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74화 (37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74화

    81. 큰북, 작은북⑶

    보안 직원들이 남자를 끌고 가는 도중 멀핀이 괜한 말을 했다.

    “이런 일로 신경 쓰게 해드려 죄송 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조금 별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이다.

    방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쿵 _

    순간 육중한 소리가 나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뭔가를 쏟았다.

    “이거 놔요!”

    남자는 보안 직원들의 팔을 뿌리치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허겁 지겁 종이를 모았는데, 어찌나 많은 지 처음 들었던 큰 소리가 납득되었다.

    복도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

    뭔가 싶어 살피니 악보다.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악보를 넘기자 그가 다시 한번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금 당황스럽다.

    “한 번만, 한 번만이라도 봐줘. 부탁해.”

    말처럼 생긴 남자가 악보 뭉치를 뻗었다.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절박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 무 릎 꿇고 고개를 숙인 이를 무시할 순 없었다.

    그리고.

    ‘ 많아.’

    오케스트라 총보.

    보지 못했던 곡들이다.

    “이거 당신이 만든 겁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전부?”

    다시 한번.

    일어나 보안 직원에게 지시했다.

    “이 사람 접견실로 안내해 주세요.” 남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 보스?”

    “ 괜찮아요.”

    멀핀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아마 괜찮을 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자작곡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인 듯하다.

    베를린까지 찾아와서 끌려가는 도 중에 악보를 떨어뜨려, 엎드린 채 소중한 악보를 허겁지겁 모으는 행 동과 방대한 분량의 악보.

    절실해 보인다.

    잠시 후.

    접견실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자 신을 타마키 히로시라고 소개한 남자를 살펴보았다.

    긴장한 듯하면서도 각오를 다진 분 위기를 보곤 악보를 들었다.

    간절했던 언행대로 공들였다는 느 낌을 이곳저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 곡은 음울한 분위기로 시 작하는 F 단조.

    고전 양식을 갖추었지만 짧고 돌출 되는 부분이 많아 낭만과 고전의 경 계선에서 만들어진 느낌이다.

    무난하지만 도리어 너무 무난하여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3화음에 딸림7화음 두 개. 무슨 의도죠?”

    논리적으로는 빈틈없는 구성이지만 작곡을 하는 사람에게 의도가 명확 하지 않은 음계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그걸 로 끝.

    더 이상 살펴볼 필요 없다.

    ‘대부분 그러니까.’

    지망생은커녕 프로 중에서도 적당히, 무난히 들을 만한 소리를 나열 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타마키 히로시는 곧장 대답했다.

    “뒤에 나올 바이올린의 포르테를 강조하려 했어. 가장 익숙한 화성으로 안심시키고 심상의 반전을 주려고.”

    “반전을 주려는 이유는?”

    “평범한 화음도 달리 들어주길 바랐으니까.”

    ‘이놈 봐라.’

    평범한 곡이 새롭게 들리길 바랐다 고 말하는 26세, 말뼈다구, 소가 핥 아준 듯한 머리, 일본인, 작곡가 지 망생 타마키를 계속 바라보다가.

    “아.”

    생각났다.

    “말뼈다귀.”

    “어?”

    저 드라마틱한 헤어스타일과 말상 얼굴을 보고 있자니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깝죽대던 녀석이 떠올랐다.

    나카무라에게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고 녀석을 스폰하던 도요토미란 원숭이 때문에 크게 좌절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용케 힘을 낸 모양 이다.

    “누군가 했더니 그때 그 젖먹이였어.”

    “기억해 준 건 기쁜데 그래도 7살 이나 많은데 젖먹이는 좀 심하지 않냐.”

    7살이 아니라 51살 차이다.

    똑똑 ~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가 나 대답하니 멀핀이 보안 직원들과 함께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벌써 3시간이나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악보가 워낙 많다 보니 시간이 벌 써 그렇게 흐른 모양.

    걱정할 만하다.

    멀핀은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지 타 마키 히로시를 노려본다.

    슬슬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악보를 내려놓았다.

    “그래. 잘 봤어.”

    “어, 어땠어?”

    “노력했네.”

    길게 잡아도 10년.

    8〜9년 만에 프로 작곡가의 흉내라 도 냈다는 점은 대견한 일이다.

    단순히 곡을 만드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형식이란 틀 안에 자신을 담아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더군다나 수십 개의 악기를 다뤄야 하는 오케스트라 총보.

    재능을 떠나 피나는 노력 없인 불가능하다.

    녀석이 우물쭈물한다.

    “뭔데.”

    “구인 공고를 봤어.”

    한 번 이야기를 꺼내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 토로하기 시작했다.

    “모집 분야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보조자라도 좋아. 네가 일이 많은 것도 알아.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라면 단 하나도 빠짐없이 분석했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 대신 확신을 담은 눈빛을 곧게 보냈다.

    ‘배짱은 마음에 들지만.’

    확인할 게 몇 더 있다.

    “이유는?”

    “언젠가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내 곡을 연주해 줬으면 해. 배도빈이

    지휘하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무대를 보고 싶어.”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자신의 곡을 연주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알 것 같다.

    “우리가 네 곡을 연주해야 할 이유 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다르다.

