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81화 (38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81화

    83. 폭발 배도빈(2)

    29일 오전 10시 30분.

    프란츠 페터는 베로나로 출발하기 전에 배를 잔뜩 채울 생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 부속 레스토랑에 들렸다.

    “안녕하세요!”

    “ 음?”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급사장이 프란츠와 시계를 번갈아보았다.

    “별일이구나. 점심을 먹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니냐?”

    “오늘 멀리 가게 돼서요.”

    “멀리?”

    “베로나 가요.”

    “베로나? 이탈리아?”

    프란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여 베를린 필하모닉 레스토랑의 급사장도 따라 웃었다.

    정확한 이야기는 모르고 또 굳이 물어봐 들출 생각도 없었지만 프란 츠의 언행만으로도 소년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뷔페조차 몰라 멀뚱히 서 있는다든지, 한 그릇에 가득 채운다든지, 여러 번 먹어도 된다고 하니 사용한 그릇을 다시 쓴 다든지 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창피했는지 동 생에게는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모습이 기특했고.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니 흐뭇 할 뿐이었다.

    “그래. 여행을 하려면 배가 든든해 야지. 맘껏 먹고 가려무나.”

    “네!”

    프란츠는 접시에 음식을 담고 자리를 잡았다.

    직원 식당의 음식은 언제 먹어도 황홀했다.

    좋은 재료를 일류 조리사가 다루는 베를린 필하모닉 레스토랑은 천국이 나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아, 천천히 먹어.”

    “뉍

    프란츠가 음식을 꾸역꾸역 밀어 넣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급사장이 물을 떠다 주었다.

    얼마 뒤.

    ‘더는 못 먹겠어.’

    배를 가득 채운 프란츠는 출발 시각까지 40분 정도 남았음을 확인하 곤 급히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잠깐. 페터.”

    급사장이 식당을 나서려는 프란츠에게 종이봉투를 건넸다. 소년이 어 리둥절하자 자애롭게 웃었다.

    “샌드위치다. 이탈리아까지는 오래 걸리니까 배고플 거야. 가는 길에 먹 거라.”

    생각지도 못한 도시락에 프란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나 많이……. 괘, 괜찮아요.”

    “남은 재료로 만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야 한다?”

    “그래도……

    “쓰읍! 아들 같아서 주는 거니까 받아. 아, 어서. 무안해지잖아.”

    프란츠가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샌드위치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케이스가 담겨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넉넉히 쌌으니까 같이 가는 사람들하고 나눠먹으면 될 거야.”

    급사장은 시간을 확인하고 퍼뜩 놀 란 프란츠를 배웅하곤 피식 웃었다.

    2024년 7월 30일.

    오페라 축제가 열리고 있는 아레나 주변은 수만 명이 운집해 있어, 그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했다.

    뜨거운 태양과 함께 달궈진 문화의 도시 베로나.

    “끄으으아.”

    버스에서 내린 프란츠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비틀대며 걸은 끝에 겨우 앉아 쉴 만한 그늘을 찾은 프란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중간에 쉬긴 했지만 하루를 꼬박 버스 안에서 있었더니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 배고파.’

    프란츠가 하나 남은 샌드위치를 꺼냈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고 날은 더웠던지라 쉽게 상할 수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눠 먹길 잘했어.’

    도중에 배를 한 번 더 채우곤 일부는 옆자리의 할머니와 뒷자리의 아이에게 나눠주었는데, 혼자 먹으려 했으면 아깝게 다 버릴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프란츠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준 급사장에게 작은 선물 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었다.

    “ 합.”

    정류장 앞 광장 벤치에 앉은 프란츠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사람 정말 많다.’

    타는 듯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관광객이 넘쳐나는 탓에 앉아서는 광 장을 둘러볼 수 없었다.

    “하압.”

    대신 프란츠는 샌드위치를 다시 한 번 크게 물곤 다리를 흔들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관광지라 그런지 이탈리아인 말고도 다양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처럼 여러 인종이 있어, 프란츠는 거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면 되지?’

    배를 채우며 체력을 회복한 프란츠 가 핸드폰을 꺼냈다.

