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70화 (37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70화

    80.    그는 사실 완벽을 바라지 않는 다 (2)

    진수식과 정기 연주회를 연달아 치른 주말.

    일요일 연주회만큼은 케르바 슈타 인에게 맡기고 쉬기로 정했다.

    덕분에 늘어지게 잤는데 시계를 보 니 11시 30분.

    충분히 잤음에도 피곤이 남았는지 몸이 무겁다.

    허기가 느껴져 대충 배를 채우고 다시 잘 생각으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있어선 안 될 녀석이 앉아 있다.

    “1년 만의 재회로군, 마왕이여.”

    잠이 아직 덜 깬 모양.

    녀석이 한국말을 한다.

    그대로 지나쳐 부엌으로 향하자 진달래가 오징어와 야채를 썰고 있었다.

    가스레인지에는 프라이팬이 두 개 올려져 있었는데 한쪽에는 기름이 끓고 있다.

    아직도 꿈인가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마셨더니 차갑다.

    진달래가 여전히 낑낑대고 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식당 쪽으로 나 있는 문을 보았다.

    닫혀 있는 문 너머의 정신병자가 정말일 줄이야.

    “쟤 뭐야.”

    “내일 LA로 돌아간대서.”

    “지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둘이 왜 그렇게 싫어해? 좀 친하게 지내봐.”

    내쫓으려다가 이 녀석이 월세를 내기 시작한 걸 떠올렸다.

    “주방장님은?”

    “장 보러 나가셨어. 돌아오시려면 꽤 걸릴걸.”

    진달래가 손질한 오징어를 키친 타올로 감싸 물기를 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배가 더욱 고파졌다.

    “먹을 거 없어?”

    “기다려 봐.”

    소금과 후추를 뿌리곤 밑간이 된 오징어를 반죽에 적신다.

    그것을 끓는 기름에 하나씩 넣으니 이내 맛있는 냄새가 났다.

    카레에 넣어 곁들어 먹으면 훌륭한 해물 카레가 될 것 같다.

    “자, 가져가서 먹어. 둘이서 얘기도 좀 하고.”

    어쩔 수 없이 진달래가 만든 오징 어튀김을 들고 식당으로 돌아가니 녀석이 눈을 감은 채 요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소름 돋는다.

    “돌아왔군.”

    “말 걸지 마.”

    적당히 앉으니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진수식 공연은 인상적이었다. 괴 팍한 마왕치곤 여신의 매력을 제법 잘 이해하고 있더군.”

    더 피곤해진다.

    “그러나 자만하지 마라. 그녀가 부를 노래는 내가 만들 터. 덧없는 꿈과 같은 시간을 보내다간 뒤쳐질 것 이다.”

    “염병 떨지 말고 이거나 먹어.”

    오징어튀김을 본 녀석은 살짝 인상을 쓰곤 고개를 들었다.

    관심 없는 모양이다.

    “여신은 어디에 있지?”

    무시하고 오징어튀김을 집어 먹었다.

    “깜짝 놀라게 해준다며 자리를 비 운 지 꽤 되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의외로 맛이 제법이다.

    연거푸 먹으니 아리엘 녀석이 관심을 보였다.

    “묘한 냄새군. 무슨 요리지?”

    같이 먹으라고 준 거니 적당히 덜고 그릇을 밀어주었다.

    바삭한 감촉한 깊은 풍미를 느끼고 있는데, 녀석이 불평을 해댔다.

    “겉은 훌륭하지만 내용물의 식감이 그리 좋지 않군. 냄새도 묘하고. 3 점짜리야.”

    “기다렸지!”

    마침 진달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쟁반에 밥과 오징어볶음 그리고 반 찬을 들고 있었는데, 아리엘 얀스가 자기가 만든 오징어튀김을 먹고 있는 걸 보곤 눈을 빛냈다.

    “3점? 뭐가?”

    들어오면서 놈의 혹평을 들었는지 묻는다.

    행복한 얼굴이다.

    진달래의 요리를 폄하한 아리엘 얀 스가 얼마나 난감해할지 상상되어 흡족스럽다.

    “미슐랭 3스타급 요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정말?”

    속이 안 좋아져서 일어났다.

    “배고프다며! 먹고 가!”

    “배불러.”

    내 층으로 올라와 사카모토의 피아노 곡을 틀곤 거실에 누웠다.

    TV를 틀어도 볼 만한 것이 없어 적당히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고 졸 고 있는데, 문득 내 이름이 들렸다.

    음악 시사 프로그램인 것 같다.

