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78화
82. 레오노레(4)
〈피델리오〉를 관람한 관객들은 도이체 오퍼가 각색한 새로운 느낌의 오페라에 매료되었다.
막이 내리고.
귀가하는 이들은 저마다의 감상을 나누었다.
“마르첼리네 되게 매력 있지 않아?”
“응. 문지기 대하는 게 웃겼어.”
“오페라 가사는 좀 딱딱하다고 해야 하나. 옛날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런게 없었던 것 같아.”
“맞아. 맞아. 오페라 처음이었는데 생각했던 이미지랑 완전 달랐어.”
“각색했다고 하던데 신경 정말 많이 쓴 것 같아. 나도 오페라는 좀 먼 느낌이었는데 전혀. 드라마 보는 거 같았어.”
“레오노레는? 레오노레도 진짜 대박 아냐? 돈 피차로가 남편 죽이려 할 때 박력 봤잖아.”
“매력 터졌지. 근데 원래 칼싸움 장면이 있었나?”
“ 없었을걸?”
고전극의 경우 현대와의 간극이 있었기에 명작이라고는 해도 공감 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가 치, 즉 사랑에 관련한 이야기 정도 만이 오랜 세월 사랑받았지만.
그마저도 다양한 이야기에 익숙 해진 현대인들에게는 시시할 수밖 에 없었다.
그러나 〈피델리오〉의 경우에는 현대 드라마 못지않은 자극성을 지니고 있었다.
〈투란도트〉때도 배도빈과 호흠을 맞추었던 도이체 오퍼의 총감독, 구스타프 제르너는 작가진, 배도빈과의 논의 끝에 피델리오가 지닌 ‘자극성’을 극대화했다.
그 결과.
레오노레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활 동하게 되었고 남장여자로서의 캐릭터성에 더해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났다.
그런 피델리오를 사랑하는 마르첼리네 역시 공기화되지 않고 피델리오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 게 되고, 번뇌하고 결국에는 사랑 하는 ‘그’를 위해 활약하도록 배치 되었다.
현대극과 같이 캐릭터성이 강화 되고 인물 사이의 갈등이 심화.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 한 무대 연출.
현대적인 감각으로 변경된 각 등 장인물의 대사까지.
〈피델리오〉를 본 이들은 그 드 라마성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ㄴ 진짜 개재밌닼ㅋㅋㅋ
ㄴ 걍 음악 좀 많이 들어간 영화네. 오페라라고 해서 좀 거부감 있었는 데 전혀 없음.
ㄴ 베를린 필하모닉이 진짜 대단한 게 끊임없이 연주되는데도 몰입을 더해줬음.
ㄴ 원래 오페라가 음악과 서사의 결합이니까.
ㄴ 진짜 재밌었음. 뭐라고 해야 하지. 레 미제라블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ㄴ 맞아. 맞아. 딱 그 느낌인데 좀 더 세련된?
ㄴ 이렇게 재밌는 걸 왜 지금까지 몰랐지.
ㄴ 내 생각엔 베토벤이 만들었던 시 기보단 지금 시대에 더 맞는 이야기 같음.
ㄴ 좀 그렇긴 하다.
ㄴ 권력자를 향한 투쟁이잖아. 레오 노레든 남편이든 결국엔 권력과 싸운 거잖아.
ㄴ 지금은 당연한 건데 당시만 해도 아직 귀족이니 뭐니 남아 있었으니까.
ㄴ 그때도 오페라를 주로 보는 사람 들은 권력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무래도 불편했겠네.
ㄴ ㅇㅇ이렇게 보니까 아리아부터 곡도 진짜 좋다.
ㄴ 시대를 앞서갔던 거임.
베를린 필하모닉의 골수 팬들은 〈피델리오〉의 매력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전문가들의 의견과도 어 느 정도 일치했다.
평단에서는 비운의 작품이었던 〈피델리오〉가 드디어 제대로 된 감독과 무대 그리고 시대를 맞이 했다고 평했다.
“도이체 오퍼의 각색은 특출했습니다. 위대한 베토벤의 음악이 드 디어 제 옷을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음악가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한 사람이자 클래식 음악 작곡가로서는 배도빈 이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필립 클래스는 〈피델 리오〉를 향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을 내비쳤는데 그것은 배도빈의 활동 반경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주인이 되면서 제약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최소 반년 이상의 스케줄을 소모해야 하니, 미스터 배의 팬 으로서 아쉽기도 합니다.”
