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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73화 (37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73화

    81. 큰북, 작은북⑵

    며칠이 지나고.

    그레이 웨인은 베를린의 여러 복지 센터를 알아보았지만 아들을 믿고 맡길 만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질 나쁜 보육사로부터 산타가 학대 당하는 영상을 확인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곤 하지만 산 타가 겪은 상처가 씻기는 건 아니었기에 그레이 웨인의 불신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 후 몇년째.

    정규 교육 과정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감당하던 그레이 웨인은 점점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는 날로 성장하는 산타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가끔 산타가 말썽을 부린 날이면 시어머니의 몸 이곳저곳에 멍이 나 있었고.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딸 죠엘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안타까웠다.

    대학 4년간 단 한 번의 장학금도 놓치지 않았던 죠엘이 좀 더 본인을 위해 살기를 바랐다.

    동생을 지극히 아끼고 학교생활에 충실한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알 게 모르게 부담을 느낄 터이기에 미 안할 뿐이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졌고.

    그레이 웨인도 결심을 내렸다.

    ‘적어도 내가 없을 때 산타가 있을 곳이 필요해.’

    그레이 웨인은 다시 한번 커뮤니티 사이트와 SNS를 통해 복지센터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깨가 뻐근하여 일어난 그레이 웨 인은 시간을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시계는 벌써 밤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레이 웨인이 2층 거실로 나섰다.

    산타의 방에서는 살짝 열린 문을 통해 여러 빛과 음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미 잠들었을 시간.

    잠들기 전에는 항상 곁을 지켜줘야 만 했는데 오늘은 혼자 잠든 모양이었다.

    그레이 웨인은 최근 들어 조금씩 나아지는 아들을 기특하게 여기며,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가갔다.

    “헤헷

    잠들기는커녕 웃으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발트뷰네 음악회 영상을 보고 있는 산타 웨인.

    그레이 웨인은 아들 곁으로 다가갔다.

    “이거 보느라 엄마도 안 찾았구나?”

    “응.”

    베를린 필하모닉, 특히 배도빈이 지휘하는 연주를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 누나 죠엘은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에 가입.

    산타 웨인이 조작하지 않아도 영상을 이어서 볼 수 있도록 설정해 두었는데, 그러자니 몇 시간이고 계속 보게 되어 걱정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자고 내 일 또 보자.”

    “더, 더.”

    “응?”

    “더 흐. 보고 싶어. 힛."

    아들이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한 것 은 정말 오랜만이라 그레이 웨인은 내일을 걱정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만 마저 보고 코 자자?”

    산타 웨인은 대답도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곤 다시 영상을 보았다.

    다음 날.

    아들 방에서 잠들었던 그레이 웨인 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서둘러 주 방으로 내려갔다.

    “좋은 아침.”

    “죠엘.”

    “산타랑 둘이서만 같이 자기 있어요? 질투 나게.”

    그녀는 식탁에 놓인 구운 빵과 에 그 스크램블 그리고 산타가 좋아하는 블루베리를 보곤 미소 지었다.

    며칠 전까지 시험을 치르느라 피곤 했을 텐데 이렇게 도와주니 너무나 기특하고 고마웠다.

    “커피 드실래요?”

    “응. 고마워.”

    모녀가 나란히 앉아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저 이력서 좀 내보려 해요.”

    “ 벌써?”

    “네. 졸업 후에 시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아서요.”

    “하고 싶은 공부 더 해도 돼. 놀러 다니는 것도 공부야.”

    충분한 경제력이 있었기에 그레이 웨인은 재능 있는 딸이 곧장 일을 하는 것보다 좀 더 많은 경험을 하 길 바랐다.

    그러나 죠엘 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공부를 더 하면 좋겠지만, 어차피 시작할 거면 빠른 게 나은 것 같아요.”

    죠엘 웨인은 계속 학교 공부만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다면 직접 뛰어들어 업계에서 경험을 쌓아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또 좋은 기회를 제안 받아서요.”

