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77화 (37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77화

    82. 레오노레(3)

    오후 7시.

    연주자들이 1층 무대에 모습을 드 러내자 웅성이던 올림피아슈타디온 이 더욱 요란스러워졌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이체 오퍼의 〈피델리오〉를 가장 먼저 관람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기대하 고 있었다.

    소리만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듯한 몰입감.

    그로 인한 감동과 환희.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베를린의 연주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 열망이.

    지휘자 배도빈이 등장하면서 걷잡을 수 없어졌다.

    뚜벅- 뚜벅-

    멀리서도 느껴지는 깊고 강렬한 눈빛.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원 버튼의 싱 글 브레스트 상의를 휘날리며 포디 움에 오른 배도빈을 향해 경외와 애 정이 쏟아졌다.

    “으오오오오!”

    “꺄아아아!”

    올림 피 아슈타디온이 요동쳤다.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

    무대까지 그 여파가 전달될 정도로 수만 개의 목소리가 한마음으로 외쳤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마치 큰 스피커를 앞에 둔 것 같았다.

    팬들의 환호성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전신을 때렸다. 당장에라도 몸이 바스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남자와 함께 할 수 있었기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지난 15년간 인류의 희망이라 불리고 앞으로 천 년간 기억될 음악가.

    희망 혹은 신, 마왕이라 불리나 그 어떤 타이틀도 거부하는 긍지의 음악가와 함께하기에 매번 새롭게 도전할 수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그러니까. 한 인간이 이렇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건가 싶어.”

    이시하라 린은 15년 전 3살 소년을 떠올렸다.

    음악을 하기 위해 돈을 벌고 싶다던 아이는, 불과 성인이 되기도 전 부터 세계 최대의 오케스트라의 주 인이 되었다.

    혹자는 그의 외조부 덕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이시하라 린은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WH 그룹의 지원이 없었더라도 배도빈은 이미 전 세계로부터 사랑받 고 있었다.

    마치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의 축복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신화 속 인물처럼 역사를 써 내리고 있었다.

    그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 대부분이 배도빈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도 유일하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만이 그러한 상황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는 배도빈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관객과의 소통만을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솔직할 뿐.

    제아무리 자긍심이 강한 인간이더 라도 수백만, 수천만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완벽’하게 인식된 이 상 자유로울 순 없었다.

    ‘네 음악을 해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배도빈이 지나칠 정도의 과한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길 바랐다.

    그의 음악이 가슴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했기 때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도빈아.’

    벌써 몇 번이고 경험했던 일이지만 배영준과 유진희 부부는 아들을 향한 이 맹목적 관심이 두려웠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 두려웠다.

    너무나 큰 관심이니까.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신경이라면 부담될 수밖에 없었고 언젠가는 그 것이 안 좋게 작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네가 좋으면 괜찮아.’

    부부는 둘째의 손을 꼭 잡은 채 첫째를 응원했다.

    그리고 이 순간.

    전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남자는 포디움에서 관객을 향 해 인사하고 있었다.

    웃고 있다든지 표정은 없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치 관중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하려는 것처럼 천 천히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배영준, 유진희 부부와 푸르트벵글러 그리고 배도빈을 인간으로서 사 랑하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안도했다.

    배도빈이 돌아서자.

    경기장을 흔들던 환호성이 거짓말 처럼 사라졌다.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자.’

    배도빈이 두 팔을 양옆으로 뻗었고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가 크게 두 개의 원을 그리며 팔을 내뻗었고 묵직하게 울리는 진군의 나팔.

    마왕의 군세가 또 한 번 침략을 시작했다.

    서곡.

    팀파니와 금관이 벼락처럼 내려치고.

    현악기와 관악기가 번쩍이는 가운 데 찰스 브라움이 이끄는 제1바이올린이 떨기 시작했다.

    ‘작게. 더 작게.’

    찰스 브라움은 배도빈의 지시를 반 영하며 곡의 분위기를 이끌었고.

    다니엘 홀랜드가 이끄는 콘트라베 이스와 이승희의 첼로는 그보다 아 래에서 기반을 다져 주었다.

    현악기 소리가 당장에라도 멈출 듯 이 여리고 또 여리게 연주되다가.

    나윤희가 이끄는 제2바이올린과 함께 숨쉬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오는 마누엘 노이어의 바 순과 진 마르코의 오보에.

    절제.

    천천히 고조되는 비장한 멜로디가 공연장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관객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펼친 문을 통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문지기 야퀴노는 한 여성을 사랑했다.

    “내 사랑, 우리 둘뿐입니다. 서로에게 솔직해지죠.”

    아름다운 마르첼리네.

    그러나 마르첼리네는 이미 한 남성에게 빠져 있었으니, 아버지의 조수 피델리오였다.

    “관심 없어요, 야퀴노. 나 일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딱 한 마디만이라도.”

    “대체 무슨 말인데요?”

    “당신이 계속 그렇게 매정하게 군 다면 한 마디도 하지 않겠소, 마르 첼리네.”

    “하지 마요, 그럼. 웃겨 정말.”

    “잠깐. 잠깐만 들어주시오.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소.”

