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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60화 (36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60화

    78. 불굴의 피아니스트(7)

    이른 아침.

    “도련님, 손님 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최지훈은 눈을 깜빡거 릴 뿐이었다.

    배도빈은 일정이 있어 곧장 베를린으로 돌아갔고 차채은 역시 기사 준비를 하느라 당분간 바쁠 테니 찾아 올 사람이 딱히 없었다.

    “니나 누나예요?”

    약속한 것이 없어 의아하게 물었는 데 말하면서 생각해 보니 연락도 없이 올 사람도 아니고, 니나 케베리 히라면 ‘니나 케베리히 양’이라고 했을 터였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양입니다.”

    “ 아.”

    의외의 인물이었다.

    “안내해 주세요.”

    잠시 후, 엘리자베타가 최지훈이 머무는 방에 들어섰다.

    문 앞에 서서 잔뜩 화가 난 얼굴 로 내부를 살폈는데 이내 최지훈이 나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잘 왔어요.”

    빙그레 웃으며 차를 권하자 엘리자 베타는 얼굴을 굳힌 채 안으로 들어 섰다.

    본인이 당황한 것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그녀는 최지훈이 머무는 호텔 내부가 믿기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부자면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거야? 한 달째 아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다.

    집사는 그들 사이에 다과와 차를 두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어떻게 먹는 거지.’

    생전 처음 보는 디저트에 엘리자베 타가 망설이는데, 그것을 본 최지훈 은 그녀가 당황하지 않도록 말을 건 뒤, 자신의 몫을 먹었다.

    “브뤼쉘 아침은 산책하기 좋은 거 같아요. 조용하고.”

    다과를 보고 있던 엘리자베타가 최지훈의 말을 듣곤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뭐. 그렇지.”

    엘리자베타는 최지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왜 자꾸 웃어?’

    이해할 수 없었다.

    피아노를 당분간 못 치게 되었고 그 불행으로 초래된, 또는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악보들을 볼 수 있었다.

    “저건?”

    엘리자베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최지훈이 조금 당황했다.

    “아쉬워서 보고 있었어요. 당분간 연주는 못 하니까 악보라도 보려고.”

    엘리자베타는 침을 삼켰다. 그에게 전할 말을 꺼내기 적당한 때라 여겼다.

    “난 네가 정말 싫어.”

    엘리자베타는 방실방실 웃고 있던 최지훈의 얼굴에 금이 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좋은 환경도 싫고 배경이 있는 것 도 싫어. 그러면서도 착해 빠져서 웃기만 하는 것도 멍청해 보여.”

    갑작스레 다가온 말에 최지훈이 어 색하게 웃었다.

    “항상 내 앞에 있는 것도 싫어. 너 처럼 태평해 보이는 사람한테 지고 싶지 않아.”

    비록 친구라 할 순 없었지만.

    여러 콩쿠르에서 만나오며 선의의 경쟁을 했던 엘리자베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네 피아노는 좋아했어.”

    엘리자베타는 여전히 화난 듯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대로 포기하면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치료받고 다시 무대에 섰을 때 적어 도 지금보다 못 해지면 정말 용서하 지 않을 거야.”

    억지였다.

    그러나 솔직하지 못한 응원이기도 했다.

    “앞서놓고 마음대로 그만두지 마.”

    최지훈은 작게 웃었다. 이내 소리 내기 시작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왜 웃어?”

    “응원해 줘서 고마워요.”

    “누가!”

    “지금까지.”

    최지훈의 말에 엘리자베타가 말을 삼켰다.

    “여러 콩쿠르에 다녔지만 싫다는 말 직접 들은 적은 처음이에요. 조 금 충격이지만 그래도 제 연주 좋다 고 해준 참가자도 툭타미셰바 씨뿐 이었어요.”

    엘리자베타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분명 날 귀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겠지.”

    “네. 조금.”

    “뭐?”

    “볼 때마다 싫은 티 내니까 저라도 상처받는다고요.”

    “……멍청인 줄 알았는데 할 말은 하네.”

    “툭타미셰바 씨가 솔직하게 말해줬 으니까.”

