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90화 (39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90화

    85. 긍지(2)

    강유징 특별 보좌관에게 의뢰를 받 은 순간부터 가우왕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빌어먹을.’

    엄격히 통제되어 공론화되지 않을 뿐, 공산당에 거역한 인물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수백 명이 죽은 일을 기념 하는 행사라니.

    그곳에서 기념 연주를 하라니.

    평생을 바쳐 스스로를 갈고닦은 긍 지 높은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피아노가 더럽혀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가족 여행을 가기로 해서 말이 죠.”

    강유징 특별 보좌관의 눈이 칼날처 럼 들어왔다. 가우왕의 목을 찌르기 라도 하는 것처럼 예리하고 차가운

    눈빛.

    거절하기라도 했다간 무사하지 못 할 거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눈깔 한번 살벌하네.’

    가우왕은 마음을 굳혔다.

    “아쉽게도 가족들만 보내야 할 것 같네요.”

    필사적으로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가족 여행이 계획되어 있는데, 가 족만 보내야겠다.’

    가우왕이 그러한 말을 함으로써 그 가족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이 저지 될 일은 없었다.

    ‘어쩐다.’

    첫 만남 후 귀가하는 한 시간 남 짓 동안 가우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생각 했다.

    동생 왕소소가 살고 있는 베를린의 배도빈 저택.

    WH의 사설 경비들과 베를린시 경 찰이 엄중하게 관리하는 그곳이라면 ‘이 빌어먹을 놈들’도 쉽게 건들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곧 자택에 도착하고 강유징 특별 보좌관의 비서가 엄포를 늘어놓았다.

    “아아. 뭐, 수고하든지.”

    집으로 들어선 가우왕은 걱정하여 뛰쳐나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고모들을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

    이제는 각자 업계에서 은퇴해 노년을 즐길 소박한 가족들만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밥이나 먹으러 나갈까?”

    “집에서 그냥 차려 먹으면 돼.”

    그는 어쩌면 마지막 식사가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아빠 오리 먹고 싶

    다고 하지 않았어? 가자고.”

    가우왕은 평소 가족들이 즐겨 다니 던 식당으로 향했다.

    “오리 4마리랑 꿔바로우 둘.”

    풍족하게 주문한 뒤 즐겁게 식사를 시작한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믿을 사람이 필요해.’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소속사 도이치 아리아는 얼마간 가 족들을 지켜줄 테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을 터.

    배도빈이라면 가장 안전하게 가족 들을 보호해 줄 테지만 그 이상의

    폐를 끼칠 순 없었다.

    ‘ 할망구.’

    폴란드의 명문이자 여러 유력인과 연대하고 있는 스승이라면, 가족들을 돌봐줄 것 같았다.

    “가우, 너는 정말 감사해야 해. 피아노라도 못 치면 어쩔 뻔했니?”

    “크할할할!”

    “그러게.”

    피아노가 없는 삶은 상상해 본 적 도 없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가우왕은 피아노와 함께했고 수많은 곡 속에서 자

    신만의 꽃을 화려하게 피워냈다.

    그런 피아노를 더럽히는 일 따위.

    설령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얘가 대체 왜 이래?”

    “조용히 좀 해. 빨리 타.”

    가우왕은 가족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면서도 근처에 있는 강유징의 끄나풀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정말 따라다닐 줄이야.’

    여차하면 가족과 함께 가려 했던

    가우왕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 유징의 비서들이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외쳤다.

    “나는 괜찮다니까! 여행은 나중에 같이 가면 되지!”

    “우왕아, 무슨 일 있는 거야? 응?”

    “일은 무슨. 자, 이거.”

    “이게 뭔데?”

    “뭐긴. 여행 다니려면 돈 필요할 거 아냐. 넉넉히 넣어두었으니까 맘 껏 쓰라고. 맘껏. 비밀번호는 1111 이야. 기억하기 쉽지?”

    가우왕이 어머니를 안았다.

    어머니는 당황했지만 그 다정함에 드디어 아들이 철이 들었다고 생각 하고는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 승했다.

    갑작스럽지만 오랜만에 딸을 보러 갈 겸, 독일에 도착한 그들은 안면 이 있는 가우왕의 매니저를 만날 수 있었다.

    “반가워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가족들이 살 갑게 인사했거늘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차에 타시죠.”