    -요즘 또 화제가 되고 있는 일이 있죠. 베를린 필하모닉이 푸르트벵글러호 진수식에서 멋진 연주를 들 려 줬다고요.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죠. 왜 그런 건가요?

    -기존 클래식 공연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때문이겠죠. 아무래도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이 영향력이 강한 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니 걱정하는 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분위기라. 선곡도 특이했다 고 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곡을 연주했다지요? 아이나 그쪽에 취미를 둔 팬들은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하하. 제 아들도 좋아하더군요. 하지만 선곡보다는 공연 문화의 변 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일이었습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또는 비디오 게임에 사용되었던 곡을 연주하는 건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대중음악 공연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즐길 수 있을지 언정 감상에는 크게 방해가 되었죠.

    -그런 차이가 있었군요. 현재 가장 많이 사랑받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랬다면 조용한 관람 문화를 옹호 하는 입장에서는 걱정되겠습니다.

    -네. 하지만 공연 직후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기 연주회와 밴드 공연 이 별개로 진행될 거라고 밝히면서 논란도 잦아들었습니다. 정말 화제 가 되었던 일은 따로 있죠.

    -무슨 일인가요?

    -배도빈 악단주의 앙코르 공연이었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 번, 흔히 월광이라고 하죠.

    -그 곡이라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하. 네. 아마 대부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곡이죠.

    -어떤 곡인지 간단히 소개 부탁드 립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은 1801년에 완성되고 이듬해 줄리에 타 귀차르디에게 헌정되었습니다.

    ‘남의 사생활을 또.’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았다.

    -처음부터 월광이라 불리진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환상곡풍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작품 번호 27의 두 번 째 곡이죠. 월광이란 이름은 베토벤 사후, 독일의 시인 루트비히 렐슈타 프가 ‘달빛이 비추는 루체른 호수의 조각배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정말 그 말이 딱 어울리는 곡인 데, 배도빈 악단주의 연주가 유독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완벽하기 때문이죠. 지금껏 정말 많은 피아니스트가 셀 수 없을 만큼 연주한 곡이지만, 배도빈의 연주는 남달랐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연주 속도가 극단적으로 빠른 것 이 가장 큰 특징이겠죠. 아니, 정정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심상이 명확히 전달되는 점이 신기합니다.

    -빠르다고 하시면?

    -보통 연주 시간은 15분을 전후로 이루어지는데 배도빈의 연주는 13 분 17초. 1악장이 다른 피아니스트와 비슷한 걸 감안하면 그의 3악장 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문가라고 초빙된 남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걸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에 흡족스럽 게 듣고 있는데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말을 했다.

    -대단하다는 말씀이시네요.

    -정말 대단하죠. 완벽한 연주였습니다. 그 연주 이상 가는 월광은 없을 거라 감히 단언하겠습니다.

    기가 찰 노릇.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

    “그렇게 맛있었어?”

    진달래는 아리엘에게 오징어볶음의 위대함을 알려주기 위해 요 며칠간 요리 연습에 매진했다.

    마침내 솜씨를 발휘했고.

    아리엘이 그릇을 깔끔하게 비우 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훌륭했습니다. 지난 10년 중 가장 멋진 점심이었습니다.”

    “히힛

    두 사람이 차를 놓고 나란히 앉았다.

    진달래는 테이블에 팔을 얹고 그 위에 엎드렸는데, 고개만 아리엘을 향하고 있었다.

    “있지. 나 노래하길 진짜 잘했다고 생각해.”

    아리엘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 라보았다.

    “뭐랄까. 행복하다는 말로는 부족 해. 연습이 어렵긴 해도 즐겁고 무대가 떨리긴 해도 다시 오르고 싶어. 그 박수 계속 받고 싶어.”

    “이해합니다.”

    아리엘이 빙그레 웃으며 동조했다.

    “그치.”

    “언젠가는 제가 만든 곡도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 언젠가는?”

    진달래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안 돼? 나 아직 부족하지만 열심히 연습할게.”

    “저로서는 아직 그대의 매력을 온전히 표현할 곡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해.”

    진달래가 나무라듯 말했다.

    “……질투했습니다.”

    완벽한 남자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번 공연 때 당신은 정말 빛났습니다. 그리고 마왕과 베를린 필하모닉은 제가 몰랐던 당신의 매력을 이 해하고 있었죠. 분했습니다.”

    그의 말이 너무 갑작스러워 진달래는 혼란스러웠다.