    딸의 기쁜 소식에 그레이 웨인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무슨?”

    “이자벨 멀핀 씨라고 산타 일로 몇 번 만났었잖아요. 베를린 필하모닉 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고 하시더라고요. 당장은 아르바이트지만.”

    뜻밖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언급한 적이 없었던 탓에 딸이 그곳에 관심을 가지 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고맙기는 해도.”

    엄마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이해하 고 있는 죠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몰랐어요. 산타랑 같이 영상 보면서 알게 된 건데, 베를린 필하모닉이 하는 일들이 멋져 보이더라 고요.”

    그레이 웨인이 잠자코 딸의 말을 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산타도 들을 수 있는 공 연을 마련해 줘서 너무 고마웠는데, 한 아이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알아 보니까 원래 그랬던 것 같아요. 모 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려고.”

    죠엘 웨인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 난 발자취를 좇으며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깊이 감화 되었다.

    2010년 유니세프 아이티 지진 긴 급 구호를 위한 자선 음악회.

    2016년 난민과 조력자를 위한 특 별 음악회.

    2022년부터 해년마다 개최되는 자 선 연주회 ‘배도빈 음악회’ 등은 물 론이고.

    클래식뿐만 아니라 대중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발트뷰네(Wald bühne) 연주회,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타악 교실, 아이들을 위한 실내 공연,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에 더해.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 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설립된 베를린 대학 음대에 대한 지원.

    또 샛별 엔터테인먼트, 도빈 재단 과 협력해 국가를 불문하고 여러 지 역에 음악 학교를 설립해 교육 혜택을 전파하는 일까지.

    죠엘 웨인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 고 큰 회사에서 일하기보다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은 곳에서 함께하 고 싶었다.

    “정말 멋진 곳이네.”

    그레이 웨인도 딸의 설명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타에게 너무나 멋진 취미를 갖게 해준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는데.

    딸이 원해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저도 좀 알아봤는데.”

    “산타, 베를린 필하모닉 어린이 타악 교실에 보내는 건 어때요?”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아들을 공부하는 곳에 보내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레이 웨인은 걱정부터 앞 섰다.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알잖아. 또 공부하는 다른 아이 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클래스가 따로 있대요.”

    죠엘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정서 발달이 더딘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레이 웨인이 그것을 살피는 동안 죠엘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산타가 뭐 좋아하는 거 처음이잖아요. 배우기도 하면서 정서 안정에 도움도 된다고 하니 좋을 것 같아요.”

    딸의 설득에 그레이는 조금씩 마음 이 이끌렸다.

    “들어가기 전에 면담도 진행한다고 하니 판단은 그쪽에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레이 웨인은 순간 거절당했을 때 산타 웨인이 얼마나 슬퍼할지 떠올렸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걱정해서 감 싸기만 해서는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에 마음을 굳 혔다.

    “그래. 한번 알아볼게.”

    “ 네.”

    일주일에 두 번.

    크리스틴 지메르만과 함께 악보를 공부하던 최지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창을 투과해 내리는 햇빛이 너무나 강렬해 눈을 찌푸렸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별장은 공원 가 가까워 산책하고 있는 사람과 한 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평온.

    철이 들 무렵부터 쉬지 않고 달렸던 최지훈에게는 익숙지 않은 분위 기였다.

    달칵-

    방으로 들어선 크리스틴 지메르만 은 창문 가까이 서 있는 최지훈을 보곤 차를 내려놓았다.

    “불안한가요?”

    “ 아.”

    최지훈은 돌아서 차를 따르는 스승을 보았다.

    아로니아와 사과를 혼합한 크리스 틴 지메르만의 특제 차향은 언제 맡아도 기분을 편하게 해주었다.

    “아뇨. 도빈이가 자리를 지켜주고 있거든요.”

    최지훈의 표정이 어둡지 않아 지메르만은 빙그레 웃었다.

