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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62화 (362/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62화

79. 희망의 오케스트라(2)

통화를 마친 배도빈이 악보를 챙겼다.

“찰스가 저 모양이니 오늘은 쉬도록 해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 컨디 션 관리 잘하고요. 노이어는 찰스 좀 봐주세요.”

“웃어넘기면 될 것을. 손 많이 가는 인간이라니까.”

마누엘 노이어가 어깨를 으쓱였다.

“노이어.”

“알았어. 맡겨 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찰스 브라움을 부르며 밖으로 향했다.

배도빈도 이자벨 멀핀과 만나기 위 해 나가려다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 돌아서서 당부했다.

“ 진달래.”

“어?”

진달래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무대에 오르기로 한 이상 받아들 여야 할 일이야.”

무대에 오른 이상 본인의 의지, 노력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일이 생 길 수밖에 없었다.

유명해질수록 질투하는 사람은 늘어갔다.

혹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상처 주는 이들도 있었다.

남에게 상처 입히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즐거움도 없이도 그런 행위를 반복하는 정신병자가 꼭 있었다.

19세기의 빈에서도.

21세기의 베를린에서도 그러한 인 간들을 숱하게 겪었던 배도빈은 그로 인해 받을 상처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헛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을 수 밖에 없는 아픔.

지금의 일은 가수로서 살아갈 진달 래가 겪을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겨내야 해.’

이제 노래를 더 잘하기 위한 노력 에 더해 상처에 익숙해져야 한다.

진달래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눈은 흐리멍 덩하여, 배도빈은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신경 쓰지 말라는 무책임한 위로 따위 조금도 도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관객만 생각해.”

“ 어?”

“그런 일에 휘둘려 네 노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마.”

잊으라든가.

신경 쓰지 말라는 말보다 배도빈을 강하게 했던 건 음악에 대한 자긍심과 그를 찾아주는 관객이었다.

“들려주려고 연습했잖아.”

배도빈의 말에 빛을 잃어가던 진달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 몇 년간 무대에 오르는 것만을 생각하며 죽을힘을 다했다.

다시 찾은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다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노래하고 노래했다.

진달래는 고개를 굳게 끄덕여 보였다.

"응."

“그래.”

배도빈이 연습실을 나서고.

왕소소가 진달래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아아아!”

“정신 차려. 이제 지망생 아니잖아. 네 관리는 네가 해야 해.”

“응. 미안.”

왕소소가 잔뜩 풀이 죽은 진달래를 보다가 등을 쓸어주었다.

잠시 뒤.

배도빈이 그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멀핀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배도빈과 이자벨 멀핀은 서로에게 목례하고 마주 앉았다.

지난 18개월간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불필요한 말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롱 앙리라는 사람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기사를 여럿 쓰고 있어요.”

“저도 봤어요. 찰스랑 달래 이야기죠?”

“네. 그것도 문제지만……. 여기.”

멀핀 부장이 여러 서류 중에서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인터넷 기사를 스크립한 것이었는 데 배도빈은 제목을 확인하자마자 인상을 썼다.

“이거 사실이에요?”

“방금 확인 마쳤습니다.”

“뭐래요?”

“시비는 본인이 건 게 맞는데 일방 적으로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떨 거 같아요?”

“그냥 지나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일은 해프닝으로 끝나도 한스 이안 부수석의 일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까요.”

멀핀의 말에 배도빈이 기사를 내려 놓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베를린 필하모닉 제2바이올린 부 수석 한스 이안, 과거 폭행 이력?]

11년 전, 한스 이안과 베를린 시내 펍에서 시비가 붙었다는 한 남자의 진술을 포함하고 있는 기사는 자극 적인 단어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봐도 악의적 의도가 다분한 글에 배도빈에게 심한 두통을 느꼈다.

‘하필.’

한스 이안은 망나니 같던 전과 달 리, 정식 단원이 된 이후로 누구보 다도 자기 관리에 힘썼다.

상임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 역 시 오랜 시간 지켜본 끝에 그의 노력과 실력을 인정.

저번 달에는 그에게 바이올린 협주 곡 독주자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반응이 좋아 푸르트벵글러는 한스 이안을 독주자로 한 몇 번의 공연을 더 예정하고 있었다.

한스 이안은 진심으로 행복해했고.

단원들은 아낌없이 축하해 주었다.

그런 시기에 터진 폭행 기사는 앞으로 준비된 공연에 지장을 줄 수밖 에 없었고, 그것을 넘어서 한스 이 안이란 남자의 미래에 낙인이 될 수 도 있었다.

“우선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정정 기사 내주세요.”

“네.”

이런 일 처리는 카밀라만큼이나 신뢰하고 있기에 배도빈은 크게 걱정 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해도 이미 타격을 입 은 한스 이안의 이미지는 복구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 네?”

“아뇨. 혼잣말이에요. 레 자미란 곳 따로 알아봐 주세요. 우리 쪽 기사 만 집중해서 내는 거 보니 뭔가 꿍 꿍이가 있을 것 같네요.”

