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69화 (36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69화

80.  그는 사실 완벽을 바라지 않는 다(1)

오래 준비했던 공연을 마쳤다.

4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단원들도 해냈다는 표정이다.

“평소보다 좋은데?”

“진짜로. 이런 적은 처음이야.”

무대에 수백 번 올랐던 이들도 관 객과 직접 소통하는 공연은 처음이 나 마찬가지.

관객뿐만 아니라 연주자도 만족스러운 공연이었으니 괜찮은 시작이다.

“진, 훌륭했어.”

“잘했어.”

“이히.”

다니엘 홀랜드와 왕소소를 비롯한 단원들이 첫 공연을 무사히 마친 진달래를 축하했다.

벌벌 떨며 무대에 오른 녀석은 칠삼의 응원을 받고 각오를 다졌다.

첫 곡 이후로는 긴장이 풀렸는지 날개를 단 듯 콘서트홀을 마음껏 누볐다.

가장 걱정되었던 발음 문제도 해결.

아직 개선할 점이 남아 있지만 적어도 발음, 발성, 전달력에서는 합격 점을 줘도 괜찮을 것 같다.

‘여러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니까.’

언젠가는 본인만의 영역을 구축해 야 할 테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앙코르!”

“앙코르!”

대기실에서도 관객들의 연호와 박 수 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나윤희가 괜히 활을 쓸어내고 있다.

둘러보니 그녀뿐만 아니라 다들 다 시 한번 무대에 오르고 싶은 눈치.

하지만 당장 내일부터 다른 일정이 있고 동시에 피델리오도 준비해야 한다.

“정리하죠.”

“진심이야? 저렇게나 부르는데?”

“한 곡만 더 하자.”

“오늘 같이 즐거웠던 적 없었다고. 좀 더 놀자.”

“어림없어요.”

단호히 끊어내자 단원들이 아쉬워 하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들뜬 녀석이 간절 한 눈빛을 보냈다.

“안 돼.”

“응……

진달래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의 보컬은 마 이크 없이 노래하기에 한 번의 공연으로도 큰 짐을 짊어진다.

비록 공연 시간이 짧다고는 해도, 흥분해서 피로도 못 느낀 채 무리했다간 분명 목에 이상이 생길 것이다.

나윤희와 최지훈의 경우를 접했기 에 세 번째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앙코르!”

“앙코르!”

그러나 관객들의 바람을 마냥 무시 할 수도 없는 법.

“찰스, 대신 정리 좀 해주세요. 올 라갈 거예요.”

“그런 법이 어딨어!”

무대에 올라간다고 하니 정리하고 있던 단원들이 달려들었다.

“우리는!”

“치사하다!”

“폭정 반대!”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는데 찰스 브라움이 손뼉을 쳐 이목을 끌었다.

“보스 지시야. 다들 내일 공연을 위해 이만 쉬도록 해.”

평소에는 안 그러면서 공연 때만큼은 꼬박꼬박 보스 취급한다.

그러나 그런 찰스 브라움 덕에 편한 것도 사실이다.

연주나 편곡뿐만이 아니라 최근 들 어 단원들의 컨디션 관리에 부쩍 힘 쓰기도 하고, 그를 들이길 정말 잘 했다.

앞으로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으로서 굳건한 기둥이 되어줄 것이다.

무대 위에 올라섰다.

“꺄아악!”

“나왔어! 나왔다고!”

“햐햫!”

“휘이익!”

휘파람까지 날리며 환호하는 관객 들을 보니 다시 한번 기분이 좋아진다.

고개 숙여, 열렬한 호의에 감사를 전했다.

피아노 앞에 앉으니 더욱 크게 소리친다.

‘ 앙코르라.’

연주할 곡은 올라오며 생각해 두었다.

대부분 앞선 공연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개중에는 고전을 듣고 싶은 이들도 있을 터.

떠들썩한 분위기가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악을 차분히 음미하고 싶은 이들도 지금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 탱해 주었던 소중한 팬.

잠시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을 보았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번에는 무슨 곡을 연주해 줄지 기대하고 있다.

객석을 비추던 조명이 꺼졌다.

‘어느 쪽도 포기 못 하지.’

기존 팬도 앞으로 함께할 아이들도 모두 소중한 관객이다.

팬을 위한 일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가능한 모든 것을 쏟아낸다.

그래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찾은 모든 이를 만족시킨다.

‘말로 달래는 건 힘들겠지.’

주의를 준다 해서 어린아이들이 말을 들을 리 없다. 산타 웨인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아이들 스스로 연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앞선 몇 번의 연주로 가능성은 확 인했다.

굳이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정말 좋은 연주라면, 넋을 잃고 집 중할 수 있다.

아직 예절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라도 음악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새 목표가 되겠네.’

어려운 일이지만.

