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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66화 (36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66화

    79. 희망의 오케스트라(6)

    “그게 무슨.”

    “앙리.”

    알롱 앙리가 발끈해 몸을 들썩였지 만 린센이 그를 막아섰다.

    저지당한 그는 얌전히 앉았지만 얼 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우철은 그 모습만 봐도 그가 어 떤 생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공 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려.’

    미숙했다.

    그러나 저러한 치기가 있기에 대담 하게 활동할 수 있었을 터.

    게다가 신중한 인간이 함께 있으니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을 거라 여 겼다.

    최우철은 고민하고 있는 에드가 린 센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의도지?’

    린센은 최우철이 무슨 이유로 찾아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살려달라고 하라는 의도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직접 움 직인 만큼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압적인 태도와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은 무서웠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살고 봐야 했다.

    이대로라면 ‘레 자미’와 앙리 그리 고 본인은 빚더미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떡하지.’

    신중하면서도 신속해야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줄 리 없었기에 작은 정보 라도 얻고자 린센은 경계하며 질문 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최우철이 씩 하고 웃으며 안주머니 에서 시가를 꺼냈다. 잎을 고르는 손동작에서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기사를 좀 내줘야겠어. 장기간.”

    ‘ 역시.’

    사업가가 언론인에게 요구할 것은 그 정도.

    예상대로였기에 린센은 속으로 낙 담했다.

    ‘굳이 우리를 찾을 정도면 구린 일 일 게 뻔해.’

    최우철 정도 되는 남자라면 어떤 루트든 거래하고 있는 언론사가 있을 테고, 레 자미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드러낼 수 없는 일일 터.

    위험을 늘릴 순 없었다.

    “청부 기사는 받지 않습니다.”

    린센이 단호히 거절했다.

    최우철이 어떤 기사를 의뢰할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언론인으로서의 신념과 양심을 지 키자고 이제 막 다짐했던 차였다.

    “200만 유로를 주지.”

    “감사합니다.”

    린센의 즉답에 최우철이 빙그레 웃 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래. 가지고 들어와.”

    그가 통화를 하는 도중, 앙리가 린 센을 잡아끌었다.

    “갑자기 뭐예요!”

    “200만 유로라고 하잖아! 거절할 수 없었다고!”

    “청부 기사 안 받는다면서요! 30분 전에 양심적으로 살자고 했잖아요!”

    “그럼 베를린 필하모닉이랑 단원들 한테 배상은 어떻게 하게!”

    “그건.”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 소리 죽여 아웅다웅하는 그들이 잠시 한숨을 내쉴 때.

    TV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기자 회견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배도빈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무실이자 보금자리로 날아든 출 석 요구서와 함께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액이 맴 돌았다.

    “해야 해.”

    린센이 양손으로 앙리의 얼굴을 쥐 곤 다짐하듯 말했다.

    “게다가 최우철이 직접 온 일이야. 200만 유로를 주면서까지 직접 의 뢰하는 일이라고.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앙리가 여전히 통화를 나누고 있는

    최우철을 슬쩍 보았다.

    “위험한 일일 게 뻔하다고요.”

    “알아. 그러니까 해야 하는 거야.”

    “네?”

    “위험하고 감춰야 할 일이니까 우 리한테 왔겠지.”

    앙리는 린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지만 린센의 생각은 달랐다.

    “맡으려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야.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에 괜한 모험을 할 리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한테 찾아온 거라고.”

    잠시 머리가 돈 알롱 앙리 덕분에 최근 한 달간 레 자미는 가장 인기 있는 기사를 내는 언론사 중 하나였다.

    “우리가 필요한 이상 저 사람도 우 릴 보호할 거야. 적어도 원하는 단 계에 이를 때까지는. 차라리 일처리 잘해서 쓸모 있게 여겨지는 게 나 아. 최우철한테 보호받으면 어지간 해선 안전할 거라고.”