    가장 힘들 때조차 웃는 그를 보며.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자신보다 어린 그가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 강하다고.

    이런 사람이니까 이기지 못했던 거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뒤처진 채 남겨지 고 싶진 않았다.

    최지훈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알지만, 이제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철이 들기도 전부터 함께 했던 피아노와 자신의 노력이 사라 지는 것은 아니었다.

    “갈래.”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피아노 파보드(Fallboard: 건반 뚜 껑)는 열려 있고 보면대 위에는 빼곡하게 메모된 악보가 놓여 있었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것처럼 살짝 빠져 나와 있는 피아노 의자와 테이블 위의 어지럽게 펼쳐진 악보와 노트.

    한 달 정도 머물렀던 방마저 그의 노력과 아쉬움이 깃들어 있었다.

    숨을 크게 내쉰 엘리자베타 툭타미 셰바는 그간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아니, 인정하지 않으려던 것을 받아 들였다.

    좋은 환경을 가져서.

    뛰어난 재능을 가져서 이길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 길로 최지훈의 방을 나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최지훈이 회복할 때까지 자신을 보 다 더 갈고닦기 위함이었다.

    “순둥이 어딨어!”

    며칠 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폐막식 전 날, 가우왕은 씩씩대며 최지훈을 찾았다.

    “가우왕 씨!”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최지훈은 가우왕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들이 돌아가며 속을 썩이네? 내가 왜 이런 곳에 왔는데!”

    “아하하.”

    최지훈은 자신을 올려다보며 화내는 가우왕을 보며 난감하게 웃었다.

    “웃지 마! 손은!”

    “치료받고 있어요.”

    “낫는대? 얼마나? 완쾌는!”

    “1년 정도 걸릴 것 같대요. 잘 관리하면 다 나을 거고요.”

    “제길. 제길!”

    ‘세계’를 향해 태동을 보였던 최지훈과의 멋진 경합을 기대했다.

    가우왕은 그의 손을 확인하곤 속으로는 안도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질을 부렸다.

    거칠게 의자를 빼내곤 최지훈의 커 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컥! 드럽게 맛없네!”

    중국어를 모르는 최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가우왕은 입맛을 다시며 점원에게 차가운 초콜릿 라떼 두 잔을 주문했다.

    “아, 저는 괜찮아요.”

    최지훈이 한 잔을 취소하고 작은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마셨다.

    “그건 뭐야?”

    “파인애플 주스요. 툭타미셰바 씨가 줬어요.”

    “파인애플?”

    “염증에 좋대요. 안 줄 거예요.”

    “너나 많이 마셔.”

    가우왕은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곤 계속해서 혼자 구시렁댔다.

    “빌어먹을. 이러면 대체 여긴 왜 왔냐고.”

    “그래도 니나 누나랑 하게 되었잖아요. 그거 들으려고 계속 남아 있었어요.”

    “흥. 그런 괴상한 연주하는 애한테 관심 없어.”

    가우왕이 니나 케베리히의 월광과 비창을 좋아하는 걸 아는 최지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뭐 좋다고 자꾸 실실거려? 내가 여기 오려고 얼마나 많은 오퍼를 캔슬 했는지 알아?”

    “알죠. 다음에도 해주실 거죠?”

    기죽어 있을 줄 알았던 최지훈이 도리어 뻔뻔하게 나오자 가우왕은 내심 안도했다.

    “너 배도빈이랑 놀지 마. 뻔뻔한 거 닮는 것 같다.”

    “히히 힛

    ‘그래도 이겨냈나 보네.’

    그 화려함에 가려질 뿐이었지 어려 서부터 몸을 혹사시켰던 배도빈과 최지훈 모두 위태로워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유망한 음악가였기에 가우왕은 고집불통의 ‘두 꼬맹이’가 조금은 본인 몸 관리를 했으면 싶었다.

    “빌어먹을 할망구 코 납작하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크리스틴 지메르만 선생님 말 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래. 이제 품위를 갖춰야 할 나이가 아니니?”

    “컥!”