    가족들이 검은색 벤에 탑승했다.

    “아이고. 이 늦은 시간에 마중까지 나오시고. 고맙습니다.”

    “소소 있는 데로 바로 가주세요.”

    “죄송하지만 소소 씨는 현재 미국 에 계십니다.”

    « O <-)”

    ...“ö"/

    매니저가 아무 말이 없자 가족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왕이 녀석이 뭘 잘못 알았나보 구만.”

    “그러면 소소는 언제 볼 수 있어요?”

    “매니저 양반 힘들게 이게 무슨 일 이람. 참.”

    가족들이 시끌벅적하게 이야기 나 누는 사이, 매니저가 다소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여러 대의 핸드폰을 가족 앞 에 놓았다.

    “앞으로 이 핸드폰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기존에 사용하시던 건 제게 주십시오.”

    “ 네?”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감?”

    “아니, 매니저 양반. 대체 무슨 일 이 일어나는지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니오.”

    가족들의 반발에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분이 쓰고 계신 핸드폰으로는 누구와 연락하는지, 무슨 대화를 나 누는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되기 때 문에 그렇습니다.”

    “뭐요?”

    “••••••실은.”

    매니저는 가우왕을 설득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그에게 들었던 이 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기막힌 상황에 가족들은 말문을 잃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10월 19일.

    〈피델리오〉북미 투어에 참가하고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왕소 소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곤 드물게 큰소리를 냈다.

    -꺼어어으읍. 네 오빠 어떡하니. 응? 네 오빠 어떡하니!

    “제대로 좀 설명해 봐!”

    오빠가 당의 요구를 수락하지 않고 가족들을 독일로 피신시켰다는 말에 왕소소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손이 떨려 하마터면 전화기를 놓칠 뻔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나윤희는 심 상치 않은 분위기를 잃곤 친구 곁으로 다가와 파르르 떨리는 손을 잡아 주었다.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 허어으으으으윽.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고모들까

    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소소의 불안은 더욱 커질 뿐이었고 이내 도이치 아리아의 매니저가 전 화를 대신 받았다.

    그는 가족들이 독일에서 며칠 머문 뒤 폴란드로 이동할 거라 전했다. 가우왕의 스승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본가였다.

    “오빠랑 연락은……

    -……끊어졌습니다.

    왕소소는 아무 생각도 이어나갈 수 없었다.

    곁에서 대강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던 나윤희는 곧장 인터넷에 접속하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글이 게시되던 가우왕의 개인 SNS는 활동이 중단된지 오래였다.

    팬들도 며칠째 새로운 글이 올라오 지 않는 것에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거야?’

    나윤희는 넋이 나간 친구를 보았다.

    고개를 떨어뜨린 왕소소는 초점이 사라진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울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그 모습이 그녀가 얼마나 충격 받

    았는지를 알려주었다.

    나윤희가 소소를 안았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순 없었지만 가우왕이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가우왕 씨 많이 힘들 거야.”

    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소소는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강한 사람이니까 분명 포 기하지 않을 거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말이 소소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들게 했다.

    “……소용없어.”

    그제야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대 기 시작했다.

    “그놈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소소의 머리에 여러 일들이 스쳤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중국 공산당이 마음먹으면 힘을 쓸 수 없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에 대부분 순 종하고 애써 외면하며 살았다.

    그것을 문제 삼기라도 했다가는 또 다른 희생자가 될 뿐이니, 중국인이 아니면 그러한 감정을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언론조차 지배받는 그곳에서.

    가우왕이 살아남을 방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지만 고집불통인 오빠가 그럴 리 없었다.

    “어떡해?”

    스승에게 받은 얼후를 부수고 귀찮게 굴기도 했던 짜증 나는 오빠였지 만, 그래서 저주도 퍼부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오빠였다.

    왕소소는 친구에게 기대어 흐느꼈다.

    그렇게 얼마간 서로를 다독인 끝에 나윤희는 이 일을 최대한 널리 알려 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일은 몰랐지만 가만있을 순 없었다.

    소소와 나윤희가 멀핀과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두 사람이 도착했다.

    소소는 매우 지쳐보였다.

    서둘러 안으로 들이고는 앉혔는데 평소 침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장에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무슨 일이에요.”

    “……가우왕 씨가.”