    너무나 행복한 기억이었는데, 아리 엘에게는 안 좋았다고 하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Let me up을 들으며 생각 했습니다. 일어나라고, 내버려두라고 하는 말들이 응원해 주었죠. 지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핀……

    “다들 힘을 얻었을 겁니다.”

    그가 거짓말은 조금도 못 하는 걸 알기에, 진달래는 다행이라 생각하 면서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지금은 그 무대를 이뤘던 모든 이 에게 고맙습니다. 저열한 감정에 매 몰되지 않도록 훌륭한 공연을 해주었으니까요. 베를린 필하모닉은 멋 진 오케스트라입니다.”

    진달래가 비로소 웃으며 아리엘 얀 스의 볼을 쿡쿡 찔렀다.

    “난 봄의 여신이 제일 좋아.”

    “최고의 찬사로군요.”

    “응. 다른 사람들도 완벽한 곡이라 고 하잖아.”

    아리엘 얀스가 웃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곡을 만들 겁니다.”

    진달래는 자신의 꿈을 말하는, 그 행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아리 엘이 좋았다.

    그가 계속 말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졌다.

    “더? 그렇게나 대단한 곡인데?”

    “완벽하다는 말은 듣지만. 또 완벽한 곡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만 그것이 제 한계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 지겠죠.”

    “알 것 같다.”

    아리엘 핀 얀스에게 완벽이란 개념 은 허상과 같았다.

    완전무결한 곡을 만들고 연주하기 위해 영혼을 불사르지만 완벽하길 바라진 않았다.

    음악의 한계가 있을 수 없음을 알 고 있고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인정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달래도 같은 생각이었다.

    “윤희 언니랑 소소 언니, 료코도 같은 말 했었어. 도빈이도.”

    “마왕이?”

    그러나 단 하나.

    아리엘에게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가 존경하는 유일한 지휘 자 마리 얀스를 넘어선 배도빈이었다.

    아리엘이 되묻자 진달래가 배도빈처럼 심통 맞은 표정을 따라 했다.

    “완벽한 건 없어. 편한 말일 뿐이야.”

    그 말투도 비슷하여 아리엘 얀스는 웃고 말았다.

    “끄아아악!”

    원고를 쓰던 차채은이 괴성을 질러 댔다.

    푸르트벵글러호 진수식 음악회에 대한 칼럼을 쓰는데 배도빈의 월광 소나타만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다.

    어떤 말을 붙여도 부족한 탓에 원고를 썼다 지우길 몇 시간째.

    있는 대로 쥐어뜯은 덕분에 머리카 락이 산발이 되었다.

    “ 아으아앟아으우.”

    벌써 많은 기사와 평이 쏟아진 뒤였고 마감은 하루 이틀 늦어지 고 있었다.

    차채은은 아침저녁으로 오는 ‘관중 석’의 연락이 두려울 정도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 미룰 수도 없는 법.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에 접속한 차채은은 배도빈의 월광 소나타를 재생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일렁이는 가슴을 표현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연주를 모두 들은 차채은이 다른 사람은 어떤 감상을 남겼는지 확인 하기 위해 검색창을 채웠다.

    곧 수백 건의 문건이 조회되었다.

    【천재가 일으킨 또 한 번의 기적]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이 완성되다]

    【완벽한 연주가 대미를 장식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차채은의 눈에 차는 글은 없었다.

    ‘다들 너무 쉽게 쓴 거 같은데.’

    그렇게 기사를 훑고 있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힉!”

    깜짝 놀란 차채은이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고 담당 편집자의 이름을 보 고 말았다.

    눈을 감고 온몸을 비튼 뒤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펴, 편집자님.”

    -원고 쓰고 계시죠? 딴짓하고 있던 거 아니죠?

    “아, 아니에요. 열심히 열심히 쓰고 있었어요.”

    -정말이길 바랄게요. 벌써 이틀이나 늦어졌다고요. 저 좀 살려줘요.

    “죄송합니다……. 오늘 안에는 꼭 보내드릴게요.”

    -오늘이 00시는 아니겠죠? 거기서 12시면 한국은 아침 7시라고요. 저 사무실에서 계속 대기해야 해요.

    차채은이 전화기를 떼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2시.

    한국에서는 이미 퇴근 시간인 저녁 7시라는 생각에 거듭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빨리 써 서 보내드릴게요.”

    한편, 차채은과 점심을 먹기 위해 놀러온 최지훈은 전화를 받으며 굽 신대는 17세, 3살 어린 친구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께 고개를 숙이는 아저씨들 이 떠올라 괜히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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