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88화
84. 세계의 사카모토, 희망을 노래 하다 (5)
ㄴ내용도 재밌긴 했는데 난 사카모토가 만들었다는 곡이 너무 좋았어.
ㄴ 나두 나두.
ㄴ 애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진짜 엄청 과격한데도 사랑스러워.
ㄴ 사카모토 료이치가 배도빈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뜻 아닐까?
악마의 축복.
사카모토 료이치가 작곡하고 빈 필하모닉이 녹음한 오리지널 스코어는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 구나 배도빈을 떠올릴 정도로 격렬 했고 확고했으며 동시에 사랑스러운 곡이었다.
평론가 사이에서도 올해 최고의 오 리지널 스코어는 〈THE DOBEAN>의 ‘악마의 축복’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애니메이션의 홍행 못지않게 OST 도 크나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 주간의 음악 소식 전해 드리는 토크쇼, 너만모름의 우진입니다. 오 늘은 영화 음악계의 거장, 한스 짐 씨를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짐.”
“반갑습니다.”
“어째 요즘 곡 활동보다는 방송 출 연에 더 힘쓰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우진 씨야말로 여기저기 여러 프로그램을 맡고 계신 것 같네요.”
“전 이게 주업이니까요.”
“하하하하.”
두 사람이 친근하게 오픈 멘트를 나누었다.
“얼마 전에 개봉했죠. 배도빈 악단 주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다룬 극장 애니메이션 더 도빈이 흥행 중이라 고 합니다.”
“사실 지금도 어리죠.”
“……그렇죠. 아무튼 인기리에 상 영되는 더 도빈의 OST를 사카모토 료이치가 작업했다고 합니다. 영화 음악의 거장 짐은 어떻게 들으셨나요?”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카모토 교수를 평하라고 하니 난감하네요.”
“알고 나오셨잖습니까?”
한스 짐이 고개를 살짝 돌린 채우진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 올 거냐고 묻는 듯, 험악한 표정에 우진은 능글맞게 웃을 뿐이었다.
한스 짐도 작게 웃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른 의견이 있을까요? 대중이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 좋은 곡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작가가 짐과 같은 거물을 섭외했을 때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이 야기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 같네요.”
“이렇게 나올 겁니까?”
“죄송합니다.”
농담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또 한 번 웃었다.
“물론 이유도 여럿 있죠. 그중에서 도 종잡을 수 없는 바이올린을 언급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우진이 한스 짐의 말을 경청했다.
“악마의 축복에서 제1바이올린의 연주는 따로 떼놓고 들어도 완벽할 정도로 훌륭합니다. 말 그대로 어디
로 튈지 모르게 멜로디가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또 기승전결을 갖추었죠.”
한스 짐이 신호를 보내자 악마의 축복이 잠시 연주되었다.
“확실히 독특하네요.”
“여러 고전 양식을 차용했지만 독 특하죠. 하지만 이 정도로 감탄한다 면 사카모토 교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겁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건 주변 악기들에 있습니다. 바이올린만 연주되는 초반을 제 외하고는 그 많은 악기가 쉬지 않고 연주되는데 제1바이올린의 연주는 더욱 명확하게 들리죠. 심지어 다른 악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우진이 잠시 고민하곤 입을 열었다.
“대단한 건가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정말 놀라 운 구성력입니다. 곡의 진행도 사카모토 교수의 지난 곡들처럼 완벽했지만 악마의 축복의 진가는 다른 악 기들이 개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1 바이올린, 즉, 배도빈이 부각된다는 거죠.”
한스 짐은 사카모토 료이치가 노년에 인생 최대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고 극찬했다.
클래식과 다소 거리를 둔 세월이 무색하게 그야말로 완벽한 교향시라 고 주장했고 그것은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대부분의 음악가에게서 공 감을 샀다.
그러한 분위기와 〈THE DOBEA N〉의 흥행에 힘입어.
빈 필하모닉은 애니메이션과 빈 필하모닉의 공연을 연달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빈에 머물면서 재활과 작곡을 병행 하고 있던 최지훈에게는 놓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최지훈은 빈 의과대학에서 재활 치 료를 받고 곧장 크리스틴 지메르만 의 별장으로 향했다.