    “의뢰를 받지 않으면 위험할 일도 없잖아요!”

    “그럼 굶어 죽겠지.”

    앙리의 말문이 막혔다.

    “어차피 빚더미에서 허우적대다 죽을 거면 한번 걸어보자고.”

    “……미안해요, 린센. 저 때문에.”

    “이미 벌어진 일이야.”

    린센과 앙리가 우정을 다졌다.

    그리고 본인들의 안전을 위해 몰래 녹음기를 틀어놓았다.

    때마침 최우철과 함께 방문했던 남 자 중 한 명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서류가방을 전하곤 나가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린센과 앙리를 노려보았다.

    얌전히 말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아,

    린센과 앙리는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자료는 이쪽에서 준비했으니 자네 들은 열심히 알리기만 하면 돼.”

    최우철의 말에 린센이 머뭇거렸다.

    그 안에 든 내용이 너무나도 궁금 했지만 저것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최우철이 의뢰할 일을 확인하고도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가 무슨 방법으로 입막음을 하려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이 방법밖에 없어.’

    각오를 마친 린센이 최우철을 보았다.

    “확인하겠습니다.”

    최우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니 굳이 경 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의 예상대로 린센은 가방 안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떨었다.

    내용은 버만 가문이 그들의 이득을 위해 자국 내 여론을 조작, 브렉시 트를 의도했다는 내용이었다.

    린센의 손과 눈이 다급해졌다.

    ‘미쳤어.’

    영국의 명문, 버만 가문의 주 수입 은 군사산업이었다.

    5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영국 국방 비의 27퍼센트(약 15조 원)가 버만 인더스트리와 연관되어 있었는데, 한 가지 비밀이 더 있었다.

    그것은 북아일랜드(영국령)과 아일 랜드의 분쟁에 버만 가문이 개입하 고 있었다는 사실.

    영국과 아일랜드 두 국가 모두에게 무기를 대고 있는 버만 인더스트리 로서는 영국 잔류를 바라는 연합주 의자와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바라는

    민족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전쟁을 이 어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EU가 체결되면서 북아일랜 드와 아일랜드의 왕래가 자유로워지 며 다소간 충돌이 줄어들었는데.

    버만 인더스트리가 영국의 EU 탈 퇴를 의도하면서 다시금 분쟁이 시 작된 것.

    브렉시트 이후 성장한 영국 회사는 버만 인더스트리와 그 관련 업체뿐 이라는 정보가 담겨 있었다.

    ‘사실이야?’

    린센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EU로서의 혜택에서 철저히 단절된 영국은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앓았고 그것은 해결되지 않은 채 지난 4〜5년간 누적될 뿐이었다.

    높은 세율을 맞은 무역은 날로 줄었으며 파운드화는 자꾸만 가치를 잃어갔다.

    영국인들의 삶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지 만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책임질 사람 도 없었다.

    ‘ 설마.’

    아무리 돈에 미친 작자들이라 해도 이런 짓까지 할까.

    린센은 어쩌면 최우철이 조작한 내 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판단을 할 수 없는 지금.

    에드가 린센은 최우철이 굳이 브렉시트와 버만 가문을 연결 지어야만 하는 이유 정도만 고려해 볼 수 있었다.

    ‘대체 왜?’

    린센이 힐끔 눈만 움직여 맞은편의 남자를 보았다.

    이 자료가 보도되었을 때의 반응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버만 가문은 유럽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테고, 영국인과 아 일랜드인들은 그들을 역적으로 취급 할 게 뻔했다.

    그로 인해 그들이 무슨 일을 겪게 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린센은 버만 가문이 몰락함으로써 최우철이 얻을 이득을 생각해 보았지만 좀처럼 알 수 없었다.

    이미 버만 가문의 차남, 제임스가 이끄는 인터플레이는 사업 종료를

    직전에 두고 있을 정도로 우日에 참 패하였다.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이유는 조금 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지만.’

