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65화 (36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65화

    79. 희망의 오케스트라(5)

    진수식 하루 전.

    “우와아아아!”

    “이거 정말 장난 아니잖아?”

    “크하하학! 엄청나게 크구만!”

    푸르트벵글러호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인 피셔 디스카우, 진 마르코, 마누엘 노이어 그리고 한스 이안은 두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 마르코와 한스 이안이 눈을 마주쳤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푸르트벵글러호로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승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도 아니고.”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는데 반짝이는 왕소소의 눈을 보고 말았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나윤희와 나카무라 료코, 진달래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맛있을 것 같아.”

    왕소소가 군침을 다시며 말했다.

    호화로운 크루즈를 보며 그 안의 훌륭한 음식이 있을 거라는 그녀의 사고회로를 이승희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빨리. 빨리 가자. 응?”

    진달래가 발을 동동 굴렀고 나윤희 와 료코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이승희를 끌었다.

    결국 한스 이안 일행과 함께 가장 먼저 크루즈에 올라탄 다섯 사람은 선수로 달려갔다.

    “타이타닉이야! 타이타닉!”

    “불길한 말 하지 마!”

    “저기 서 봐. 어어. 오케이. 찍는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베를린 필하모닉은 진수식에 앞서 전 단원과 직원 그리고 그 가족들을 대동해 파티를 열었다.

    “어머나. 세상에.”

    “아빠! 빨리, 빨리!”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또다른 집을 구경했다.

    그러나 단 한 명.

    심기가 불편한 남자가 있었으니, 위대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가 오늘만 네 번째 불평이었다.

    “이름 바꿔.”

    “안 돼요. 저기 저 배에 페인트칠 다시 하는 데만 얼마가 드는 줄 아 세요?”

    “그러니까 이 녀석아! 미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당장 바꿔!”

    “니아가 보기엔 어때요?”

    “응. 멋있네. 현역으로 뛰고 싶을 정도야.”

    배도빈이 무시하고 말을 돌리자 빌 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노발대발하며 역정을 냈다.

    “이런 짓은 나 죽고 나서 해! 왜 멀쩡히 살아 있는데 이딴 짓을 해서 사람을 민망하게 해?”

    “죽으면 모르잖아요.”

    “몰라도 돼!”

    그때 카밀라 앤더슨이 푸르트벵글러의 손등을 꼬집었다.

    깜짝 놀란 푸르트벵글러가 잠시 불 평을 멈췄고, 카밀라는 배도빈을 보 며 싱긋 웃었다.

    “좋아서 그래. 쑥스러워서 괜히 화 내는 거 알지?”

    “그럼요.”

    “흥.”

    푸르트벵글러가 콧김을 내뿜자 배도진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왜 화났어?”

    “알 것 없다.”

    푸르트벵글러가 배도진의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목을 움츠리며 그것을 받아낸 배도진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알 것 같아. 머리카락 없어서 화난 거지?”

    이웃집 꼬마의 말에 푸르트벵글러 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가 설명을 요구하듯 내려다보니 배도진 이 한 번 더 웃으며 말했다.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도 머리카락 빠진다고 화내.”

    “머리카락으로 스트레스 받은 날이 언젠지 이젠 기억도 안 나는구나.”

    “어?”

    “머리카락이 있던 삶보다 없었던 날이 더 길었으니 말이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배도진이 눈 과 입꼬리를 내렸다. 잔뜩 우울해진 탓에 나이 많은 친구의 손을 꼭 잡 아주었다.

    “내가 꼭 머리카락 낫게 해줄게.”

    형제가 돌아가며 놀리는 듯한데.

    그것이 본인을 위하는 진심인 걸 알기에 푸르트벵글러는 좋아해야 할 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한편.

    배에 오른 니아 발그레이와 제인 에스터 부부도 갑판 난간에 몸을 기 대고 주변을 살폈다.

    “신기해요.”

    아내의 말에 니아 발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아닌 척해도 다들 걱정했잖아요. 재정난에 푸르트벵글러 선생님도 안 좋으셨고. 또……

    제인 에스터는 니아 발그레이의 귀 와 손에 이상이 생겼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닥친 불행을 어 찌 이겨내야 할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악단의 미래를 걱 정하던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러게요.”

    니아 발그레이가 웃으며 제인 에스 터의 손을 잡았다.

    아내의 말대로 몇 년 전만 해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미래가 불투명했다.

    조금씩이지만 문제가 드러나기 시 작한 재정 문제와 무리한 일정으로 건강을 해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그런 상황에서 차기 상임 지휘자였던 본인마저 은퇴를 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모두 도빈이 덕분이죠.”