“선생님, 도빈이 애니메이션이 개 봉했대요. 같이 가요.”
스승은 그리 내키지 않은 눈치였다.
“망설여지네요. 애니메이션이라고 하 면 어떨지.”
“재밌을 거예요! 게다가 OST를 사카모토 선생님이 작업하셨대요. 빈 필하모닉의 공연과 이어져 있고요.”
최지훈이 빈 필하모닉의 이벤트 전 단지를 들어 보였다.
“흐음.”
사카모토 료이치라면 크리스틴 지 메르만도 인정하는 거장 중의 거장 이었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태어났을 무 렵 이미 사카모토 료이치는 세계 최 정상의 음악가였고 지금도 그 사실 은 변함없었다.
더군다나 빈 필하모닉이라면 평소 즐겨 찾던 악단이었기에 고민하고 있던 차.
최지훈이 〈THE DOBEAN〉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언급하였다.
“게다가 가우왕 씨가 직접 연기했대요!”
“그렇다면 안 볼 수 없겠네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빙그레 웃었다.
다음 날.
애니메이션을 관람하고 나선 스승 과 제자는 극장에 들어서기 전과 전 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무척 만족했다.
“애니메이션이라 해서 걱정했는데 흥미로웠어요. 왕이가 도빈 군에게 졌을 때는 정말 기뻤죠. 그때 기억 이 나네요.”
그녀는 감상을 읊으며 고개를 돌렸다. 최지훈은 어떻게 봤는지 물어보 려고 했는데, 제자는 얼굴이 잔뜩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지메르만이 물었다.
“어디 불편한가요?”
“그게••••••
최지훈은 크리크와 쇼팽 콩쿠르 당 시를 그린 장면을 본 순간 어딘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대충 어떻게 그리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배도빈과의 약속과 맹세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가요? 저는 멋진 형제애라고 생각해요.”
“그, 그렇게까지 애틋하진 않았어요. 뭐랄까. 조금 더……
지메르만은 애써 부정하는 최지훈을 흐뭇하게 보았다. 그러고는 목소 리를 낮춰 말했다.
“친형제 사이에 부끄러울 것 있나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전 이해 하고 있어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그렇기에 더 응원 하게 되죠.”
“네?”
스승이 뱉은 황당한 말에 최지훈의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그는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고 나서 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친형제라니.”
최지훈이 부정하자 크리스틴 지메 르만은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미 소를 보냈다.
그것이 최지훈을 더 당황하게 했다.
“아니에요. 누가 그래요?”
“유진희 씨라고 했나요? 도빈 군의 모친. 지훈 군이 어머니라 부르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생각하곤 있지만.”
지메르만이 검지를 들어 최지훈을 막아섰다.
“말 못할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지 훈 군, 어머니를 부정하는 슬픈 말 은 하지 말아요. 이해하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최지훈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잠깐 대화하니 스승은 정말 본인과 배도빈을 동복형제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면서 애써 부정하지 말라는데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고상한 스승의 음악 외 유일한 취 미가 드라마라는 것이 원인인가.
아니면 친한 친구의 어머니를 친근 하게 부르는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온화한 눈이 순식간에 혼탁해졌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상상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최지훈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거 아니죠?”
“정말인 것 같네요. 세상에. 그럼.”
“네, 아니에요.”
지메르만은 지난 6개월간의 오해를 돌이켜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거예요!”
최지훈이 스승을 흔들며 탓했지만 지메르만은 결코 자신의 드라마를 언급치 않았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빈 필하모닉의 공연장까지 계속되었다.
최지훈은 혹시라도 지메르만이 또 다른 오해를 할까,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랬군요.”
“네. 절 낳아주신 분은 따로 있지 만 제게 어머니는 한 분뿐이에요.”
“분명 대견하게 여길 거예요.”
최지훈이 웃었다.
사실 어머니 이지우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어렸을 때라 대부분의 추억이 희미 해졌다.
지금도 어머니를 잊는 것이 두려워 당시의 사진과 영상으로 이지우의 얼굴과 목소리를 반복해 보고 듣지 만, 함께한 시간마저 기억할 순 없었다.
단편적인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요리를 잘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식사는 아버지의 역할이었던 것.
