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75화
82. 레오노레⑴
베를린 대학은 최근 초청 강사 배도빈으로 인해 행복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의 강의는 1,200명의 재학생이 듣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학 홈페이 지에 게시된 강의 영상이 수만 번 반복될 정도로 인기 있었다.
베를린의 마왕이라 불리는 배도빈 의 강의 실력이 뛰어난 것도.
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수준이 뛰어나, 거장의 심오한 말을 잘 이 해하는 것도 이유는 아니었다.
“뭐가 재밌냐고요?”
대학 신문 기자 엑스의 질문에 학 생이 망설이다 친구에게 물었다.
“왜지? 핳하하하.”
“왜 나한테 물억컥헣허.”
마땅한 대답은 듣지 못한 그는 학 교 커뮤니티를 검색, 어느 정도 공 감되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ㄴ 아, 내일 강의 진짜 기대된다.
ㄴ 저번 주에 진짜 웃겼짘ㅋㅋㅋ
ㄴ 나 저번 주 못 나갔어 ㅠㅠ
ㄴ 하이든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빌어먹을 노인네라곸거 거 거 무슨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하는데 개웃김 ㅋㅋㅋ
‘의외로 말재주가 있나보네?’
엑스는 어렸을 적부터 언론을 접했던 배도빈이 화술에 익숙하다고 여 기며 그의 강의를 청강하고자 마음 먹었다.
다음 날.
학생들은 베를린 대학의 대예배실을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청강 하기 위해 계단과 바닥까지 차지하 고 있었다.
베를린 대학의 재학생들이 이렇게 나 열정적일 줄 몰랐던 엑스는 감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천 명이 넘는 숫자라 미리 좌석별 로 지정된 인원이 출석 여부를 파악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 해줄까?”
“모차르트 또 듣고 싶은데.”
“똥 좋아했다며.”
“왜 그것만 기억핵킥킥킥킥. 천재 라 불렸어도 20대 때는 도리어 인 정 못 받았고 꾸준히 노력했단 이야 기였잖아〜”
“그것밖에 생각 안 나.”
학생들의 말을 들은 엑스가 메모했다.
‘음악 하느라 관심 없을 줄 알았는 데 음악사도 공부하나 보네.’
전형적인 천재인 줄로만 알았던 배도빈이 실기와는 무관한 음악사 공 부도 했다는 점이 의외였다.
잠시 후 배도빈이 강단에 섰다.
강의를 듣고 있던 엑스는 배도빈의 강의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옛날이야기 같네.’
할아버지가 잠들기 전에 해주는 이야기처럼 편안했다.
“그럼 또 뭐가 궁금한지 들어보죠.”
배도빈의 말에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엑스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다급히 응했지만 기회는 다른 학생 에게 주어졌다.
“수학과 2학년 조지 스톡스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음악가에 대해 말씀 해 주셨지만 베토벤은 언급하지 않으셨는데요.”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입니다.”
“죄송합니다. 불멸의 음악가라 불 리는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이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일을 극복하며 만 든 곡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지 스톡스의 질문에 배도빈은 잠 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걷기 시작했다. 강단으로 있는 무대를 좌우로 왕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고 극 복했지만 끝내 그를 가장 힘들게 한 일만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배도빈의 말에 학생들이 의아해했다.
대학 기자 엑스도 베토벤이 청각을 잃고 난 뒤 그것을 극복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뒤이은 설명에 그도 학생들 도 작게 신음했다.
“주정뱅이에 쓰레기 같은 요한도, 어머니와 형제의 죽음도. 연인과의 이별도, 소리를 잃은 것도 이겨냈던 그였지만 단 하나. 아들, 아니, 조카 카를의.”
항상 명확했던 배도빈의 목소리가 잠기고 말았다.
그는 단상에 마련되어 있는 물병을 집어 들어 벌컥 들이켜고 나서야 말을 이어나갔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일은 카를 판 베트호펜의 자살 기도였습니다.”
관련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던 학생 들의 입에서 탄사가 흘러내렸다.
역사 속의 사람이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었는데 이야기를 이 어나가는 배도빈을 보고 있으니 그들 도 모르게 감정이 이입되었다.
