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86화
84. 세계의 사카모토, 희망을 노래 하다 (3)
2024년 9월 18일.
크레용 위즈 제작, 배영빈이 감독 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의 첫 시사회 일정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배도빈 일가는 일찌감치 로스앤젤
레스로 이동, 비벌리힐스의 별장에 서 한가롭게 휴가를 보냈다.
1년 전, 레버쿠젠 여행이 흐지부지 했던 탓에 가족에게는 더 각별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한 사람이 빠진 것이 흠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바쁘시대요?”
“그런가 보}. 복원 사업인지 뭔지. 너희 아빠 너무하지 않니?”
유진희의 불평에 배도빈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서운할 만했다.
테메스 복원 사업을 시작한 배영준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출장 가기 전, 한 달에 한 번은 돌아오기로 가 족과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4달 동안 단 한 번 지켜졌을 뿐.
그나마도 <피델리오>의 초연 일정 에 맞춰 단 하루 머물렀다.
오죽 떨어져 지냈으면 배영준이 다 시 돌아갈 때 배도진이 ‘아빠, 언제 또 놀러올 거야?’ 하고 물을 정도였다.
얼마나 바쁘면 집에도 못 올까.
유진희는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을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빈으로 향했다. 그리고 걱정과 달리 가장 행복 하게 웃고 있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옛 동료들과 함께, 그야말로 20대 가장 혈기왕성했던 열정을 발산하는 배영준은 그보다 행복해 보일 수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테메스 유적 발 굴을 포기한 뒤 남편은 크게 낙담해 있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 다른 일을 찾으려 했지만 유진희만은 남편의 슬픔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활력을 되찾아 안심했다.
그러나 모처럼만에 가족 여행마 저 빠지는 것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만 바쁘다니? 네가 시간 낼 수 있는 게 어디 쉬우니? 엄마도 그림 그리랴 화랑 운영하랴 얼마나 힘든데. 도진이도 전과해서 적응하 느라 고생이고.”
“ 하하.”
배도빈은 멋쩍게 웃어 넘겼다.
애틋하기 그지없던 부부 사이에 저기압이 흐르는 중.
괜한 말을 꺼냈다가는 상황이 악화될 뿐이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정말 쉬어도 되는 거야?”
다행히 유진희가 화제를 바꾸었다.
“네. 베를린 일은 푸르트벵글러가 잘 해줄 거예요. 피델리오 공연 팀 도 휴가 보냈어요. 다음 일정도 있으니까.”
두 달간의 유럽 투어로 피로가 쌓 이기도 했고 다음 달부터는 북미 투 어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배도빈은 <피델리오>에 참여했던 단원과 직 원들에게 일주일의 특별 휴가를 부 여했다.
덕분에 본인도 조금은 여유롭게 지
낼 수 있었는데, 새 단원을 뽑는 일 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니아 발 그레이, 악장단에게 일임해 두었다.
“북미 투어는 얼마나 해?”
“6주 잡고 있어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휴스턴, 뉴욕, 몬트리올, 밴쿠버 순서에요.”
“길다. 우리 아들 고생해서 어떡하니.”
“지금 쉬고 있잖아요. 10월 1일부 터니까 충분해요.”
배도빈이 버릇처럼 말끝에 걱정 말라고 덧붙였다.
유진희는 그런 아들이 기특하면서 도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하여 지치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도 요즘은 쉴 땐 쉬니까.’
배도빈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유진희도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기보단 평화로운 한때를 누릴 생각으로 책을 폈다.
전면이 창문으로 되어 있는 작은 거실에 햇볕이 들었다.
에어컨디셔너가 실내 온도를 선선하게 유지해 주었고 배도빈이 틀어 놓은 니아 발그레이의 바이올린 연주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졸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둘째가 평화를 깨고 말았다.
“토벤아, 맘마 먹자.”
자기 방으로 갔던 배도진이 배토벤 의 간식 통을 들고 나왔다.
뚜껑을 여니 수백 마리의 밀웜이 서로 엉킨 채 꿈틀대고 있었다.
