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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91화 (39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91화

    85. 긍지(3)

    ‘독한 놈.’

    강유징 특별 보좌관은 널브러져 있는 가우왕을 보며 혀를 찼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팬과 함께하는 이 피아니스트는 음악계 최고의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제아무리 강유징 특별 보좌관이라 해도 그에게 상해를 입히기엔 부담 스러웠다.

    해서 구금해 두고는 스스로 지쳐 나갈 때까지 음식과 물을 주지 않았다.

    말라붙은 입술.

    깊게 파인 볼과 그늘진 눈두덩이.

    숨조차 가쁘게 쉴 정도로 다 죽어 가면서도 그 표독스러운 눈빛만은 여전했다.

    “이봐요. 왕가우 씨.”

    강유징이 쪼그려 앉아 가우왕과 눈

    을 마주했다.

    “당신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왜 사서 고생을 해?”

    “애국하자는 게 나쁜 말이 아니잖아. 그 고집만 꺾으면 당신이 누리 던 거 계속해서 가져갈 수 있어. 혹 시 알아? 더 예뻐해 줄지.”

    강유징이 가우왕의 양 볼을 잡아 힘을 주었다. 강제로 벌려진 입에 물을 쏟아 넣었다.

    “잘 생각해 봐. 당신 구할 사람은 당신뿐이야.”

    푸웃!

    그러나 강유징이 손을 떼자마자 가우왕은 보란 듯이 입안에 들어왔던 물을 뿜었다.

    강유징이 멈칫하더니 이내 안경을 벗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젖은 머리를 쓸어넘긴 그의 얼굴은 괴상 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렇게 소원인가?”

    죽고 싶냐는 질문에 가우왕이 피식 웃었다.

    “그런 무대에 설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강유징이 입술을 떨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 데.”

    그는 분노를 애써 삭이며 경고했다.

    “그래. 죽이는 건 조금 꺼려지지만 작은 사고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강유징이 가우왕의 손을 쥐었다.

    “그 알량한 자존심 지키려다가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어?”

    가우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피아니스트의 손을 앗아가겠다고 협박한 강유징은 이제 곧 고개를 숙 일 거라는 승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태 잘도 버텼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침묵.

    그 끝에 가우왕이 웃기 시작했다.

    “흐. 흐하하하. 쿰. 흐하하하하하! 쿨럭. 쿨럭.”

    쇄약해진 몸이 버거워할 정도로 크게 웃은 가우왕은 눈썹을 찡그린 강 유징을 비웃었다.

    “멍청한 티를 내도 정도껏 해야지.”

    “뭐?”

    “뭐라도 되는 줄 아냐고?”

    가우왕은 자꾸만 웃었다.

    “너야말로 날 뭐라 생각하지.”

    피식피식 웃던 그의 눈빛에 다시금 독기가 피어올랐다.

    “피아니스트라고.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외쳤다.

    바짝 마른 목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그 긍지만은 정확히 전달되었다.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이 내가 그 딴 추잡한 일에 어울릴 것 같으냐.”

    쉰 목소리를 토해내며.

    강유징을 꾸짖었다.

    “나 왕가우가 그딴 짓에 놀아난다면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무엇에 기대란 말이냐! 앞으로 피아노 앞에 앉을 아이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자 라라는 말이야!”

    가우왕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다.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내가 누구라고?”

    가우왕이 으르렁댔다.

    “피아니스트지. 아름다움을 전하는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전 세계 음악인들의 탄원서가 연일 빗발쳤다.

    대한민국에서는 차명운 지휘자와 박건호 피아니스트를 중심으로 가우왕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집회가 이루어 졌고.

    미국에서도 제르바 루빈스타인과 프란츠 미스트와 같은 거장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 여론이 매우 뜨거웠는데, 가우왕을 사랑하는 팬들이 유럽 전역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중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을 포함해, 사카모토 료이치, 마리 얀스, 브루노 발터, 예카테리나 베제노바, 칼 에케르트, 엘리아후 인손, 아 르투로 토스카니니, 예르반 퓌셔, 글 렌 골드, 크리스틴 지메르만, 그레고 리 소콜라브 등 내로라하는 거장들 과 그 악단, 또는 솔로 음악가들이 힘을 보탰다.

    그러한 상황은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에도 영향을 주어, 중국 정부를 향한 공식 요청을 할 정도였다.

    각국 언론에서도 중국 정부의 비민 주적인 행위를 ‘국가 간 정치적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라며 소극적으로 비판하였다.

    ㄴ 진짜 너무 무서운데.

    ㄴ 난 가우왕 이미 죽은 건 아닌지 걱정돈!다.

    ㄴ 모르지 전 세계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데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이 나오질 않았잖아.

    ㄴ 죽이진 않을 거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우왕인데 쉽게 그럴 리가 없음.

    ㄴ 그건 모를 일이지.

    ㄴ 그나마 다행인 게 가우왕만 한 사람이니 이 정도로 문제화라도 되었지. 덜 유명한 사람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냥 살아 남는 거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ㅠ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ㄴ 그 아저씨가 한번 마음먹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지라 더 걱정 됨.

