픔으로 가득 찬 그의 입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널 잘못 봤구나.”
자신 때문에 가장 아끼는 음악가가 타락했다는 사실이 본인의 죽음보다 괴로웠다.
“내가 널 잘못 봤어!”
“잘못 본 거 같네요.”
화가 나기는 배도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가우왕이 발버둥 쳤다.
“이거 놔. 이거 놔!”
“도련님, 쇠약해졌을 뿐 몸에 큰 이상은 없습니다.”
“수고했어요.”
“누구 멋대로 오랬어! 배도빈! 이 게 정말 날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냐! 어!”
가우왕의 발악에 배도빈이 고개를 돌렸다.
가우왕은 그가 눈물을 보인 것을 처음 보았다. 깊은 눈망울은 당장에 라도 슬픔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는 말할 수 없었다.
“자, 두 분 모두 재회하였으니 슬 슬 무대로 향하시죠.”
가우왕이 주먹을 쥐었다.
배도빈이 그 주먹에 손을 얹었고 가우왕은 체념하고 무대 위로 향했다.
전 세계 모든 언론이 생중계하고.
전 세계 6억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분노에 찬 수십만 명의 홍콩 시민과 검은 옷을 입고 온 1만 명의 음악가들의 가운데로.
‘황제’와 ‘희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대 위에는 두 대의 피아노가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10년 전, 그때 그 모습처럼.
피아노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가우왕은 건반에 손을 올리지 않았고 배도빈은 그러든 말든 상관없이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 몇 초간.
숨을 크게 들이마쉬고.
섬세히 수놓기 시작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 A플 랫장조.
부드럽게 그 작은 소리들이 모여 이루는 소중한 기억.
활기차게 뛰어노는 여러 구두들.
소중한 사람과의 오래된 추억을 상 기하는 듯한 배도빈의 연주는 처연하게 울렸다.
그 순간.
가우왕이 웃으며 건반에 손을 얹었다.
배도빈의 연주에 맞춰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그는 지난 몇 주간 가혹한 환경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힘이 넘쳐났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들은 배도빈과 가우왕이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이 해할 수 있었다.
ㄴ 배도빈 지금 뭐 하는 거야?
ㄴ 소름 돋네;;;
ㄴ 베토벤 A 플랫장조 소나타잖아. 저기서 저걸 연주한다고?
ㄴ 그게 뭔데.
ㄴ 저 곡 3악장 제목이 장송 행진곡임. 베토벤 장례식 때도 연주되었음.
ㄴ 어?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한 배도빈과 가우왕의 연주에, 전 세계가 술렁거렸다.
강유징 특별 보좌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홍콩 안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배도빈과 가우왕.
두 사람은 대담하게도 조금의 망설 임도 없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연주를 이어나갔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강유징 특별 보좌관이 팔걸이를 부술 듯 쥐었다.
“……당장 끌어내. 당장!”
그가 외쳤을 때.
“그만.”
강유징 특별 보좌관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버려 두게.”
“하지만!”
“쓰읍.”
“저 친구, 음악은 나도 즐겨 들었지만 이렇게 대담한 줄은 몰랐군. 어린 나이에 대단해.”
그가 강유징을 한심하게 보며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나? 저 두 사람이 아직도 자네 손에 들어 있는 것 같은가? 홍콩 사람들과 만 명의 음악가가 저 둘을 보호하고 있지 않은 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다지?”
강유징이 이를 바득 갈았다.
“자네의 멍청한 일처리로 일이 이렇게 되었네.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이야.”
“그것이!”
“시끄럽네. 자네 눈에는 저 두 사람이 안 보이는가?”
강유징 특별 보좌관이 무너졌고.
동시에 18분의 짧은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배도빈은 당당히 무대를 빠져나왔고 1만 명의 음악가와 홍콩 시민들은 그에 호응하듯 양옆으로 서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을 이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