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68화
79. 희망의 오케스트라(8)
800석이 가득 찬 무대.
비록 어렸을 때 바라던 형태는 아 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도 큰 무 대였다.
굳이 유명 인사들이 아니더라도 800명이나 되는 관객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듯해.
진달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이어지는. 처음 받아보는 그 열렬한 환영의
인사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떡해.’
가까스로 무대 가운데에 섰다.
진달래는 벌벌 떠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그럴수 록 긴장되었다.
‘ 아빠.’
어머니 없이도 밝게 자랐던 그녀가 탈선하기 시작한 건 아버지를 여윈 뒤였다.
유일한 안식처를 잃은 그녀는 지독 한 상실감을 느꼈고 마음은 약해졌다.
괜한 말조차 시비로 들렸다.
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아주 작은 일로도 싸움을 걸었다.
또래는 점점 진달래에게서 멀어졌고 학교도 그녀를 문제아로 여겼다.
점차 학교에 가는 날이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삼촌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갑자기 나 타나 아빠 행세를 하려는 진칠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알려준 음악은 좋았다.
노래하길 좋아했던 터라 그때부터 여러 밴드의 곡을 따라 부르고 칠삼의 도움으로 베이스를 익혀나갔다.
록커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29번의 도전 끝에 기획사 오디션 에도 합격했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거대 한 벽이 그녀를 가로막았고.
돌아선 길에서 진달래는 절망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
“진달래! 파이팅!”
어딘가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났다.
항상 그녀를 응원해 주었던 걸쭉한 목소리에 진달래는 침을 삼켰다.
잠시 삼촌 진칠삼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찾았지만 조명이 비치는 무대에서 객석을 자세히 살펴볼 순 없었다.
하지만.
용기를 얻기엔 충분했다.
각오를 다진 진달래가 고개를 돌렸다.
준비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배도빈은 지금까지 그녀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이 쪼끄만 애가 배도빈이라고?’
3년 전 첫인상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천재라는 느 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배도빈의 음악을 접하고 나 서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베를린으로 넘어와 그의 무대를 직 접 경험한 뒤로는 가슴으로 느꼈다.
고뇌와 희망.
죽음과 생명.
절망과 환희.
배도빈의 음악은 마술 같았다.
듣고 있으면 마치 홀린 듯이 그가 내는 음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다.
‘ 멋있다.’
‘미쳤어.’
‘어떻게?’
그러나 그렇게 느꼈던 감정 모두 지금과 같진 않았다.
무대 위의 그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진짜 배도빈.’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위대한 세 명의 음악가와 비견되는 인류의 희망이자 베를린의 마왕.
새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배도빈을 처음 목도한 진달래의 가슴이 서서 히 달아올랐다.
‘여기가 내 무대.’
어느새 떨림이 잦아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뛰기만 했던 진달 래가 비로소 앞을 보기 시작했다.
아득히 먼 곳에 서 있는 마에스트 로를 볼 수 있었다.
그는 거대한 산과 같아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무리 달려 도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주변의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 왕소소, 다니엘 홀랜드, 나카무라 료 코와 같은 연주자도 마찬가지였다.
‘ 멀다.’
하지만 같은 무대에 있기에.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을 보기 시작한 진달래는 푸르트벵글러호 콘서트홀을 채운 관객들을 느꼈다.
자신을 응원해 준 진칠삼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앉아서 묵묵히 지켜봐 주고 있을 아리엘 얀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몇 달간 부 족한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동료들에 게 부끄러운 단원으로 남고 싶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한 사 명감이 이제 막 피어났다.
진달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를 둘러보았다.
2013년.
월드 디자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제작해 전 세계 총 12억 7,000 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한 입지전적인 극장 애니메이션, ‘Frost’의 주제가.
배도빈이 산타 웨인을 비롯, 아이 들을 위해 편곡한 오케스트라 버전 의 ‘Let me up’.
배도빈의 피아노가 눈송이처럼 내 리기 시작했다.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의 바이올린, 료코의 비올라, 왕소소가 연주하는 첼로가 설산의 안개처럼 퍼졌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떨어지는 애처 롭고 아리따운 눈꽃.
스칼라의 하프가 눈이 되어 관객들 의 마음에 소복이 쌓여 나갔다.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현악기들이 상처받은 이를 감싸고.
마침내.
진달래가 꿈을 토해냈다.
“유리처럼 깨지는 얼음 위를 걸으면.”
수백 번의 발성 연습.
혹독하게 교정 받았던 발음 연습 끝에 완성된 그녀의 목소리가 청하 하게 울렸다.
애처롭게 내리는 눈과 지독한 안개 속에서 걷는 얼음마녀.
반가운 마음에 소리치던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말 수가 줄어들었고 이내 객석은 고요해졌다.
나윤희의 제2바이올린과 나카무라 료코의 비올라가 화음을 이루며 멜 로디를 이끌었고.
왕소소의 첼로와 다니엘 홀랜드의 베이스가 설산 위로 무겁게 부는 바 람을.
배도빈의 피아노가 반주를 깔아 수 북이 쌓인 눈을 그려냈다.
설경.
스칼라의 하프가 바이올린의 멜로 디를 매끈하게 다듬으며 빙판이 드러났다.
