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71화
80. 그는 사실 완벽을 바라지 않는 다 (3)
“형이랑 학교 가는 거 오랜만이다.”
도진이가 베실베실 웃는다.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
“그러게. 요즘은 무슨 공부 하고 있어?”
어머니와 도진이에게 종종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매번 달라지는데다 이해할 수도 없어 자꾸만 묻게 된다.
“선형대수학이랑 공학수학.”
이번에도 마찬가지.
그래도 귀엽다.
“근데 요즘은 분자생물학 공부하고 싶어. 전과할래.”
그게 뭐냐고 물어봤자 도진이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어쩌다가?”
“푸르트벵글러 할아버지 머리카락 고쳐줄 거야.”
“그게 돼?”
“몰라.”
고개를 저은 도진이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거니까 도전하는 거라는 기특한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건 좋은 일이다.
“머리카락이 풍성한 푸르트벵글러는 상상이 안 되는데.”
“그치! 궁금하지!”
웃으며 도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빠이빠이!”
대학에 도착했다.
집사와 함께 씩씩하게 걸어가는 도 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얼마 안 남았을 텐데.’
시간을 확인하니 강의 시작까지 10 분 정도 남았다.
관리실 옆으로 가 찰스 브라움이 알려준 건물을 찾았다.
‘음대 건물이 아니라 찾기 힘드네.’
지도를 보니 어디로 가야 하는 건 지는 알 것 같은데 잘 다니지 않은 곳이라 조금은 헤맬 것 같다.
일단 방향을 정하고 걷기 시작.
발을 재촉했다.
“야, 야, 저기 좀 봐.”
“맙소사. 배도빈이잖아.”
“우리 학교 다닌다는 게 사실이었어?” 항상 그렇듯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나 실물 처음 봐.”
“잘생겼는데?”
“ 작아.”
“TV에서 보는 것보단 안 작아 보이는데?”
“조금 컸나?”
다들 할 일이 없는지 뒤따라오는데 멈춰서 돌아보니 언제 모였는지 수 백 명은 되어 보였다.
‘뭐야.’
종강 직전이라 사람이 몇 없을 줄 알았는데 조금 놀랐다.
“마에스트로! 팬이에요!”
그중 한 남자가 소리치자 수군수군 대던 대학생들이 용기를 얻었는지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다들 한 체격씩 해서 위협적이다.
“사진 찍어줄 수 있으신가요?”
“저 베를린 필하모닉 팬이에요! 엄 마도 할머니도 팬이에요!”
“사인 좀 해주세요!”
“사랑해요!”
남자고 여자고 덩치 큰 꼬맹이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드니 그리 좋지 않다.
그래도 친절히 대해야 하겠지만 여 기서 발목이 잡혔다간 강의에 늦고 만다.
“약속이 있어 서둘러야 해요.”
“무슨 약속이요? 혹시 찰스 브라움 교수님하고 만나시는 거예요?”
“봐봐! 눈이 안 찢어졌어!”
헛소리한 놈의 눈을 찢어버리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음악사 강의를 해주었던 프란츠 게 르그 교수다.
“네.”
-오오. 자네 지금 어딘가?
“중앙 계단이요. 강의실로 가는 중이에요.”
-오. 그래. 그래. 지금 곧 그리 갈테니 기다리게.
안내를 해주려는 모양.
그럴 필요까진 없지만 해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을 듯해 알겠다고 답했다.
통화를 마치고는 시선을 돌렸다.
눈을 째주려고 방금 짖었던 개를 찾았는데 온몸에 여러 발자국이 새겨진 채 바닥에 너부러져 있다.
고개를 드니 건장한 학생들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친 칭찬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훌륭한 청년들이다.
“저도. 저도요!”
“어떡해! 나 손 잡았어!”
“우홋! 우홋!”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어울렸다.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도 해주고 있자니 계단 위에서 중장년들 한무리 가 뒤뚱뒤뚱 걸어 내려왔다.
‘왜 이렇게 많이 나왔어?’
족히 50명은 되어 보인다.
“총장님, 저기 있습니다!”
프란츠 게르그 교수 옆에 배가 튀 어나온 남자가 총장인 모양.
입학식 때 본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다.
그와 함께 온 교직원들이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왔다.
“오오오! 도빈 학생, 아니. 배 교수! 그간 잘 지냈는가!”