배도진이 낑낑대며 어항까지 들고 와서 졸고 있던 배도빈과 독서 중이 던 유진희의 시선을 자연스레 끌었다.
배도진은 엄마와 형이 거북이를 사랑해 주길 바랐지만 두 사람은 배도진의 손에서 꿈틀대는 밀웜을 애써 외면했다.
“움늄늄늄. 맛있어?”
가장 좋아하는 먹이를 발견한 애완 거북이 배토벤은 냄새를 맡다가 한 마리를 덥썩 물어버렸다.
배도진은 턱을 괴곤 배토벤이 밀웜을 먹는 모습을 관찰했다.
물속에 들어가 고개를 마구 흔든 배토벤은 밀웜이 죽자 뭍으로 올라 왔다.
녀석이 간식을 반쯤 먹었을 때.
배도진이 밀웜을 만진 손으로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
“도진아!”
벌레를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혐오 하는 유진회가 깜짝 놀라 책을 던졌다.
“벌레 잡은 손으로 그러면 안 되 지! 베', 빨리 씻고 와!”
“토벤이가 엄마도 줬으면 좋겠대.”
그러고는 밀웜이 든 통을 유진희에 게 내밀었는데, 그만 손에서 떨어뜨 리고 말았다.
“ 아.”
거실 바닥에 수백 마리의 애벌레가 떨어졌고.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꾸물 대는 벌레를 본 유진희와 배도빈은 그 순간 굳고 말았다.
소름이 뻗쳤다.
“꺅! 도진아!”
패닉에 빠진 유진희가 비명을 질렀다. 소리를 내지 않을 뿐, 배도빈도 기겁하긴 마찬가지였다.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채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배토벤의 간식을 떨어뜨린 배도진이 얼른 소파에서 내려가 밀웜을 한 주먹 쥐었다.
혼자 정리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도와줘, 형.”
“아니.”
배도빈이 손을 들어 배도진을 막아 섰다.
그러나 그것이 장난끼 많은 동생을 더욱 즐겁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형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배도진은 밀웜을 가져 다주면 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 무나도 궁금했다.
“흐핳! 도와줘!”
“ 야!”
배도진이 신나서 형에게 달려들 때.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방문객을 확인한 집사가 유진희에 게 상황을 알리려 왔고, 작은 거실 바닥에서 꿈틀대는 밀웜과 배도진을 막아서고 있는 배도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매사에 신중하고 침착한 집사마저 흠칫할 광경이었다.
“……가족 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여기서 맞이하실 순 없을 듯하니 응접실로 옮기시지요
“네……. ……우리 좀 씻을게요. 형 님들은 잘 안내해 주세요.”
반쯤 넋이 나간 유진희가 힘없이 말했고 배도빈은 배도진의 양 볼을 쥐었다.
“흐아아앙.”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해 써요.”
잠시 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던 배영빈 가족은 막 씻고 나온 유진희와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작은어머니, 잘 지내셨죠?”
“어머나. 영빈이 그새 멋있어졌네?”
배영빈이 밝게 인사했고 벌레 때문 에 반쯤 혼이 나갔던 유진희도 배영 빈을 반갑게 맞이했다.
유진희의 칭찬에 배영빈이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도진아, 큰아빠랑 큰엄마께 인사 드려야지?”
아직 배영빈 가족이 익숙지 않은 배도진은 배토벤을 들고 자기 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쑥스러운가 봐요.”
“신경 쓰지 마.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네. 도빈이는 이제 장가가도 되겠다. 하하하!”
배영준의 형이자 유진희의 아주버 니 배형준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단지 배도빈이 배영빈을 노려보다 가 끌고 갔을 뿐이었다.
모두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배도빈의 큰어머니 이복자만은 조금 움츠러들어 있었다.
“형님, 어디 불편하세요?”
유진희가 걱정스레 묻자 이복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 아니이? 그, 그냥. 그냥 뭐.”
“편하게 지내세요. 좋은 일로 오셨잖아요.”
아들이 유명한 감독이 되어 미국까 지 왔는데도 이복자는 심히 불편했다.