    아레나 공연장까지는 큰 도로로 일 직선.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멀었고 돈도 아낄 겸 걷기 시작했다.

    “예쁘다.”

    길게 뻗은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가로수가 짙은 녹음을 이루고 있었다.

    도로 가운데는 화단이 길게 놓여 차선을 분리하고 있었고, 단아한 외 벽의 건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난생 처음 해외여행을 나온 프란츠 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20분쯤 걸었을까.

    프란츠의 눈에 아치형 문이 들어왔다.

    ‘여기가 브라 광장인가봐.’

    높이 걸린 시계는 〈피델리오〉가 공연되기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조금 둘러보고 가도 괜찮겠지?’

    지도를 확인한 프란츠는 게이트 안 쪽으로 들어간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체 언제 지어졌는지 모를 오래된 벽이 광장을 감싸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쌓인 벽을 따라 잠깐 주변을 둘러본 프란츠는 공원 가운 데로 돌아왔다.

    가운데에는 높은 나무가 몇 서 있고 그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가족과 연인, 친구끼리 모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우와아.”

    공원을 너머 곧장 거대한 원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앞이었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오래된 건물은 기원전 30년에 건축된 야외 오페라 극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배도빈의〈피델리오〉를 관람한다고 생각하니 그 이상 행복할 수 없었다.

    ‘오길 잘했어.’

    겁도 났고 무리도 했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프란츠는 벤치에 앉아 차분히 기다렸다.

    뜨거운 태양과 가끔씩 부는 바람.

    그리고 이국의 분위기를 느끼며 악 상을 떠올리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아레나 디 베로나에 입장한 프란츠는 북동쪽 첫 번째 줄 가운데에 앉을 수 있었다.

    거의 비어 있던 2만 개의 객석이 모두 찰 때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 요치는 않았다.

    “오, 여기 봐. 꼬마가 혼자 앉아 있어.”

    “그러게. 애기야, 혼자 왔니?”

    “그라시에. 그라시에.”

    프란츠는 옆자리의 젊은 부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탈리아 말을 반복했다.

    그러자 젊은 부부가 크게 웃더니 쿠키를 나눠주었고, 프란츠는 거절 하다가도 급사장의 말을 떠올리곤 쿠키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라시 에’를 반복했다.

    ‘ 맛있다.’

    부부가 준 쿠키는 맛이 좋았다.

    잠시 후.

    “휘이이익!”

    베를린 필하모닉이 공연장 안으로 들어섰다.

    열정적인 이탈리아 팬들은 단원들을 아낌없이 환영해 주었다.

    가운데 살짝 들어간 공간에 자리한 단원들을 보던 프란츠도 크게 소리쳐 봤다.

    평소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언제 봐도 감격이었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멋졌던 나윤희 악장에게서는 조용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고.

    무섭기도 했던 왕소소 악장은 얼마 나 집중했는지 눈을 감고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어, 도도함이 느껴졌다.

    언제나 멋진 말을 들려주던 찰스 브라움 악장이 걸어 나올 땐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함부로 외치기도 했다.

    그리고.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

    배도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슈트를 차려 입은 배도빈은 상의를 휘날리며 당당히 걸어 나왔다.

    ‘멋있어, 멋있어, 멋있어!’

    말 그대로 마왕의 풍모.

    거부할 수 없는 폭력적인 악상과 매료되어 벗어날 수 없는 마성의 소리.

    많은 이가 배도빈을 마왕으로, 그의 음악을 악마의 속삭임으로 표현 했지만 프란츠의 눈에는 그 어떤 영웅보다도 찬란해 보였다.

    지옥 같던 세계에서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프란츠가 버틸 수 있었던,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동생 알베르트와 배도빈의 음악이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땐 기적이 일어난 줄 알았다.

    너무나 기뻐 말조차 제대로 못 할 때, 그는 프란츠와 알베르트를 어둠 에서 끌어내 주었다.

    혹사당하면서도, 얻어맞으면서도 더 당하지 않기 위해 웃어야만 했던 시 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떨렸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틈만 나면 그때의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프란츠를 괴롭혔다.