    “뜸들이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가요.”

    “실은 당신을 내 아내로 정해두었소.”

    “ 하.”

    “2〜3주 뒤에 식을 올릴 준비도 해 두었다오.”

    “놀고 있네.”

    마르첼리네는 야퀴노의 무례한 행동을 신랄하게 탓했다.

    그러나 야퀴노는 끈질기게 그녀를 귀찮게 했다.

    야퀴노는 마르첼리네의 아버지, 로 코의 부름을 받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저 머저리는 언제 철이 들지. 하 아. 그래. 그는 죄가 없어. 단지 피델리오가 우리 집에 들어온 뒤로 내 마음이 변한 거야.”

    피델리오를 향한 마르첼리네의 마 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마르첼리네로서는 피델리오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로코가 관리하고 있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아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 아니, 그녀의 이름이 레오노레 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모른 채.

    마르첼리네는 간수장인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 피델리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고생했네, 피델리오.”

    “고생 좀 했습니다. 하하! 여기 계산서입니다.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좋아. 영리하고 성실한 자네가 처리한 일이니 믿을 만하지. 오오! 그 래 물품을 아주 싸게 구입했구만!”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래. 보수는 곧 지불하겠네, 피델 리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간수장.”

    “이 친구. 내가 자네 속내를 모를 것 같은가. 잠깐 기다리게.”

    아버지와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마르첼리네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이럴까. 그만 보면 넋을 잃고 말아. 그도 그럴까? 그래. 나를 보면 항상 웃어주니까 그도 날 사랑하는 거야. 확실해.’

    마르첼리네가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피델리오, 아니, 레오노레는 각오를 다졌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남편을 구해낼 수 있을까.’

    그러는 한편 자신을 향한 마르첼리네의 연심을 눈치채고 있었다.

    ‘저 어린 아가씨가 날 좋아하고 있어. 어떡하지?’

    위태롭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상황 은 간수장 로코의 오해로 점화되었다.

    ‘딸아, 피델리오 녀석이 그렇게 좋더냐. 그래. 녀석도 널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줄 리가 없지.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냐. 내가 두 사람 결혼식만은 성대히 치러주마.’

    마르첼리네는 피델리오와 결혼하길 바라고 그녀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미쳤어. 미쳤어! 왜 이렇게 재밌어?’

    도이체 오퍼에 의해 각색된 가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압도적이고 드라 마틱한 사운드는 지금까지 다소 진 부했던 피델리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관객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꼬일 대로 꼬인 등장인물들의 관계 에 몰입했다.

    형무소장 돈 피차로가 본인의 과오를 덮기 위해 레오노레의 남편, 플 로레스탄을 죽이라고 명한다.

    간수장 로코는 피델리오로 위장한 레오노레와 함께 플로레스탄을 묻으려 한다.

    쇠약해진 남편을 본 레오노레는 눈물을 참으며 그에게 빵과 물을 건넨다.

    설마 아내가 와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플로레스탄은 그저 마음 좋은 간수라 여기며 갈증과 허기를 달래고.

    마침내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이제 죽이려는 돈 피차로가 검을 들고 나 타났다.

    “플로레스탄! 여기, 네가 파멸시키 려던 피차로가 왔다! 네가 두려워했어야 할 돈 피차로가 여기 있다. 너는 그래서는 아니 되었어!”

    “피차로! 살인마, 추악한 얼굴을 들이밀었구나!”

    “그 건방진 입을 놀리는 것도 이제 끝이다. 이 칼로 너의 생명이 다할 것이다!”

    돈 피차로가 검을 높이 든 순간.

    플로레스탄은 아내를 떠올리며 죽 음을 각오한다.

    그때.

    “안 돼!”

    플로레스탄은 자신을 껴안은 간수에게서, 빵과 물을 주었던 간수에게서 아내의 향기를 맡는다.

    “ 당신.”

    레오노레는 돌아서 당황한 돈 피차로에게 외쳤다.

    “찔러라. 이 사람을 죽이려거든 나 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이, 이 미친놈이. 썩 비키지 못해!”

    “피, 피델리오. 자네.”

    “웃기지 마! 만일 이 사람을 죽이 거든,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용서 치 않을 것이다. 피에 굶주린 추악 하고 더러운 널 용서치 않을 것이 다!”

    “피델리오! 그만하게! 이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가! 내 딸은 어찌하려 그러는가!”

    로코는 딸 마르첼리네와 예비 사위를 걱정했고.

    돈 피차로는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르려 했다.

    “당장 비키지 않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그래!”

    그러나 그 어떤 말과 위협도 레오 노레의 사랑과 용기를 꺾을 순 없었다.

    “이 사람을 죽일 거라면 먼저 아내 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레오노레!”

    급박하게 흐르는 전개 속에서.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장중한 멜로디.

    마침내 피날레로 향하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관람한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일어나.

    종막을 맞이했고.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서 있는 상태 그대로 경의를 담아 그들이 받은 격한 감동을 표현했다.

    200년간 제 빛을 발하지 못했던 악성의 유일한 오페라가 정당한 평가를 받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