이유는 동서 유진희 때문이었는데 구박했던 과거가 있는 탓에 오는 내내 따로 호텔을 잡으면 안 되냐고 배형준을 괴롭혔다.
배형준이 아내를 탓했다.
“아, 거, 언제까지 그럴 거야. 그러 니까 왜 가족끼리 못되게 굴어서 불편하게 만들어?”
“내,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유진희가 동서 이복자를 보다가 웃 으며 말했다.
“영빈이 정말 대단한 거 같지 않아요? 세 번째 작품 만에 미국에서 첫 시사회라니.”
그 말에 이복자가 반색했다.
“동서도 이야기 들었어?”
“그럼요. 영빈이 이야기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요즘 취직도 힘들다고 하던데 영빈이 나이에 저렇게 성공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데요.”
“그렇지? 아니, 내가 괜히 잘난 척 하는 것 같아서 말은 안 해도 우리 아들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으이구.’
배형준은 신이 나서 아들 자랑을 하기 시작한 아내를 한심하게 보았다.
그렇게 구박을 당했는데도 이렇게 맞춰주는 제수씨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그게 사실 도빈이가 워낙 잘나서 그렇지. 영빈이만 하면 잘생겼지, 키도 크지, 능력 있지. 요즘 영빈이 좀 소개해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서 곤란하다니까.”
“소개요? 영빈이 따로 만나는 사람 은 없고요?”
“글쎄, 아직도 지 엄마 좋다고 그렇게, 그렇게 붙어 있는다니까? 이거, 이 가방 영빈이가 人]• 준 거야.”
이복자가 버버리의 토트백을 들었다.
“거 푼수 같은 소리 그만 좀 홍fl. 누구 앞에서 명품 자랑을 해?”
“아니, 당신 아까부터 왜 그래? 나는 뭐 아들한테 선물 받은 것도 자랑 못 해?”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 제수씨가 당신 무안하지 않게 해주려고 하는 거 안 보여?”
남편의 말에 기가 죽은 이복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동서. 내가 원래 좀 이러잖아. 왜, 그렇잖아. 새파랗게 어 린 사람이 사고 쳐서 결혼했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유명 화가라 하질 않나, 대기업 딸이라고 하지 않나. 도빈이는 또 얼마나 대단해? 나는 뭐, 동서가 편한 줄 알아? 아 니, 말은 왜 안 했어? 응?”
“아, 왜 잘 나가다가 옆으로 새?”
“ 아하하하하하.”
부부의 싸움에 유진희가 웃고 말았다.
“괜찮아요. 형님 원래 그런 분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유진희는 굳이 예전 일을 이유로 이복자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과 배영빈이 잘 지내기도 했고 어찌되었든 당시 오갈 곳 없던 가족이 지낼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무시하고 살 수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타인을 대하다간 고립될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저도 어디 가서 아들 자랑 마음 놓고 못 하는데 차 마시면서 이야기 나 좀 해요.”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
이복자는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 * *
“왜, 왜 그렇게 봐?”
“무슨 짓이야.”
배영빈을 끌고 방으로 왔다.
선뜻 대답하지 않아서 추궁하니 녀 석이 눈을 피하고는 중얼거렸다.
“그냥, 무]. 하고 싶어서.”
그러고도 한참을 망설여서 짜증이 치미는데, 터지기 직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제일 힘들 때 네가 도와줬으니까. 나 같은 사람 많을 거라 생각 했어. 그래서 만들고 싶었어. 네가.”
“ 그만.”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물어서 잔뜩 혼내줄 생각이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간지러워서 못 참겠다.
“나보다 어린 네가 꿋꿋하게 음악 하는 거 보니까, 괴롭힘 좀 당한 거 에 지기 싫더라고. 내 꿈, 그런 걸 로 포기할 만큼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손이 불판 위에 놓인 오징어처럼 자꾸만 말려들어간다.
“작업할 때 항상 네 곡 들어. 그래 서 그 마음 잘 아니까 만든 거야. 네가 꼭 봐줬으면 좋겠다.”
“더는 못 들어주겠네.”
이대로 있다가는 손과 발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녀석이 엉덩이를 걷어 차 내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