“루트비히는 카를을 친아들처럼 여겼습니다. 대학을 나와 지식인으로 서 살아가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카를이 부랑자들과 어울리고 빚을 지 며 사는 것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배도빈의 목소리가 조금씩 차분해 졌다.
“카를은 루트비히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루트비히도 크게 실망했습니다만,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어 쩔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되돌려 놓으려 했죠.”
잠시간 침묵.
배도빈은 조금의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루트비히가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카를의 엇나감을 사랑으로 보담아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다음 질문 받겠습니다.”
그 가정은 결국 베토벤과 카를의 관계가 나아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숙연해진 강의실 분위기 때문에 학 생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좋은 기회였기에 엑스가 손을 들었다.
“네.”
배도빈의 지목을 받은 엑스가 일어 났다.
“문예창작학과 3학년 엑스 트랄라 입니다.”
엑스가 자신을 소개하자 배도빈이 눈썹을 좁혔다.
“스펠링이 어떻게 되죠?”
배도빈의 질문에 학생들이 웃고 말았다.
누가 들어도 엑스트라. 장난같은 이름이었던 탓인데, 엑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Axe Trala 입니다.”
“네, 트랄라 학생.”
“다음 주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도 이체 오퍼가 피델리오를 합연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베토벤 유일의 오페라라 알려진 피델리오가 어떤 곡인 지,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받은 배도빈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잠시 거닐었다. 그러고 엑스 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언론사에서나 할 법한 질문이네요.”
“베를린 대학 일간지 까메오에서 나왔습니다.”
어떻게든 배도빈과의 인터뷰를 따 려는 기자는 많았고 그들이 접근하는 방식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혹시 나 의심했던 배도빈이 웃고 말았다.
“좋은 언론인이 되겠네요.”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그간 언론에 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풀 기 시작했다.
“피델리오만큼 루트비히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은 없습니다. 시작부터 끝 까지 말이죠.”
배도빈은 앞서 최지훈과 차채은에 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강의를 이어나갔다.
* *
“오빠, 오빠. 나 좀 도와주라.”
“ 피아노?”
“웬 피아노?”
배토벤과 같이 한가로운 오후를 보 내고 있는데 지훈이와 채은이가 놀러왔다.
“베토벤은 어떤 사람이었어?”
배토벤이 목을 쭈욱 내민다.
내 마음에 들든 그러지 못하든 오 만 책에 다 나온 내용을 물어서 조금 당황스럽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평소에 베토벤 이야기 자주 했잖아. 이거 틀렸다. 저거 틀렸다 하면서.”
“넌?”
최지훈을 보니 방실방실 웃는다.
“심심하단 말이야〜”
그러고는 방에 드러눕더니 그대로 올려다본다.
하는 수 없이 대충 이야기를 시작 했다.
“나이를 제대로 모르는 게 어이없었지. 빌어먹을 인간 때문에 출생 신고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으니까. 모차르트 흉내 내보겠다고 두세 살 어리게 말하고 다녔는데 본인도 그
런 줄 알았고.”
그 미친 작자가 날 어떻게든 천재 로 팔아보겠다고 나이를 속인 것도 황당한데, 출생 신고도 늦었던 모양.
덕분에 세례 받은 날이 출생일이 되었는데 그마저도 의심스럽다.
“ 천재••••••
최지훈이 중얼거렸다.
꽤 긴 시간 천재라는 이름에 집착 했던 녀석이 느끼는 바가 있는 모양 이다.
“다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거 말 구. 다른 건 없어?”
차채은이 턱을 괸 채 입을 내밀었다.
“뭐 때문에 그런데.”
“오빠랑 베토벤의 연관성을 찾고 있어. 다들 모차르트니 하면서 오빠 기분 상하게 하는 기사만 써대니 까.”
기특하구만.
“피델리오를 만들 때 이야기인데.”
"음..."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없었어. 구 질구질한 사랑 이야기라면 지긋지긋 했거든.”
“왜?”
대답해 주려는데 채은이가 멋대로 납득해 버렸다.
“아,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엄청 많이 차였잖아. 어지간한 사랑 이야 기로는 성에 안 찼겠다.”
“차인 게 아니지.”
“그럼?”