나라면 가능할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을 이제 막 처음 접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음악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

또.

지금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을 사랑해준, 클래식 음악의 명맥을 잇게 해준 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고.

다소 떠들썩한 콘서트홀에.

밤을 초대했다.

피아노 소나타 14번, C샤프 단조.

구름 틈 사이로 달빛이 내릴 때마 다 아이들의 말소리가 잦아든다.

아득한 심연의 호수는 고요히 빛을 반사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던 사내에게는 유일한 이정표.

이방인은 달빛의 인도에 따라 천천 히 발을 내딛는다.

낮게 깔린 안개.

풀 냄새 가득한 호수로 다가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찰박찰박.

호수가 발을 적신다.

발이 젖는 줄도 모른 채 달빛의 마성에 이끌려 걸어가는 남자는 슬 픔으로 젖어갔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조금씩 침전한다.

호수의 한가운데에 이른 사내는 아래로.

저 아래로.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의 끝으로.

달빛에 취한 남자는 환상을 본다.

해맑게 재잘대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운 말들을 전한다.

그때마다 이방인의 가슴은 고동쳐 호수에 파문을 남긴다.

멀리 타지에서 온 그는 고향의 흙 과 따스한 바람을 그리워한다.

그곳의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와 함께 보았던 달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고향의 포근한 흙도 따스한 바람도 아름다운 그녀도 없다.

지독한 향수.

단지 저 달만이 고향 땅과 같다.

남자가 눈을 떴다.

차가운 호수 아래서 달을 올려다보 던 남자는 가슴이 뛰었다. 수면을 향해 미친 듯이 헤엄쳤다.

심연의 호수가 요동친다.

달.

상처 받고 지쳐, 행복했던 기억마 저 잃어가던 이방인은 고향의 달을 봄으로써 희망을 얻는다.

다시 일어날 의지를 가진다.

감당키 벅찬 시련이 장막처럼 앞을 가려도, 밤이 그를 감싸도.

그는. 인간은.

그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아주 작은 희망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처절한 삶 속에서.

오직 달빛에 의지한 채 다시 일어나는 이방인을 그리며.

그것이 월광이라고.

이렇게나 따스한 빛이라 말해주었다.

‘세상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진수식을 찾은 800여 명의 관객들은 넋이 나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의 가슴에 압도적인 심상을 때려 박은 배도빈의 피아노는 지금껏 그 어떤 ‘월광’보다도 깊게 각인되었다.

연주가 끝났음에도.

그 열렬했던 환호성은커녕 누구 하나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네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두려웠다.

그녀는 세계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자신이 우월하다 여기고 있었다.

인지의 영역 끝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했다.

글렌 골드, 그레고리 소콜라브, 에밀 길렐스, 마리오 폴리니, 사카모토 료이치까지.

그녀도 인정하는 거장들이 있었지 만 음을 내는 방법에 통달한 그녀의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은 없었다.

가우왕과 최지훈 정도만이 자신과 같은 영역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런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세계가 침범당하고 말았다.

배도빈의 타건은 크리스틴 지메르만 본인이나 가우왕, 최지훈처럼 깔끔하지 못했다.

너무나 격렬해 야성적이었다.

연주는 완벽히 재단되어야만 하는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기준에는 부합 하지 않았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지만.

아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듣고 나선 그런 생각이 무 참히 짓밟혔다.

배도빈의 연주는 충동적이고 돌발 적이라 예측할 수 없었고 있는 그대 로의 심상을 각인시켰다.

일찍이 그녀는 그와 같은 카리스마를 접한 적이 없었다.

완고했던 그녀의 인식을 처참히 박살 내버리는 폭력 앞에.

그 거대한 힘 앞에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지난 몇십 년간 변치 않았던 자신의 기준이 바뀌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모두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배도빈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른 전율은 그가 연주를 마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호 진수식 연주회는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을 통해 전 세계 팬들에게 전달되었다.

ㄴ 나 진짜 충격 받았다.

ㄴ  배도빈이 지휘하는 거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이해 못 했는데 지금은 공감함. 월광 미쳤다 진짜.

ㄴ 오오 갓이시여.

ㄴ 인간이 아님. 진짜 마왕이든 신이든 아무튼 그럼.

ㄴ ㅇㅇ. 가우왕이 배도빈 관련 인터뷰 할 때마다 피아노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도.

ㄴ 캔드 공연 재밌게 듣고 있다가 지려 버림.

ㄴ 연주 시작하자마자 조용해지는 거 진짜 개소름.

ㄴ 정말 시도가 의외다. 다른 오케스트라도 게임이나 애니, 영화 OST 로 연주회는 가지지만 이벤트일 뿐 이잖아.

ㄴ 굳이 스스로 팬층을 고정하진 않겠다는 거지.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데 개인적으로 지지함.