    “수많은 음악가가 남긴 명곡이 있고 내가 만든 곡이 있음에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네 곡을 연주할 이유를 말해봐.”

    분명 노력은 가상하다.

    기본에 충실한 악보만 봐도 녀석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음악을 연주할 이유가 될 순 없다.

    그러지 않아도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에는 나와 푸르트벵글러가 매년 신곡을 내고 있고.

    프란츠가 이대로 잘 성장한다는 조건이지만 몇 년 뒤에는 녀석의 곡도 밴드를 통해 올릴 예정이다.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작곡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지금은…… 없어.”

    “잘 알고 있네.”

    머리가 안 돌아가는 녀석은 아닌 모양.

    허튼 대답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이유를 만들 거야. 그때까지, 적어도 그때까지 곁에서 돕게 해줘. 무슨 일이라도 좋아. 어차피 악보 다루는 사람 필요 하잖아? 네 습관이라면 모두 기억하 고 있어.”

    타마키 히로시가 또 한 무더기의 악보를 꺼냈다.

    위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했던 곡을 분석한 악보들이다.

    미련스러운 공부법이다.

    그러나 이런 녀석은 싫지 않다.

    “좋아.”

    “그럼!”

    “하지만 난 보조자를 두지 않아.”

    어렸을 때 영화 작업을 할 때도, 게임 음악 감독을 할 때도 그랬지만 내 곡을 남에게 맡길 리 없다.

    이 녀석이 베를린 필하모닉과 일하고 싶고 내게서 뭔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인지했고.

    또 그 능력도 인정해 줄 만하지만 딱히 빈자리가 없다.

    “멀핀, 이 사람 일할 만한 곳이 어디죠?”

    “그렇게 말씀하셔도……

    멀핀이 곤란해 하고 있는데 타마키 히로시가 눈치 빠르게 이력서를 꺼 냈다.

    역시 공연 준비에 있어서는 모든 걸 혼자 처리하는 나나 푸르트벵글러에게는 필요치 않다.

    그나마 있는 일도 악장들이 맡아주 고 있고, 타마키 히로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듯하다.

    “역시 작곡가로서는 함께하기 힘든건가.”

    “그래.”

    이 녀석이 아니라 다른 어떤 작곡 가가 오더라도 지금의 베를린 필하모닉에 어울릴 순 없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 타악 교실에 반주자가 다음 달부터 못 나온다고 했습니다.”

    마침 멀핀이 그나마 빈자리를 말해 주었는데, 타마키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사고 당했다고 들었는데 어때?”

    “반주 정도라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잠시 기다려주었다.

    아마 좀 더 자신을 어필하고 싶겠지.

    그러나 녀석은 그러한 마음을 감추 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게 해줘. 아니.”

    녀석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떼며 고개를 숙인다.

    “부탁드립니다, 배도빈 악단주.”

    그간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

    망아지 같았던 녀석이 어느덧 훌륭 한 말이 되어 나타났다.

    어머니께.

    그간 연락드리지 못해 걱정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타악 교실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었어요.

    비록 바라던 형태는 아니지만 이곳에 있으면 배도빈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을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게도 기회가 오겠죠.

    그때를 위해서 지금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시작점에 선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잘못된 방법으로 활 동했고 3년 전에는 계속된 실패 끝에 도요토미 류토의 대필 제안에도 흔들렸었죠.

    그렇게라도 제 곡을 발표하고 싶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잘못을 반복 할 생각이냐며 꾸짖어주셨습니다.

    네, 어머니.

    이제 요행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한 걸음씩 내디뎌 바른 길로 걸 어가겠습니다.

    배도빈처럼요.

    어린이 타악 교실은 생각보다 즐 겁습니다. 아이들은 밝고 교육자들은 전문적입니다. 아이들이 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커 리큘럼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비자와 거처 문제를 해결하면서 교육 내용을 공부해야 해서 요 며칠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강의는 매일 3팀씩 맡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업무 강도가 강하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저도 동심으로 돌아간 듯 합니다.

    이중에서 눈에 띄는 아이는 산타 웨인이라는 16살 아이입니다.

    어린이는 아니죠.

    행동이 어수룩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지만 집중력과 박자 감각은 무척이나 뛰어납니다.

    이곳에 있는 아이 증에 유일하게 제 반주에 맞춰 큰북을 칩니다.

    그것만으로도 녀석은 행복한지 항상 웃고 있습니다.

    산타 웨인을 보고 있으면 처음 피아노를 배웠을 때가 생각납니다.

    나도 저렇게 순수하게 음악을 좋아했던 때도 있었는데, 하고 옛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평온해집니다.

    다음 주에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준비한 피델리오가 초연됩니다.

    배도빈이 연습을 참관할 수 있게 해주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곤 했습니다만, 정말 그가 왜 신으로 추앙받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그날 이후 항상 걱정만 끼치는 아들이었지만 비로소 제 길을 찾은 듯합니다.

    부디 심려치 마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추신.

    베를린 필하모닉의 숙소는 훌륭 합니다. 8평의 개인실이 주어지고 식당에는 항상 음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인도와 영국, 일본, 한 국의 카레가 종류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께도 숙소를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들 타마키 히로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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