    제인 에스터가 남편과 마주잡은 손을 앞뒤로 움직였다.

    “처음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정말 작았는데. 어느새 저렇게 컸네요. ……조금 자랐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족들과 이야 기 나누고 있는 배도빈을 보았다.

    “그런가요?”

    “그런 거 같아요.”

    한참을 관찰하던 부부는 웃었다.

    “당신이 캐논을 넘긴다고 했을 때는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까 싶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훌륭히 자라서 악단을 이끌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해요.”

    “잘 넘긴 것 같죠?”

    “네. 잘하셨어요.”

    제인 에스터가 손을 들어 잡고 있던 남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레 자미의 알롱 앙리는 지금껏 참 아왔던 분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기사를 써댔다.

    클래식 음악의 광팬이었던 그가 쌓아온 정보량은 방대했고.

    그가 써낸 기사는 팬들뿐만 아니라 동종 업계인마저 놀랄 정도였다.

    “아니, 좀 아니지 않나?”

    “글쎄. 뭐, 난 신기하더만. 마에스 트로 푸르트벵글러와 카밀라 앤더슨 국장이 그런 관계인 줄 누가 알았겠어?”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내부에 소식통이라도 있나?”

    “거야 모르지.”

    “그나저나 베를린 필하모닉에 관련 한 일만 벌써 4번째야. 슬슬 움직임이 있을 것 같은데.”

    “자네 정말 답답하군. 오늘이 기자 회견 날이잖아.”

    “아. 그랬나?”

    “아무튼 정말 뭔 배짱인지 몰라도 단단히 미친놈•이야. 배도빈 공격했다가 살아남은 곳이 없는데.”

    “난 뭐 시원하고 좋던데.”

    기자들은 배도빈의 베를린 필하모닉에 관련한 가십거리를 토해내는 알롱 앙리와 레 자미가 조만간 보복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사실을 레 자미의 기사를 내주는 잡지, 커뮤니티에서 모를 리 없었지만.

    단지 ‘장소’를 제공할 뿐인 그들로 서는 화제성 있는 알롱 앙리의 기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책임은 그와 레 자미에 있기 때문.

    레 자미의 대표 에드가 린센은 그 러한 걱정을 접어놓고 있을 수 없었다.

    “앙리, 이제 그만 하자. 할 만큼 했잖아.”

    “아니에요. 겨우 관심받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끝내면 아무것도 안 된 다고요.”

    “너 정말 이럴 거야?”

    “린센이야말로 다시 생각해 봐요. 지긋지긋하지도 않아요? 당장 다음 달 월세 못 내면 우리 둘 다 길거 리에 나앉아야 한다고요.”

    “그렇다고 남한테 피해줘도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 이러려고 이 일 시작한 거 아니잖아.”

    린센은 무척 슬펐다.

    그녀의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 나 앙리는 그 얼굴을 응시할 수 없었다.

    앙리가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응. 정직하게 살자. 열심히 하면 언젠가 꼭 인정받는 날이 올 거야.”

    마음을 다진 두 사람은 싸구려 커 피를 나눠 마셨다.

    그러고는 린센은 정정 기사를 쓰기 위한 준비를, 앙리는 취재를 하기 위해 나서려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없었던 우편이 눈에 띄었다.

    ‘뭐지?’

    알롱 앙리가 의아해하며 우편물을 꺼냈고 그 순간 얼어붙었다.

    출석 요구서였다.

    그는 다급히 사무실로 돌아가 린센을 불렀다.

    “린센. 린센.”

    “아직 안 갔어?”

    사색이 된 앙리를 본 린센도 순간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넘긴 우편물을 다급히 뜯었고 이내 우려 하던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어, 어떡하죠? 설마 정말 고소할 줄은.”

    린센은 안절부절못하는 앙리를 탓했다.

    “정말 몰랐어?”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린센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했다.

    레 자미의 이름으로 낸 기사인만큼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 스스로도 혹시나 괜찮지 않을 까 하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 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에 앙리를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고.

    그런 자각도 있었다.

    ‘함께 책임져야 해.’

    더욱이 이런 일로 그를 버리기엔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할 수 있는 일은 해봐야지. 일단 사과, 정정 기사부터 서두르자. 오늘 취재는 포기하고 기사부터 준비해.”

    “네.”

    똑똑-

    두 사람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려 던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누가 찾아오는 일은 정말 드물었기 에 린센은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마피아 보스처럼 생긴 남자가 부하 처럼 보이는 남자 둘을 대동하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JH 최우철 대표.’

    얇고 긴 눈썹과 날카로운 눈.