    “멋진 형제애네요.”

    “아, 감사합니다.”

    스승으로부터 차를 건네받은 최지훈이 인사하곤 찻잔을 감쌌다.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으음. ……심심하다?”

    의외의 대답에 지메르만이 눈을 평 소보다 크게 뜨고 최지훈을 유심히 살폈다.

    “재활도 열심히 받고 있고 선생님 이랑 악보 공부하는 것도 재밌지만 그 외 시간에 뭘 해야 좋을지 모르

    겠어요.”

    남는 시간은 모두 피아노를 연주하는 데 보냈던 최지훈은 아주 기초적 인 단계의 금단 현상을 겪고 있었다.

    최지훈과 같은 상황을 겪었던 지메 르만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죠.”

    악보를 분석하는 일에 매달렸던 지 메르만은 최지훈에게도 같은 일을 제안했었다.

    다만 그 행위가 최지훈에게도 위로

    가 되지는 않았기에 함께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전혀 다른 일은 어떤가요. 미술이 라든지 문학도 도움이 될 거예요.”

    “아……. 비슷한 걸 하고 있어요.”

    최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멋지네요.”

    지메르만의 고상한 제안에 최지훈 은 패션 잡지를 보는 곳이 괜히 쑥 스러워졌다.

    “스포츠도 좋겠네요. 손에 무리가 안 가는 쪽으로. 몸이 지치면 기본 적인 욕구가 우선시 되니까요.”

    “음..."

    생각을 이어가던 최지훈이 조심스 레 물었다.

    “사실 곡을 써 보고 싶어요.”

    지메르만의 얼굴에 이채가 돌았다.

    “악보 보면서 이렇게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수정하 다 보니 해볼까 싶기도 했고요.”

    “좋은 일이네요. 연주하고 싶은 걸 적어 보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작곡 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최지훈이 지메르만의 차를 마셨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느슨한 양식에 맞춰 써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왈츠는 어떤가요.”

    4분의 3박자의 춤곡을 떠올린 최지훈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보스, 타마키 히로시라는 분이 방 문하셨습니다. 어디로 안내할까요?”

    구인 공고를 올리고 며칠 뒤.

    수석과 악장단이 선별한 이력서를 검토하고 있는데 멀핀이 문을 두드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누군데요?”

    누구냐고 묻자 멀핀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친구 분 아니신가요?”

    두 손을 들곤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당당히 친구라서 하여 확인 이 미흡했습니다. 쫓아내겠습니다.”

    “네.”

    지인이라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종 종 있었는데 연기력이 정말 좋은 사람인 듯.

    멀핀을 속일 정도면 훌륭한 배우가 될 자질을 가졌을 것 같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적당히 타일 러서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다.

    다시 이력서를 들여다보는데 밖이 조금 소란스럽다.

    “정말입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만 나게 해주세요! 얼굴을 보면 기억할 거예요!”

    이상해서 나가보니 복도 끝에서 여 러 사람이 실랑이 중이다.

    보안 직원 둘이 그를 막아서고 있고 이자벨 멀핀은 경고하고 있었다.

    “이 이상 소란 피우시면 경찰을 부를 거예요.”

    유별난 친구구만.

    그러려니 하면서 방으로 들어가려 니 남자가 크게 외쳤다.

    “배도빈! 나야! 타마키 히로시! 한 번만, 한 번만 만나줘! 제발!”

    누가 들으면 정말 아는 사이인데 무시당하고 있는 사람 같다.

    내가 들어도 그러해서 다가가자 침을 삼킨다.

    “죄송합니다, 보스. 지금 내보내겠습니다.”

    보안 직원들이 남자의 팔을 잡고는 고개를 숙여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이거 봐요!”

    남자가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는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누구시죠?”

    잠깐의 정적 후.

    보안 직원들이 험한 인상으로 말처럼 생긴 남자를 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 잠깐만요! 우으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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