그러곤 내 손을 덥석 잡더니 헛소리를 해댄다.
오늘 여러모로 불쾌해지고 있다.
“교수 아닙니다.”
“하하하하! 이거 내가 실례했구만. 미안하네. 배 교수. 너무 반가워 그 랬지.”
남의 말은 안 듣는 인간 같다.
길 안내를 해주려는 줄 알았더니 이 인간은 한술 더 떠 기억도 안 나는 첫 만남을 언급하며 사진을 찍 어 댔다.
몹시 불쾌해 프란츠 게르그 교수를 보니 딴청을 부린다.
“게르그 교수님, 강의실로 안내 부탁드릴게요.”
“오오. 게르그 교수, 뭐 하고 있는가. 어서 갑시다. 배 교수가 이렇게 나 의욕을 보이는데!”
찰스의 부탁만 아니었으면 당장 돌아갔을 것이다.
교직원과 학생 무리에 떠밀려 계단을 오르자 중앙 정원부터 내 이름과 사진이 포스터처럼 줄지어 걸린 캠 퍼스를 볼 수 있었다.
‘카펫은 왜 깔아 놓은 거야?’
몇 번 안면이 있는 음대생들이 양 쪽으로 나뉘어 길을 튼 채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난리도 생난리가 따로 없다.
총장의 짓인지 프란츠 게르그 교수의 짓인지 몰라도 우선 찰스는 가만 안 놔둘 테다.
앞으로 한 달간 강의할 곳은 일반 강의실이 아니었다.
대예배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쓴다는 말에 불안했거늘.
아니나 다를까 3층으로 나뉘어진 예배실을 확인하곤 두통이 밀려들었다.
어이가 없어 밖을 확인하니 못해도 1,000석은 넘는 자리가 빠짐없이 차 있다.
음대생을 대상으로 한 방학 특강 수준이 아니다.
뒤늦게 온 찰스 브라움을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였다.
“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더군. 수강 인원 늘리라는 요청 이 자꾸. 억!”
엉덩이를 차버리니 그가 헛소리를 멈췄다.
오늘 말 같지 않은 말을 너무 많이 들어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조금 은 풀린 것 같다.
“무슨 짓이야!”
넘어진 찰스가 성을 냈지만, 이미 강의 시작 시간을 훌쩍 넘긴 탓에 더는 지연시킬 수 없다.
한 번 더 차주고 싶었지만 무대로 나섰다.
“배도빈! 배도빈!”
“이야아아아!”
“꺄악!”
강의가 아니라 꼭 리사이틀을 연 기분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관련한 일로 강의 준비를 제대로 못 했는데, 이 똘망똘망한 눈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부담스럽다.
1학기 말부터 방학까지 한 달간 그 소중한 시간을 내 강의에 투자한 꼬맹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지금도 확신이 없다.
차라리 학과라도 정해져 있으면 모를까.
바라는 것도, 가진 바 재능도, 원 하는 것도 모두 다른 천 명의 학생 들에게 대체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 지 혼란스럽다.
강의 준비 시간조차 없이, 최소한 의 정보도 없이 날치기로 일을 처리 한 베를린 대학과 찰스에게 정식으로 욕을 퍼부어줘야겠다.
그러나 그것도 강의 뒤의 일.
저들의 소중한 시간을 망치고 싶진 않아 그나마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 내고자 마음먹었다.
학생들을 둘러보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우렁찬 대답에 내심 놀라고 있다가 나카무라 료코를 보곤 정말 놀랐다.
여긴 왜 왔냐고 묻고 싶은 걸 참 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위대한 음악가에 대해 알 아보고자 합니다. 그런 후 여러분이 궁금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네!”
지난 수십 년간 받아온 지나친 관심보다 이 수업이 더 민망하다.
“음악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를 바로크라 합니다. 악보를 적는 방법이 고안되었고 12선법이 정립 되었죠.”
학생들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데 다들 눈이 뭔가 비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화성이 만들어졌죠.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바흐요!”
열정적인 학생들이다.
그러나 저 눈들이 마치 ‘다 알고 있는 이야기 하지 말고 재밌는 거 말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위대한 내 이야기를 90분 정도 짧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생 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좋습니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교양은 갖추고 계신 듯하니 몇 사람의 질문을 받고 강의 방향을 잡아보 죠.”
순식간에 수백 명이 팔을 들었다.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학생을 지목하니 벌떡 일어났다.