필립 클래스는 의아해하는 기자 들을 향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피델리 오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미스터 배의 역량을 막고 있기도 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 지휘자로서의 그도 훌륭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곡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필립 클래스의 말은 여러 사람의 공감을 샀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을 방문 했던 이들은 대부분 오페라의 내 용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 과는 다소 다른 반응이었다.
“이번 피델리오의 놀라운 점은 당 연히 주인공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이 철저히 배경이 되었다는 점 입니다.”
정확한 지적이었다.
〈투란도트〉 때만 해도 도이체 오퍼는 철저히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고 어디까지는 주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였다.
그러나 〈피델리오〉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스스로 배경이 되 어 오페라로서의 완성도에 집중했던 것.
필립 클래스가 코 중간에 걸친 안경 너머로 기자들을 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도 오페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말 베토벤이 직접 지휘했다면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었죠. 덕분 에 정말 훌륭한 오페라가 완성되었지만.”
기자들도 조금씩 필립 클래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휘자로서의 그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뜻이고 동시에 미 스터 배가 개인을 의도적으로 감 췄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행보는 파격과 충격으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만. 어젯밤은 아니었죠.”
음악계 거장의 말은 과연 그 여파가 컸다.
항상 배도빈의 기발한 편곡과 뛰어난 작곡 능력.
그리고 그것을 훌륭히 소화하는 연주진으로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이 상대적으로 후방으로 빠진 것은 사실이었고.
〈피델리오〉에서 그러한 시도가 없이 원곡에 충실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베를린 필하모닉에도 큰 걱정거리로 남았다.
첫 공연 동시 시청자 수 약 400만 명.
하루 만에 누적 시청자 수 3,700 만 명을 넘기며 또 한 번의 신화를 써내린 베를린 필하모닉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확실히 보스가 얌전해지긴 했어.”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필립 클래스의 발언에 배도빈의 평소답 지 않은 행동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원곡을 최대한 완성도 있게 연주하는 데 신경 썼 으니까.”
“자각이 없었어. 생각해 보면 항 상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는데.”
“혹시 조금 지친 걸까?”
“너무 성급한 생각 아닐까? 그렇다고 보스가 곡을 안 쓰는 건 아니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결국 오페라는 성공적이었어. 보스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주였다고 했고.”
“우리 다들 같은 걱정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보스가 지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있다는.”
“그래. 암만 생각해도 평소랑은 달랐어. 어쩌면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
“다, 다들 왜 그래?”
“아니. 그저 보스가 부담을 느낀다고 하니까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서.”
“그러네.”
“다들 필립 클래스의 말이라고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다들 보스 완벽주의 몰라? 피델리오 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을 연주하 려는 거 아니겠어? 특별히 편곡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어쩌면 너무 바빠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최근 정말 바빴잖아. 게다가 바깥일도 하고 있었고.”
모두의 시선이 찰스 브라움에게 향했다.
“크흠.”
찰스 브라움은 애써 모른 척했지만 그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확실히 안주하길 거부하고 항상 변화를 꾀했던 배도빈의 지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얌전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원곡을 최대한 살리긴 해도 그것은 그와 그를 사랑하던 이들이 알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면서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고민이 깊어져 갔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의 공연을 마친 배도빈은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소파에 기댄 채 가슴에 애완 거 북이 배토벤을 두곤 꾸벅꾸벅 졸았다.
이틀 연속 장시간 공연을 했기에 피로가 쌓였고 3일 뒤에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두 달간의 유럽 투어.
일정 사이마다 휴일을 두긴 했지 만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기에 쉴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으음.”
억지로 몸을 일으킨 배도빈이 문을 열었다.
집사는 배도빈에게 정중히 인사 하고는 물었다.
“마누엘 노이어 씨와 피셔 디스카 우 씨가 방문하셨습니다. 어찌 대 응할까요.”
‘무슨 일이지.’
배도빈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 음을 직감했다.
피델리오 공연 팀에 대해서는 오 늘과 내일 푹 쉬라고 전달했다.
자택까지 방문했다는 것은 분명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
“웅접실로 안내해 주세요. 곧 내 려갈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배도빈은 안방 거실을 지나 샤워실로 향했고 간단히 씻은 뒤 곧장 1층 응접실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였다.