함께 피아노를 치며 놀았던 일.
세 명이 나란히 누워 영화를 보던 일.
침대 위에서의 핼쑥해진 모습.
아빠를 사랑해 달라는 부탁.
그러나 그렇게 드문드문 끊긴 기억 속에서도 명확한 것이 단 하나 있었다.
정말 많이 사랑받았다는 것.
과거 매정했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절망적인 재능의 차이를 실감시켰던 배도빈을 질투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연히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최지훈이 방황하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어 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작게 웃으면서 어머니 이야기를 꺼 내는 최지훈을 보고 지메르만은 내심 탄복했다.
‘이 아이는 대체.’
지메르만은 최지훈의 기품 있는 행 동과 말에서 묻어나오는 사려 깊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특별한 교육을 받 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모두 어 머니와의 지극한 사랑 덕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따뜻한 연주를 할 수 있는 건가요.’
무결점의 피아니스트 지메르만은 자신을 꼭 닮은 어린 피아니스트에 게서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점을 발 견했다.
‘조급해지네요.’
지메르만은 하루빨리 최지훈이 회복해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길 바랐다.
최지훈이란 피아니스트에게 자신이 전수할 완벽한 기교에 더해지면 어떻게 될지 얌전히 기다릴 수 없었다.
“시작하나 봐요.”
소편성된 빈 필하모닉이 무대 위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명문 중의 명문답게 품위가 흘렀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소 박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 있는 전설.
모든 음악가의 교수.
세계의 사카모토.
짝짝짝짝-
관객들이 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빈 필하모닉의 총감독으로 부임한 뒤 첫 공연이었기에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은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대부분 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 사카모토 료이치가 빈 필하모닉에서 악장으로 활동했을 시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50년 전의 일.
빈 필하모닉의 오랜 팬들은 현 빈 필하모닉의 악장이자 사카모토 이후 빈 필하모닉을 이끌어 온 ‘역사’ 레 이너 퀴홀과 사카모토가 악수를 나 누는 모습에 눈시울을 적셨다.
오랜 시간 클래식을 향유했던 이들 이 모인 장소답게 경건한 분위기.
과연 전설과 그 팬이었다.
사카모토가 눈을 감았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단원들의 내면 까지 뚫어보는 듯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과는 전혀 다른 태 도.
오직 소리와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눈을 감고 지휘하는 사카모토 료이치만의 기행이었고.
그렇게 그는 50년 전, 세계 최고의 악장이자 지휘자로 군림했었다.
사카모토가 양팔을 벌린 채 어깨 위로 들었다.
최지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두 팔을 역동적으로 모으며 시작된 악마의 축복.
금관 악기가 폭발했다.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을 알리는 듯 하다.
제2바이올린이 마치 어머니의 목소 리처럼 상냥하게 울렸고 그에 반응 하듯 제1바이올린이 울기 시작했다.
신의 축복인가.
콘트라베이스와 첼로가 근엄하게 나선다.
길은 명확하다.
저음부가 확실한 만큼 제1바이올린 이 걸어 나갈 길은 분명한데, 사카모토 료이치의 천재성은 ‘악마의 축 복’이 무난하게 진행되길 거부했다.
제1바이올린이 멋대로 치솟아 베이 스와 첼로를 떨어뜨린다.
당분간 홀로 연주되는 바이올린.
앞서 애니메이션을 봤던 관객들은 지금의 연주가 삽입되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같았지만 마치 바이올린 파트 전체가 독주자가 된 듯, 자유롭게 카덴차를 연주하였다.
50년 이상 클래식을 즐겼던 이들은 사카모토 료이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악마의 축복은 누가 뭐라 해도 배도빈에게 헌정하는 사카모토 료이치의 사랑.
변화 없이 배도빈이라는 인물을 표현할 순 없다는 사카모토의 생각이 음악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금관의 폭 력적인 음량과 제1바이올린의 단순 하면서도 자유로운 선율은 마치
그것을 더욱 부각시키는 현악기와 목관악기.
어느 누구 하나 개성을 잃지 않으며 하나의 곡을 이뤄갔다.
이것이 진정한 하모니.
완성된 오케스트라라고 가르쳐 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