    단지, 음악을 할 때만 잊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배도빈의 음악은 특효 약이었고.

    소년 프란츠 페터에게 배도빈이란 남자는 구세주였다.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던 아레나 디 베로나는 이제 고요하다.

    천천히 지는 석양과 어우러진 마왕과 그 군세는 당장에라도 진군할 듯 했다.

    프란츠는 침을 삼켰다.

    ‘야외무대니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야외 대규모 무 대를 사용할 때면 악단 내의 연주자를 대부분 동원했다.

    음향 효과를 극대화하는 콘서트홀 이 아니기에 음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던 탓.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고, 완벽주의자 배도빈은 추가적인 방법을 더했다.

    실내에서의 공연과 야외에서의 공 연에서의 지휘를 달리 했던 것.

    야외무대에서는 곡의 본질을 보다 명확하게 하여 좀 더 단조롭고, 그러나 더욱 인상 깊게 하였다.

    작곡가의 의도, 지휘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이해하기 더 수월 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프란츠 페터는 심오한〈피델리오〉를 이해하기 에 야외 대규모 무대에서의 연주를 듣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초연 때 그러했고.

    영상화 된 연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박력을 함께 즐기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좀 더 베토벤과 배도빈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배도빈이 양팔을 들어올렸다.

    서곡.

    장중하게 퍼지는 관악기.

    묵직한 걸음을 상징하는 듯한 큰북 소리.

    비장함을 두룬 현악기가 지난 2,00 0년의 역사 중 가장 큰 슬픔을 노 래했다.

    ‘ 아아.’

    아니나 다를까.

    프란츠는 이미〈피델리오〉의 이야 기 속으로 빠져 버렸다.

    **

    “흐아아.”

    공연이 끝나고 광장으로 나온 프란 츠는 그때까지 여운을 느끼고 있었다.

    반쯤 멍한 상태로 걸어나와 광장 가운데 벤치에 앉았다.

    모든 신경이 150분이 넘는 장대한 드라마와 음악을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프란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아갈 차는 오후 10시 50분.

    시간을 확인하려고 가방 속의 핸드 폰을 꺼내려던 프란츠의 핏기가 가셨다.

    “어?”

    아무리 뒤져도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찾을 수 없었다.

    지갑과 필기구 티슈 등 다른 건 그대로 있는데 핸드폰만이 사라졌다.

    광장과 거리 사이의 아치형 문에 걸린 시계는 오후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황한 프란츠가 걸어온 길을 돌아 가며 주변을 살폈지만 핸드폰은 발견할 수 없었다.

    배도빈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물건 이기도 했고, 돌아갈 버스 티켓이 저장되어 있기도 했다.

    “어떡해.”

    혹시 아레나에서 떨어뜨리진 않았을까 생각한 프란츠는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경비원에게 저 지당하고 말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차.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프란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

    “아으.”

    이탈리아어를 할 줄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란츠가 더듬거리자 여성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프란츠의 손을 잡았다.

    “곤란한가 보네. 어디서 왔어?”

    간단한 영어를 알아들은 프란츠가 독일이라고 하니, 여성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Miss? Are you miss?”

    길을 잃었냐는 질문에 프란츠가 고개를 저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 혹시 주변에서 제 핸드폰 못 보셨어요?”

    그러나 대화에 한계가 있었고 커플 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떠났다.

    프란츠는 주변을 좀 더 돌아다녔지 만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순 없었고 무거운 마음으로 광장 시계를 확인 했다.

    남은 시간은 15분.

    서두르면 어떻게든 터미널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국제 터미널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 이 있을 테고 사정을 설명하면 어떻게든 베를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 라 생각했다.

    선물받은 핸드폰이 마음에 걸렸지 만 이대로 이탈리아에서 미아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광장을 벗어났다.

    ‘늦으면 어쩌지.’

    남은 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방에 손을 넣은 프란츠는 말 문이 막히고 말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지갑조차 없었다.

    순간, 도와주려 다가온 커플이 떠 올랐다.

    여자와 말하고 있는 도중 남자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볼 수 없었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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