    선 굵은 코와 턱.

    다소 비웃는 듯한 남자는 거물 중의 거물, 최우철이었다.

    언론인으로서 살아왔던 에드가 린 센이 그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이 사람이 대체 왜?’

    굴지의 사업가이자.

    그와 적대하고 살아남은 자는 영국 의 명문, 버만 가의 차남뿐이라고 알려진 위험한 남자.

    베를린 필하모닉의 고소에 더해 이 해할 수 없는 방문이 이어지자 에드 가 린센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최우철이 입을 열었다.

    “에드가 린센 대표신가?”

    “……네. 그렇습니다.”

    최우철이 린센의 어깨 너머로 사무 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알롱 앙 리를 발견했는데 그 역시 린센과 다 르지 않았다.

    “그쪽이 용감한 기자인 듯하군.”

    “네, 네?”

    “알롱 앙리. 최근 재밌는 기사를 여럿 쓰던데.”

    그 말에 앙리와 린센이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배도빈과 최지훈의 관계로 보아 베를린 필하모닉과 이日는 일반적인 사 업 파트너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하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최우철이 숨을 들이쉰 다음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찾아온 성의를 봐서 자리 좀 마련해 줬으면 싶군.”

    “아, 네. 네. 이, 이리로.”

    최우철이 동행한 남자 둘에게 밖에 서 대기하라고 당부한 뒤, 린센의 안내를 받았다.

    린센은 허둥지둥 원탁 테이블을 대충 정리했고 앙리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싸구려 커피를 내왔다.

    단 향이 물씬 풍겼다.

    최우철을 커피향을 맡아본 다음 인상을 쓰며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여긴 어쩐 일로……

    “인스턴트도 괜찮은 제품이 있을텐데.”

    최우철은 린센의 말을 무시하곤 사 무실을 둘러보았다.

    8평이나 될까.

    정리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협소한 사무실이 더욱 좁아 보였다.

    사무실을 살펴보는 그에게 린센과 앙리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래. 이러니 갑자기 그런 기사를 쓸 만도 하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린센과 앙리는 이를 꽉 물었다.

    “기사가 많이 읽힐수록 원고료도 올라갈 테고 광고도 붙을 테니까. 최근 레 자미가 발표한 몇몇 기사는 인상적이었어.”

    “저…… 그 일에 관해서라면 이 젠.”

    린센이 입을 열었다.

    사무실을 둘러보고 있던 최우철이 린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젠?”

    “네. 이젠 그런 기사 안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저……

    “아니. 그러면 쓰나.”

    최우철의 말에 린센과 앙리가 바들바들 떨었다.

    사람 몇 명은 죽였을 것 같은 아 우라에, 그들은 정말 죽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배짱도 좋군.”

    최우철이 소장을 발견하곤 빙그레 웃었다.

    “일처리가 빨라. 벌써 소장을 받을 정도면 첫 기사가 나오자마자 움직 인 것 같은데.”

    혼자서 중얼거리던 최우철이 린센을 보았다.

    차갑고 강렬한 눈빛에 린센은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할지 좀처럼 알 수 없어 그저 벌벌 떨 뿐이었다.

    “아마 피해액은 100만에서 200만 유로 사이로 책정되었을 것 같은데. 어때. 지불할 능력은 있나?”

    “배, 백만이요?”

    “물론 개인별 고소는 따로 진행되겠지. 영세한 언론인이 감당하기엔 턱없이 큰 액수일 것 같아 애석하 군.”

    최우철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처럼 용기 있는 언론인이 한때의 치기로 무너지는 게 너무나 가슴 아프네.”

    ‘거짓말.’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책임은 져 야겠지. 다시 한번 묻지. 지불할 능 력은 있나?”

    그럴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최우철은 대답을 강요했다.

    지독하게 고압적인 태도에 에드가 린센이 겨우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그렇군. 정말 안타까워.”

    최우철이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낡은 테이블을 만지며.

    “학부생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와의 소중한 사무실.”

    딱딱하게 굳은 바게트를 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

    구시대의 유물, CRT 모니터를 신 기하게 바라보곤 애석함을 드러냈다.

    “현실의 벽에 막혀 살아보려고 발 버둥쳐 본 것 아닌가. 이대로 모든 걸 잃고 사라지기엔 안타까워.”

    린센과 앙리는 당황했다.

    마치 자신들의 삶을 아는 듯이 말하는 최우철에게 뒷조사라도 당한 느낌이었다.

    “그건 어떻게.”

    “아니지.”

    “ 네?”

    “지금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지 않나.”

    최우철이 상냥하게 웃었다.

    “살려달라 해보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