“자, 자, 자, 자, 작곡과 3학년 양 쉔입니다. 마에스트로를 뵈어 영광 입니다.”
예의바른 친구가 떨지 않고 편하게 질문할 수 있도록 손을 펴보였다.
“저는 찰스 브라움을 가장 좋아하 는데요. 아! 그, 그게 바이올린 협주 곡이요. 무, 물론 마에스트로의 모든 곡을 좋아하지만.”
진정 좀 했으면 좋겠다.
“찰스 브라움을 작곡하실 때 찰스 브라움 교수님의 어떤 점을 생각하셨는지 구, 궁금합니다.”
예상과는 다른 질문이다.
화성 배치는 어떻게 하는지, 형식 은 어떻게 비트는지 같은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추상적인 개념이라 대 답하기 어렵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단어로 나열 하자면 나르시즘, 찌질함, 상냥함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잠깐의 정적 이후 또다시 질문자가 생겼다.
이번에는 피둥피둥한 학생을 지목했다.
“피아노과 4학년 로맹 아도르입니다. 최근 퀸 엘리자베스 파이널 라운드 과제곡으로 작곡하신 A108 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계 사이의 간격이 넓어 해석의 여지가 많은데, 혹시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연주된 A108에 만 족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질문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묻는 형식을 빌렸을 뿐이다.
“로맹 아도르 학생은 만족 못 하신 것 같네요.”
“네. 그 곡이 발표된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 연주 했습니다만 콩쿠르에서의 연주도, 제 연주에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건요?”
“완성된 A108을 듣고 싶습니다.”
고민하다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조교에게 물었다.
“피아노 준비가 될까요?”
환호와 박수 소리 때문에 조교의 대답이 묻혔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나가는 걸 보니 가능한 모양 이다.
잠시 후.
어찌나 서둘렀는지 몇몇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무대에 피아노를 끌어 다 놓았다.
“조, 조율은 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아노 앞에 앉으니 다소 웅성대던 예배당이 고요해졌다.
최지훈에게 헌정하려던 ‘A108’의 카덴차를 연주한 뒤 건반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학생들은 차분하지만 마음이 담긴 박수를 보냈다.
손을 들어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로맹 아도르를 지목했다.
“만족했나요?”
“네. 정말 완벽했습니다. 그 이상의 연주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뇨.”
그에게서 시선을 떼 학생들을 둘러 보았다.
천천히 걸으며 최대한 많은 이와 교감하려 노력했다.
“A108은 가능성의 곡입니다. 연주 하는 사람과 기량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죠.”
일부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앞으로 일주일간 A108을 연주하기 위해 준비한다면, 지금보다 뛰어난 연주를 해낼 겁니다. 1년 뒤 에 연주한다면 또 다른 멋을 내겠죠.”
이야기를 이어나가니 이제는 다들 납득하는 듯하다.
“비단 A108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대에 오르는 이상, 우리는 그 순간의 최선을 해내려 합니다. 그건 여러분이 시험을 볼 때와 마찬가지예요.”
나카무라 료코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보다 배는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선 음악이 이렇게 변화하고 발전할 순 없었을 겁니다. 개인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로맹 아도르를 보았다.
“만족하지 마세요. 단 한 번의 연주를 맹신하는 것만큼 당신의 재능을 막아서는 벽은 없습니다. 완벽해 지려고 발버둥치세요. 그 과정에서 작은 만족을 얻었다고 해서 멈추지 마세요. 당신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다시 피아노에 앉아 방금 연주했던 A108의 카덴차를 다시 연주했다.
“완벽한 곡과 완벽한 연주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그것을 얻는다 해도 저는 그보다 나 은 음악을 하려 할 겁니다. 다른 음악을 할 겁니다.”
음악을 말하지만 인생관 강의가 된 듯하다.
“완벽을 인정하는 순간 한계도 인 정하게 됩니다. 로맹 아도르 학생.”
“네.”
“음악에 절대성을 부여하려 하지 마세요. 음악은 음악가와 듣는 사람 의 소통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답을 마치자 한 학생이 소 리 쳤다.
“마에스트로는 완벽하신데요!”
“하하하하!”
지금까지 내 설명을 대체 뭐로 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이 뭐죠?”
“철학과 3학년 힐스 바우어입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답게 통찰력 이 있군요. 지각 1회 면제권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