    초콜릿 라떼를 마시던 가우왕이 스승의 목소리에 놀라 사레에 들렸다.

    캑캑대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지메르만이 최지훈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간신히 진정한 가우왕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지훈 군 연주를 들으려고 왔단다. 애석하게 되었지만 파이널 라운드도 즐겁더구나. 겸사겸사 소중한 제자 가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지는 모습 도 보고 싶고.”

    “하!”

    가우왕이 기가 차다는 듯 비웃었다. 그러고는 크리스틴 지메르만을 등진 채 입 주변을 닦았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상냥한 목소리 로 최지훈에게 손을 뻗었다.

    “저도 고생한 적이 있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쉬는 동안 어때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말에.

    최지훈의 눈이 떨렸다.

    “할 수 있는 일이요?”

    “건반을 못 친다고 해서 피아노와 떨어져 있을 필요는 없죠.”

    부드러운 표정에 최지훈은 고민하지 않았다.

    “부탁드려요.”

    “야! 내가 이 할망구 말 듣지 말라 했지!”

    가우왕은 크리스틴의 시선을 받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아……. 오늘은 어머님이랑 약속이 있어요. 도진이도 함께 와서. 내 일은 안 될까요?”

    “어머님?”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잠시 생각하 다 배도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 도빈이 어머니신데 그게.”

    “괜찮아요.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사정은 알고 있고 저는 입이 무거우 니까.”

    “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폐막식.

    엘리자베스 왕의 축사와 함께 시작된 가우왕과 니나 케베리히의 번외 경합은 전 세계 6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색이 분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피아니스트답게 두 사람의 연주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니나 케베리히가 정한 세 곡의 소나타를 번갈아 연주하는 룰.

    비창, 월광, 템페스트.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가 연주되었고 니나 케베리히는 자신의 향을 덧입힌 연주를 벨기에 전역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세계’를 지배한 가우왕의 아성을 넘어설 순 없었고.

    그렇게 202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여러 이야기를 만들며 아름답게 막을 내렸다.

    [본선만큼이나 화려한 무대!]

    [가우왕. “니나 케베리히는 훝륭한 피아니스트. 이미 완성되어 있다.”]

    호의적인 기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대표 잡지 관중석은 차채은의 특집 기사를 영어와 병기하 여 온라인에 선등재해 많은 호평을 받았고.

    프랑스에 연고를 둔 삼류 잡지 ‘레 자미(Les amis)’가 등재한 기사는 가우왕의 심기를 거스름과 동시에 많은 팬에게 작은 웃음을 주었다.

    [우승의 영광을 얻은 피아니스트를 질투한 거장】

    지난 토요일, 벨기에 브뤼셀 파인 아츠 센터에서 황제 가우왕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우승자 니나 케 베리히와 경합을 벌였다.

    관계자 질 루앙은 이번 특별 경합 은 가우왕의 요청으로 성사되었다고 밝혔다.

    첫 메이저 콩쿠르 우승을 거머쥔 유망한 피아니스트는 분전했지만 거장을 넘어서진 못했다.

    굳이 벨기에까지 찾아가 우승의 기 쁨도 다 누리지 못한 그녀를 혼내줄 필요가 있었을까?

    가우왕은 그날 빨간 셔츠에 빨간 바지, 빨간 구두를 신는 하이패션을 보여주었다.

    (후략)

    삼류 잡지 ‘레 자미’는 해당 기사로 그들의 최고 판매 기록을 경신하였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ㄴ 가우왕 진짜 미치겠닼ㅋㅋㅋㅋ

    ㄴ 진짜 저러려고 나간 거임?

    ㄴ 그냥 어그로 끄는 거잖앜ㅋㅋㅋㅋ

    ㄴ 근데 진짜 가우왕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음ㅋㅋ

    ㄴ 가우왕 좀 그만 까랔ㅋㅋㅋㅋ

    ㄴ 아, 거장님. 꼭 후배를 그리 패야 했습니까?

    ㄴ ㅈ나 불쌍해 -rr-n-

    ㄴ 누가 가우왕한테 옷 입는 법 좀 가르쳐 줰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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