ㄴ 솔직히 배도빈 피아노 들으면 그 런 생각도 든다. 그냥 클래식만 계 속 해줬으면 좋겠어.

ㄴ 진달래라는 애 경력도 얼마 없는데 잘하네.

ㄴ 신선함. 시원시원하더라.

ㄴ 나도 궁금해서 찾아보니 봉달 서커스 OST 불렀더라.

ㄴ 하, 진짜 배도빈 피아노 리사이틀 한 번만이라도 직관하고 싶다.

ㄴ ㅇㅈ.

ㄴ 팬으로서 진짜 억울한 게 배도빈 지금도 일 엄청 많이 하고 있단 말 이야.

ㄴ  나두. 도빈이 나윤희 악장이나 최지훈 그렇게 되기 전부터 쓰러지 기도 몇 번 했고. 근데 또 바이올린 이나 피아노도 듣고 싶고.

ㄴ 한 사람이 어떻게 저리 완벽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간 대 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감탄만 했는 데, 이번 음악회 보면서 뭐랄까. 진 짜 차원이 다른 것 같았음.

ㄴ 이제 까는 사람도 거의 없잖아 있어 봤자 관종 어그로고.

배도빈에 대한 찬사는 끊이질 않았고 그것은 평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클래식 음악 관계자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새로운 문화에 우려를 표 하면서도, 그들의 밴드 공연이 정기 연주회와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데 안심했고.

그럼으로써 긍정적인 시장 반응과는 달리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에 대 한 관심은 크게 두지 않았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무르익을 대로 성숙해진 배도빈의 피아노 연주였는 데, 감히 완벽한 베토벤 소나타였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신약 성서라 불리는 성전이 정복되었다는 불경한 말과 함께.

배도빈에 대한 열망은 멈출 줄 몰랐다.

*

1800년 빈.

“선생님! 선생님! 악!”

둔탁한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리니 앙헬이 또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앞도 못 보는 녀석이 한시도 가만 있질 못한다.

다가가 일으켜 주려 하니 녀석이 벌떡 일어나 손을 허우적댔다.

그 모습을 보다가 녀석이 떨어뜨린 지팡이를 집어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철없는 녀석이지만 크게 말하는 것 만큼은 마음에 든다.

첩에서 난 자식에다 장님이기까지 하니 그 지저분한 저택에서 어지간 히 괴롭힘 당했을 터.

그럼에도 힘찬 모습이 보기 좋다.

“무슨 일이냐. 쓸데없는 질문 하려 거든 돌아가.”

“쓸데없는 거 아니에요!”

오늘은 또 어떤 엉뚱한 질문을 할 지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 결혼한대요.”

또 정략인가.

너무나 익숙한 관례지만 눈 먼 막 내딸까지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는 그의 추악함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그분이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제 가 앞을 못 보는 걸 아직 모르시나 봐요. 대신 읽어주실 수 있으세요?”

“하녀에게 부탁하면 되잖느냐.”

“부끄러운 걸 어떡해요.”

“나는 괜찮고.”

“선생님은 친구가 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수줍게 내민 편지를 받았다. 첫 문장부터 속이 니글댄다.

“앙헬, 나는 매일 밤 달 아래서 그 대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오.”

“목소리가 화나신 것 같아요.”

“시끄럽다.”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앙헬을 보곤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대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것뿐이라 부족한 나로서는 그대를 어찌 만나야 좋을지 알 수 없소. 그 저 달 아래 이 미약한 정신을 정화 할 뿐이오.”

“겸손하신 분 같네요.”

“다 입 발린 말이다.”

“선생님!”

“……이제 그대를 만나 뵐 날도 얼 마 남지 않았소. 그때까지 모쪼록 그대 마음에 들도록 스스로를 갈고 닦도록 하겠소.”

“근사해라.”

앙헬의 손에 편지를 다시 쥐어주자 소중히 접었다. 그러고는 묻는다.

“그런데 선생님, 달은 어떻게 생겼어요?”

녀석의 손을 잡아 원과 초승달 모양을 그려주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달빛은 어떻게 생겼어요?”

달빛이 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달 뒤.

정오가 한참 지났는데도 앙헬이 오 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연락이 없어 따로 찾아 가니 앙헬의 하녀가 조용히 방으로 안내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앙헬은 당장에라 도 부서질 것 같았다.

“누구 마음대로 레슨을 빼먹느냐.”

깜짝 놀란 앙헬이 씁쓸히 웃었다.

“선생님.”

이내 눈물을 보인 그녀는 약혼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위태로워 자세 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약혼자는 원래부터 병약했던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통하는 게 있었는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크게 의지했고.

혼인하기도 전에 사별하고 말았다.

한참을 다독인 끝에.

녀석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달빛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지.”

“……네.”

건반을 눌러 밤을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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