그 위를 걷는 프리마 돈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소프라노가 내는 목소리는 마치 귀에 스며들 듯 처연했다.
“Let me up. Let me up.”
연인의 노래를 듣던 아리엘 얀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숱한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는 모습에 깊이 감격했고 응원했다.
그리고 동시에 본인의 한계를 직시 했다.
‘봄의 여신’이야말로 진달래의 순수한 영혼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라 생각했거늘.
그녀가 이렇게 시린 아픔을 노래할 수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분하게도.
배도빈보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 고 있다는 열등감이 그의 고결한 영 혼을 갉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
아리엘은 애써 스물스물 피어나는 저열한 감정을 누르며 진달래를 가 슴에 담았다.
그래야만 그녀에게 어울리는 곡을 써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적어도 그녀가 부를 노래만큼은 누 구보다도 잘 만들고 싶었다.
간주를 지나.
우울했던 곡조에 활력이 실렸다.
첼로와 바이올린이 힘차게 움직일 때마다, 진달래의 목소리에 힘이 실 릴 때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응원 하는 것 같아서.
아리엘은 주먹 쥐고 있었던 손에 힘을 빼고 조금씩 미소 지을 수 있었다.
*
일주일 전.
“피아니스트는 많잖아. 대체 왜 고집 부리는데?”
찰스 브라움은 본인 이상으로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는 배도빈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의 완벽주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홀륭한 피아니스트는 찾기도 힘들었지만 자축 파티에서까지 직접 연주하려는 배도빈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다그쳤지만 배도빈은 무시할 뿐.
연습을 이어나갔다.
“미치겠군.”
“방해할 거면 그만 퇴근해요.”
찰스 브라움이 한숨을 크게 내쉬자 배도빈이 연주를 중단했다. 그러면 서도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방해가 아니야. 나아지긴 했어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일정은 정상이 아니라고. 특히 너. 대체 그 많은 일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 거야?”
대답은 없었다.
“좋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 만 이번에는 네가 한다고 쳐. 그럼 앞으로도 피아니스트가 필요할 때마 다 네가 할 거야?”
“ 아뇨.”
“그래. 아니잖아. 차라리 빨리 한 명 들이자니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자꾸 미뤄서 자기 몸을 혹사시키 는데?”
찰스 브라움은 진심으로 배도빈을 걱정했다.
나르시스트인 그가 인정한 유일한 작곡가.
현대곡은 단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찰스 브라움도 배도빈의 곡이 라면 욕심을 냈다.
그렇게 함께했고.
이제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그를 걱정하게 되었다.
충분한 휴식 없이 무대에 오를 수는 없기에 찰스 브라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빡빡한 일정을 알면서도.
굳이 더 노력하지 않았다.
악장인 그가 희생하기 시작하면 무 리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달 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배도빈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배도빈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순 없었다.
다만.
다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이 에요.”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의 공연을 보 고 있던 최지훈은 기악과 성악의 아름다운 조화에 감탄했다.
언제 또 이렇게 성장했을까.
나카무라 료코와 진달래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의 바이올린 은 곡 전반에 이르러 감정을 극대화 했고.
속이 비치는 얇은 천으로 겹겹이 이루어진 드레스와 쓰러질 듯 쓰러 지지 않는 마녀가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더는 거 같아.’
피아노를 치는 배도빈.
그는 신기하게도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처럼 내리는 눈송이.
최지훈은 숱한 거장들의 연주를 직 접 들었지만 표현력에 있어서만큼 배도빈만 한 피아니스트를 알지 못 했다.
동시에.
‘내 자리.’
형제가 지키고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최지훈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당당히 손을 뻗고 싶었다.
이제 같은 무대에 서도 되지 않겠냐고 오래 참아왔던 이야기를 꺼내 고 싶었다.
배도빈의 악단에 피아노가 필요하다면.
형제가 피아노를 필요로 한다면 자신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베풀고 살았지만.
양보하며 살았지만 배도빈의 옆자리만큼은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를 보고선 가슴이 철렁했고 그 앞에 배도빈이 앉을 때는 안도했으며.
미안했다.
왜 좀 더 조심하지 않았을까.
가까스로 묻어두었던 감정이 ‘Let me up’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노래는 간주를 지나 절정으로 치닫 고 있었다.
배도빈의 피아노는 우아한 드레스를 벗어 던진 마녀를 화려하게 휘감았고.
현악기들은 점차 세차게 몰아치는데 진달래의 목소리는 올곧게 뻗어 나와 굴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고.
해낼 거라고 말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밴드의 응원에.
최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다시 한번 절정.
“Let me up. Let me up.”
그 순간.
객석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진달래 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조금씩 들리는 그 어리고 미숙한 목소리들이 공연을 방해하기는커녕 응원을 하는 듯해.
최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에 동참했다.
“Let me up. Let me up.”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울렸다.
“레미업! 레뮈업!”
아들의 노래를 처음 듣는 그레이 웨 인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울었다.
정말 와도 괜찮을까.
또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그녀와 딸 죠엘 웨인은 너무나 행복히 웃으며 노래를 따라하는 산 타 웨인을 보며.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