“무슨 일이에요?”
배도빈이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노이어와 디스카우에게 물었다.
“어? 뭐. 잘 있나 싶어서.”
“하하하하! 보고 싶어서 왔지.”
“……뭐 잘못 먹었어요?”
두 사람의 헛소리에 배도빈이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일정에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안 되니까 음식 조절해요.”
“뭐, 그런 이야기는 제쳐 두고.”
“으핫핫핫!”
배도빈의 충고를 얼버무린 두 사람이 종이 가방에서 위스키를 꺼 냈다.
“뭐에요?”
“공연 성공했으니 소소하게 자축이나 하자고.”
“마실 거면 두 사람만 마셔요. 뭔 일인가 했네.”
배도빈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일어서자 노이어와 디스카우가 그를 붙잡았다.
“자, 자. 그러지 말고.”
“이렇게라도 풀어야지. 노력했고. 성공했잖아. 딱 이것만 마시자고.”
“주정뱅이들 상대할 생각 없어요.”
배도빈은 악단 내에서도 술고래로 유명한 두 사람이 단 한 병의 위스키로 만족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말이야. 이틀째인데 영상 조회수 6천만 넘긴 거 못 봤어?”
“암암. 그냥 넘어가면 그간의 노력이 섭하지.”
“한 잔 정도라면 숙면에도 도움이 된다고.”
“자자.”
“한 잔만이에요.”
배도빈의 말에 디스카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뚜껑을 열었다.
두 시간 뒤.
“모라고오?”
“그러니까아. 세프도 있고 슈타인 감독도 있다고오. 난 우리 보스가 하고 싶은 거 다아아! 했으면 좋겠어어.”
“암. 암! 괜히 우리 신경 쓴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란 이 말이야!”
“모라는 거야.”
“작년에 너 나간다고 했을 때. 어? 우리가 약속했잖아.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도울 테니까 남아달라고. 움? 근데에. 근데에 네가 그러 면 우리가 뭐가 돼애애애. 딸꾹.”
배도빈은 주정뱅이 둘이 취해서 또 헛소리를 한다고 여기고는 술병을 들었다.
찰랑거려야 할 위스키가 없자 눈을 가늘게 뜨고는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금속 벨을 눌렀다.
잠시 후.
그의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위스키 하나 가져다주세요.”
발갛게 달아오른 배도빈의 얼굴을 확인한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취하신 듯합니다.”
“한 잔만〜”
“한 잔만요.”
“흐하하! 한 잔만 부탁드립니다!”
세 명의 주정뱅이가 떼를 쓰자 집사도 어쩔 수 없이 보관하고 있던 위스키와 곁들일 과일을 가져다 놓았다.
술을 채운 세 사람이 잔을 높이 들어 보인 뒤 단숨에 넘겼다.
“ 크으으으.”
“이봐, 보스으.”
“왜요오.”
“우린 이미 함께하는 사이잖아? 그러니 그렇게 숨기면 도리어 서 운하다고오.”
디스카우의 투정 아닌 투정에 배도빈의 기분이 상했다.
“아까부터 자꼬 무순 말을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마누엘 노이어가 나섰다.
“누가 봐도 얌전한 연주였자나. 어엉? 배도빈의 지휘가 아니었단 말씀이야아. 편곡할 시간도 없이 바빴고, 준비할 우릴 생각했던 거 자나.”
"응."
“뭐래.”
배도빈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또 모른 척한다.”
“서운하게.”
그러나 배도빈을 각별히 사랑하는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좀 더 박력 있게. 싸나이답게에! 그래야 배도빈이쥐이!”
“옳지! 옳지! 너무 심심했단 말이 야아.”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배도빈이 정색했다.
“헛소리 마라요. 피델리오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대로 지휘했을 뿐이에요.”
“ 진짜아?”
“ 진짜아.”
“뭐 그렇다면야.”
세 사람은 잠시간 술에 집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누엘 노이어의 생각에, 원곡에 충실한 배도빈, 성실한 배도빈이 납득되질 않았다.
“증마알. 증말. 어?”
“또 모요.”
“진짜로 괜찮은 그지?”
배도빈이 반쯤 감긴 눈을 하고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스스로 옳았음을 증명해낸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고, 그로서는 노이어와 피셔가 그런 걱정을 하는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