    나윤희가 소소를 대신해 상황을 설 명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중국에서 연주를 강요했나 봐. 가우왕 씨는 거절했고. 가족들만 베를린에 보내두었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국가가 개인을 위협하면서 일을 강 요하다니.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만들어진 시 대가 아닌가.

    “설마 했는데 큰일이네요.”

    멀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방금 확인했다는 기사를 보여주었다.

    도이치 아리아가 자국 언론을 통해 중국 정부가 가우왕을 구금하고 있다며 신병을 풀어줄 것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올라온 시각을 보니 1시간 전.

    말문이 막힌다.

    “최선은 적당히 응해주는 건데.”

    멀핀이 나와 소소 나윤희를 둘러보 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우왕 씨가 한 번 거절한 일을 번복하진 않겠죠. 이야기를 들어보 니 가족과 함께 나올 수도 없는 상 황이었나 보네요.”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다들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해 물었다.

    “……그런 나라입니다.”

    “나라는 무슨.”

    이런 일 따위가 용납될 리 없다.

    용납되어서도 안 되고 가우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결코 용서 치 않을 것이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멀핀은 나윤희의 질문에 답하지 못 했다. 한참을 고민한 뒤에야 만족스 럽지 못한 말을 꺼냈다.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여론을 모은다 해도, 지난 여러 일 들을 고려하면 크게 효과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명분이……

    그나마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소소 가 무너져 내렸다.

    “회장님이시라면 혹시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보스.”

    대답도 않고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오, 도빈이냐!

    “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이 녀석이 매정하게. 그래, 무엇 이냐. 내 새끼 부탁이면 뭐든 들어 줘야지.

    “가우왕이라고 아시죠?”

    -그래. 너랑도 친하지 않으냐.

    “네. 그 사람에게 지금 문제가 생 긴 것 같아요. 도와줄 수 있는지 알 아봐 주세요.”

    -흐음. 그래? 김 비서, 가우왕이란

    친구 좀 알아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래, 투어는 어떠냐.

    “잘되고 있어요. 이런 호응이면 크 루즈도 괜찮을 것 같아요.”

    -껄껄껄. 그래. 좋은 일이지. 그 친구 이야기는 파악되는 대로 연락 주마.

    통화를 마쳤다.

    ‘빌어먹을.’

    할아버지라면 어지간한 일은 처리 해 주실 테지만 멀핀의 반응으로 봐

    서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빌어먹을 꼬맹이.’

    ‘고소할 거야. 고소할 거야!’

    ‘네 곡은 내가 연주해야 해. 다른 사람 곡 만들 시간 있으면 내 곡을 만들라고.’

    ‘소소가 잘 지내는 거 같아. 집안 에만 박혀 있던 녀석이 사람들 사이 에서 웃다니. 네 덕분이다.’

    ‘기대하라고. 네가 만들어준다는 소나타, 세상에서 가장 멋들어지게 쳐줄 테니까.’

    까드득-

    “••••••멀 핀.”

    “네, 보스.”

    “앞으로 모든 공연에 가우왕이 갇 혀 있다는 내용을 거세요. 포스터든 현수막이든 팸플릿이든.”

    “그건. 보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 지만 우리가 그럴 명분이.”

    “하세요.”

    핸드폰을 꺼내 카밀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으으음. 도빈아? 무슨 일이야?

    “도이치 아리아에 연락해서 가우왕 과 연결 고리를 만드세요. 베를린

    필하모닉과 업무를 함께하고 있다는 내용이면 좋아요. 날짜는 좀 더 오 래 전으로 잡으시고요.”

    -어? 뭐라고?

    “소속을 아예 베를린 필하모닉으로 옮길 수 있다면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응?

    “자세한 건 멀핀이 설명해 줄 거예요. 서둘러 주세요.”

    ‘감히.’

    “가우왕이 베를린 필하모닉 사람이 라는 걸 공식적으로 증명할 만한 증 거라면 뭐든 좋아요.”

    -……가우왕 씨한테 무슨 일 생겼니?

    눈치 빠른 카밀라가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듯하다.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멀핀을 보며 말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단원을 보호합니다.”

    “보스!”

    “보호합니다.”

    멀핀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카밀라와 통화 중인 전화를 넘겨주고 소소의 어깨를 잡았다.

    산산이 부서진 그녀의 초점 잃은 눈을 보며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올게요. 무 슨 일이 있어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