    그 이유를 알았다가는 제 명에 살 수 없을 게 뻔한 일.

    린센은 그가 왜 본인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미친 일을 할 만큼 절박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

    그런 의미에서 린센과 앙리는 최고 의 선택지였다.

    최근 갑자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그러면서도 힘이 없어 어느 순간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 지 않을 언론사.

    절박하여 미친 짓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최우철에게 너무나 좋은 도구였다.

    동시에.

    언론인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에드가 린센은 일생일대의 특종을 단독 보 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었다.

    긴 고민 끝에.

    레 자미의 대표 에드가 린센이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최우철이 빙그레 웃었다.

    곧장 두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왔고 그들은 또 다른 가방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것을 열어 린센을 향해 보였는데.

    가방 가득 담긴 현금을 보고 린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굳이 현금을 준비한 이유를 이해하 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래 기록은 남기지 않겠다는 거네.’

    동시에 최우철이 넘긴 자료가 추적할 수 있는 파일 형식이 아니라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

    최우철이 성냥을 꺼내 시가에 불을 붙였다.

    “시기는 이쪽에서 고지해 주지. 넉넉잡아 6개월 정도면 될 거야. 프랑 스어, 독어, 영어로 준비해 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무실은 보안에 너무 취약하군. 호텔을 잡아두었으니 앞 으로는 그쪽에서 생활하고.”

    최우철의 배려는 마치 일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숨어 있으라는 말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좋아. 이해가 빨라서 좋군.”

    최우철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왔던 남자들이 사무실 창문을 열고 무엇인가를 제 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대체 언제 저런 걸 부착해 놓았는지 도 알 수 없었다.

    한 남자가 에드가 린센 앞으로 와 손을 내밀었다.

    큰 턱은 움직이지 않았고 억센 손 은 에드가 린센이 스스로 녹음기를 꺼내놓게 했다.

    남자는 녹음기를 받아든 후 그것을 그 자리에서 폐기.

    에드가 린센과 앙리에게 핸드폰 케 이스를 건넸다.

    “연락은 이것으로 하시면 됩니다. 모든 일은 저를 통해 전달될 예정입니다.”

    “네……

    어떨떨하게 핸드폰을 받은 두 사람 은 최우철 일행이 떠나자 은은한 시 가 냄새만 남은 사무실에서 풀썩 주 저 앉았다.

    한편.

    일을 마치고 나온 최우철은 자택으로 귀가하는 길에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전화 받을 수 있으세요?

    “아들 전화라면 언제든 받아야지.”

    -히힛. 오늘은 템포를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법을 배웠어요. 크리스틴 지메르만 선생님은 정말 대단해요.

    “허. 최고라더니 다행이구나. 손은 좀 어떻고.”

    -여전히 치료받고 있어요. 빨리 치 고 싶어서 조금 답답해도 견딜 만해요.

    최우철은 피아노만 바라보며 살았던 아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네. 참. 그리고 저 도빈이네 크루 즈 구경하러 함부르크에 가려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진수식은 언제라더냐.”

    -다음주요. 이틀 전에 가서 구경 좀 하다가 전야제 파티에 참석하려 해요.

    “그래. 재밌게 놀다 오너라.”

    -아버지는 오늘 뭐 하셨어요?

    최지훈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최우철을 기쁘게 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단다.”

    - 네?

    “삶이 힘든 사람이 있더구나.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도움을 줬 지.”

    생전 남 좋은 일 하지 않던 아버지가 그런 일을 했다니, 최지훈으로 서는 심히 걱정되었다.

    -아버지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럼. 아버지 걱정은 말고 넌 그 저 푹 쉬고 손 낫는 것만 생각하면 돼.”

    -그럴게요. 그럼 또 전화할게요.

    아들과 통화를 마친 최우철이 핸드 폰을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아내 이지우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욕되게 하는 이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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