“네. 카밀라 국장님과 이야기 중입니다. 최대한 빨리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스 이안은 방음실에서 온갖 욕을 쏟아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에 못 이겨 무슨 짓을 할지 본인도 몰랐기 에 그로서는 최선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씩씩대고 있는 데 케르바 슈타인이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이제 좀 진정 돼?”

“……전혀요.”

“한 대 태울까.”

케르바 슈타인의 제안에 한스 이안 이 고개를 끄덕였다.

흡연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고 내쉬기를 반복.

케르바 슈타인은 한스 이안이 마음 껏 털어놓을 수 있게 기다렸고 이내 베를린 필하모닉의 바이올린 부수석 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잘 기억도 안 나요.”

담배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11년 전이라고요. 11년. 게다가 취해 있었다고요. 얻어맞은 것 같긴 한데 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나요.”

케르바 슈타인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빌어먹을. 그 인간 다시 만나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대체 뭔 생각으로.”

한스 이안이 순간 말을 멈췄다.

전혀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을 깨 달았고 정말 걱정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공연 어쩌죠?”

“해야지.”

케르바 슈타인은 단호했다.

그것이 한스 이안을 조금 붙잡았으나 그는 그 이상으로 위태롭게 흔들 리고 있었다.

“오다가 들었어요. 이미 30명이 취 소했대요.”

다 타버린 담배를 끄고.

다시금 하나를 꺼내 입에 문 한스 이안은 라이터를 들었다.

그러나 몇 번을 켜려 해도 불이 붙지 않아 그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케르바 슈타인이 라이터를 켜 한스 이안에게 향했다.

그는 숨을 빨아들여 불을 붙였다.

손은 떨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마를 짚고 연기를 내뿜었는데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이런 일로 상처 나선 안 돼요.”

“그래.”

“나 같은 것 때문에 이러면 안 되 는데.”

“안 되는데

결국 눈물을 터뜨린 한스 이안은 케르바 슈타인이 보는 앞에서 통곡 했다.

서른여섯 먹은 남자는 놀이터에서 넘어진 아이처럼 울었다.

케르바 슈타인은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자리를 지켜주었다.

쾅.

그때 흠연실의 문이 튀어나와 요란 하게 부딪쳤다.

깜짝 놀란 케르바 슈타인과 한스 이안이 고개를 돌렸고 성난 이승희 와 눈을 마주쳤다.

“••••••승희?”

눈물범벅인 한스 이안이 앞을 보기 위해 눈물을 훔치다가 이승희에게 멱살을 잡혔다.

“왜 이러고 있어!”

“아, 아니.”

“안 때렸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한스 이안을 보다 가 이승희가 케르바 슈타인을 째려 봤다.

그가 슬금슬금 흡연실에서 빠져나 가자 다시 한스 이안과 눈을 마주친 이승희가 추궁을 계속했다.

“뭘 잘했다고 질질 짜고 있어?”

“기억이 확실하진 않아서.”

“안 때렸잖아!”

“아, 안 때렸어.”

“바보처럼 맞기만 했잖아. 어!”

이승희의 말에 한스 이안이 괜한 오기를 부렸다.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은.”

“맞기만 했잖아!”

“맞기만 했어. 어. 맞기만 했어.”

크게 놀란 탓에 눈물이 쏙 들어간 한스 이안을 보며 이승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 아래가 묵직해져 목소리가 제대 로 나오지 않았다.

“연습실로 돌아가. 세프하고 단원 들한테 그런 일 없었다고 제대로 말하고. 다시 연습하라고.”

“오늘 연습은……

“기다리고 있어. 다.”

한스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베를린 필하모닉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었을 때의 본 인을 대체 어떻게 받아준 건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 망나니 자식에게 독주자로서 의 기회까지 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자신을 응원해 주고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미안해서.

그 위대한 음악가들의 이름에 먹칠을 한 자신이 미워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승희, 난.”

그가 눈을 떠 도망치려 할 때.

이승희가 그의 입을 막았다.

부드럽게 전해지는 열기.

이승희의 뜨거움 숨을 마신 한스 이안이 눈을 껌뻑였다.

“지금 하려던 말. 다시 하려 했단 봐. 죽어도 용서 안 할 거야.”

멍청하게 네 번 더 깜빡이자 이승희가 멱살을 풀며 한스 이안을 밀쳐 냈다.

“갈 거야, 말 거야!”

“가, 가!”

“후딱 뛰어가!”

한스 이안이 일단 연습실로 뛰기 시작했다.

2013년 8월 14일.

서른 살 생일을 한스랑 보내는 것도 우울한데 뭔 거지 같은 놈이 시비를 걸었다.

질이 안 좋은 인간 같아서 자리를 피하려는데 한스 그놈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욕을 해댔다.

도망가라면서 얻어맞는데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경찰을 불렀다.

왜 바보 같이 맞고만 있었냐고 묻 자 사고 치면 베를린 필하모닉이 욕 먹는다며 중얼거리곤 기절했다.

언제 철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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