    ㄴ 소소랑 가족들 계속 실신한대. 일어나면 쓰러지고.

    ㄴ 가족인데 오죽하겠냐.

    지난 20년간 웃음과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던 피아니스트 가우왕에 대 한 걱정과 사랑이 깊어지는 가운데.

    어렸을 적부터 가우왕을 목표로 삼았던 최지훈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가우왕의 가 족들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아버지 최우철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 거 라 생각했다.

    “아버지, 그 사람 구해야 해요.”

    “너무 걱정 마라. 죽진 않을 테니.”

    “아버지!”

    최우철도 최선을 다해 방법을 모색 했었다.

    아들이 가우왕이란 사람을 얼마나 따르는지 알고 있었기에 음성적이든 공적인 방법이든 여러 가안을 구상 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쪽이든 명쾌한 방법은 아니었다.

    “단 하나, 압박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아버지의 말에 최지훈이 반색했다.

    “AIIB. 중국이 주도해서 만든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이지. 미국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영민한 최지훈은 최우철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지분율은 중국이 1위지만, 독일과 대한민국이 4, 5위. 9위 영국도 상 당 지분을 소유하고 있어.”

    최우철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유장혁 회장 님이 작정한다면 대한민국 여론은 바꿀 수 있을 거다. 네 친구 도빈이 라면 독일 여론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겠지. 애비가 정말 노력한다면 어쩌면 영국을 움직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한 최우철은 눈을 뜨고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압박을 가할 순 있을 거다. 하지만 지훈아, 그렇게 되면 정 말 전쟁이야. 돌이킬 수 없는 사태 에 이를 거다. 그에 따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최우철은 멍하니 있다가 눈물을 흘 리는 아들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배도빈은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유장혁 회장의 지시로 가우왕 구금 사건을 조사한 김재식 실장은 현재 가우왕이 살아 있다는 정보를 확인 했을 뿐, 외부에서 그를 구해낼 방 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자국 내 집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물러나진 않을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일이든 상관없어요. 뭘 바라 는지 알아봐 주세요.”

    “접선이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가우왕 씨 이야기를 화제로 꺼낼 순 없습니다. 그 순간 가우왕을 구금, 협박했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만.”

    김재식 실장의 말에 배도빈이 벌떡 일어났다.

    “그로 인해 WH와 중국 사이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수만 명의 사람이 피해를 받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도련님께서 하셨습니다. 가우왕 씨가 베를린 필하모닉 소속이 되었으니 그들도 언제까지고 가우왕 씨를 구속하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김재식 실장의 설명에 배도빈은 처 음으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밤이 깊었음에도 불조차 켜지 않은 채 홀로 번뇌하고 있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를 분노는 중요치 않았다. 단지 가우왕이 무사 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애써 무시하던 배도빈이 문득 액정 에 나타난 히무라 쇼우의 이름을 보 곤 전화를 받았다.

    “네.”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배도빈은 그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배도빈이 굳이 대답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지켜 봐왔던 히무라는, 그가 어떤 심경일 지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중국인데, 그쪽 사람 만날 예정이야.

    배도빈이 눈을 떴다.

    “히무라.”

    -너무 기대하지는 마. 몇 번 안면을 튼 사이일 뿐이니까. 그래도 그 쪽도 자기들 과시하려고 가우왕 씨 만 한 거물이 필요할 테니 함부로 대하진 않을 거야.

    히무라의 말에.

    배도빈이 김재식이 떠난 뒤로 줄곧 생각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도빈아, 정신 차려. 너 그러다 무 슨 일을 당하려고. 안 돼. 난 그렇게 못 해.

    “부탁해요.”

    -아니.

    “제발.”

    -내가 괜한 이야길 꺼냈네. 그만 잊어. 난 그런 짓 절대 못 하니까 너도 잊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방법밖에 없어요.”

    -배도빈

    “도와줘요.”

    * * *

    ‘일 났네. 일 났어.’

    중국을 방문한 히무라 쇼우는 특유의 인맥을 동원해 강유징 특별 보좌 관의 비서장과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입 잘못 놀렸다간 죽도 밥도 안 될텐데.’

    자꾸만 목이 타 찬물을 들이켜게 되었다.

    상대는 중국 내 고위 간부.

    몇 해 전 교류가 있어 자리를 함께할 순 있었지만 가우왕에 관련한 일을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는 미지수였다.

    “오오, 히무라 대인. 오랜만이오.”

    “하하. 못 뵌 새에 얼굴이 더 좋아 지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 앞으로 음식이 차려졌다.

    “그래, 혹시 왕가우에 대한 일로 찾으신 건 아닐 테지요?”

    “하하하하! 그럴 리가요.”

    “아아, 실례했소. 워낙 뜬 소문으로 사람을 괴롭혀야 말이지. 휴가간 사람을 우리가 대체 어찌 알겠소? 안 그렇소?”

    ‘너구리 같은 놈.’

    히무라 쇼우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슬며시 물어보고자 했거늘, 늙은 너구리 같은 놈이 처음부터 가우왕에 대해 언급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히무라 쇼우는 웃으면서 식사를 나누면서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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