계속 말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아 배토벤의 등을 만지며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당시의 급격히 변화하던 일들을 말하고 싶었어. 계급제도의 부당함 같은 것들 말이야.”
“맞아. 신분제에 대해 계속 비판했다고 들었어.”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이 정치적 목적성을 띠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노래하는 것을 바랐지. 그래 서 당시에도 가장 인기 있었던 오페라를 통해 말하고 싶었고, 그런 이 야기를 찾았어.”
“베토벤이 말이지?”
“그래.”
당시 혁명을 거친 프랑스에서는 어느 미친놈들이 정당을 이루어 반대 파들의 목을 날려버렸었다.
“클뢰브 데 자코뱅 이야기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원래 공부 잘하는 지훈 오빠는 그렇다 치고 오빠는 언제 이런 공부 했어?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사실 나도 클뢰브 데 자코뱅이라는 이름은 잊고 있었다.
“얘가 이상한 거야.”
누운 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최지훈의 볼을 쿡쿡 쑤셨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루트비히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왔어. 레오노 르 또는 부부애라는 건데 프랑스에 서는 이미 연극과 오페라로 만들어 진 희곡이었지. 루트비히는 그걸 독 일어로 번역하고 음악을 덧입혀 오페라로 만들었어.”
“그게 피델리오야?”
“아니.”
“나 알아. 레오노레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빌어먹을 돼지 새끼가 초를 쳤어.”
“도빈이는 나폴레옹 이야기만 나오면 화내더라.”
아주 치졸하고 돼먹지 못한 돼지 새끼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신축 극 장이었어. 안 데어 빈 극장. 루트비 히는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지.”
“그거랑 나폴레옹이랑 무슨 상관이야?”
“당시 빈이 그놈한테 점령당해 있었거든. 오페라를 즐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나마 있는 관객 도 프랑스 놈들이었어.”
“전쟁 중이었으면 그럴 만도 하겠다.”
“……망할 프랑스 놈들은 예나 지 금이나 자기네들 말 아니면 못 알아 들어.”
“아!”
차채은이 손뼉을 쳤다.
“독일어로 만든 거니까 무슨 내용 인지도 못 알아들었겠네.”
“그래.”
내 평생 그런 실패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그 때문에 수정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어. 3막을 2막으로 줄이라 니.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돈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홍행 실패의 이유가 분명한데, 그 것을 작품의 질적 문제로 접근하는 이들과는 함께할 수 없었다.
“2년간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결국 결과는 좋지 않았어.”
“그럼 피델리오는?”
“1814년에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올렸지. 여름이 되기 전이었는데, 대본을 수정했고 제목도 레오노레에서 피델리오로 고쳤어. 마지막이란 느 낌 이었지.”
“잠깐. 레오노레가 1805년에 만들 어졌는데? 9년 동안 포기 안 한 거야?”
“그럴 리가.”
포기할 리가 없다.
“엄청 끈질겼네.”
“그게 루트비히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지.”
차채은이 열심히 받아 적는다.
“케른트너토어. 케른트너토어. 합창도 거기서 연주되지 않았어?”
“ 맞아.”
이 녀석은 대체 공부를 얼마나 한건지 모르는 게 없다.
“엄청 고생했네. 조금 의외다.”
“지금이었으면 그런 과정 안 거쳤을 거야.”
“그건 어떻게 알아?”
“정상적인 상황에서 경제적 문제 때문에 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데, 루트비히가 실패할 리 없으니까.”
암. 그렇고말고.
* * *
“설명이 좀 되었나요?”
“네, 감사합니다.”
피델리오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들은 엑스 트랄라와 학생들이 고 개를 끄덕였다.
“베토벤하면 항상 성공만 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네.”
“그러게. 전에 바흐나 모차르트 이야기도 그렇고. 당시에는 생각보다 대단하진 않았나 봐.”
“근데 피델리오가 뭔 내용이야?”
“야, 넌 음대 다닌다면서 그것도 모르냐?”
“모를 수도 있지. 그럼 넌 아냐?”
“남편 구하러 남장하고 교도소 잠입하는 내용이잖아.”
“어…… 재밌겠는데?”
배도빈의 강의로 베를린 대학 학생들 사이에서 피델리오에 대한 관심 이 생겨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