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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58화 (35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58화

    78. 불굴의 피아니스트(5)

    -그래. 잘 생각했다. 푹 쉬고 오렴. 무리하지 말고.

    “네, 아버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통해 한계를 넘어서고.

    가장 위대한 음악가인 형제와 당당히 함께하고 싶었던 최지훈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만 합리적인 그의 이성과 달리, 잊으려 해도 이따금 치미는 슬픔은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최지훈은 그저 삭일 뿐이었다.

    배도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걱정이었다.

    함께하자고 했는데.

    조금 더 미뤄질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무대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하나의 곡을 연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에 더욱 그러했다.

    “유감입니다.”

    “ 네.”

    최지훈의 진출 포기 소명에 퀸 엘 리자베스 콩쿠르 운영위원회 역시 애석함을 내비쳤다.

    최지훈이 포기 확인서를 작성하고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심사 위원 장이자 기악부장, 운영회장인 질 루 앙이 최지훈에게 미팅 요청을 해올 정도로.

    그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중 요한 인물이었다.

    “독대는 처음이네요.”

    “그럴 수 없었으니까요.”

    당장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서로 참가자와 심사 위원이란 입장이었기 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많이 안 좋으시다고.”

    “ 네.”

    질 루앙은 혹시나 최지훈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을까 싶었으나.

    그의 표정을 확인하곤 말을 삼켜야 만 했다.

    틀림없이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을 본인에게, 불가능한 일을 권유할 순 없었다.

    ‘ 안타깝군.’

    질 루앙은 진심으로 애석해하며 이른 시일 내에 완쾌할 것을 빌어주었다.

    2024년 5월 25일 오후 2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현재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피아니스트가 모인 만큼 언론의 관심은 지대했고, 들뜬 마음으로 브뤼셀을 찾은 팬만큼이나 각국 주요 언론에서 도 취재를 나와 있었다.

    그러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첫 번째 화제는 그들 모두 예상치 못한 데에서 터지고 말았다.

    “ 뭐야.”

    “최지훈 아니야?”

    “왜 객석에 있어?”

    파이널리스트이자 이번 대회 최고 의 우승 후보, 최지훈이 객석에 모습을 드러낸 것.

    결승전이 시작되면 결승곡 과제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순서에 맞게 퀸 엘리자베스 뮤직 채플로 입장해야 하는데.

    예배당에 있어야 할 최지훈이 멀쩡 히 나타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를 포착한 기자들 은 그 즉시 달려들어 인터뷰를 시도 했다.

    “미스터 최! 결승전은 어떻게 된 겁니까?”

    “현재 많은 사람이 당신의 세 번째 메이저 콩쿠르 우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포 기하신 겁니까?”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리스 텀지의 사라 기자였다.

    최지훈의 전담 기자나 다름없었던 그녀는 최지훈이 이번 달 안에 전대 미문의 대기록을 세울 거라 믿어 의 심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간 모아두었던 자료 들과 함께 최지훈에 관한 기사를 대대적으로 낼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다소 과소평가 받고 있었던 여론을 단숨에 뒤집어놓을 요량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녀는 기자들 사이를 억지로 비집 고 나와 최지훈과 눈을 마주쳤다.

    이내 누군가의 억센 어깨 때문에 얼굴이 찌그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 한 걸음만 남았는데 콩쿠르를 포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라의 외침에 최지훈이 평소와 같이 웃으며 답했다.

    “관심 가져주신 분께 진심으로 사 과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소속사 로 문의해 주세요.”

    그 힘 없는 미소에.

    사라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항상 밝고 투명 하게 웃었던 최지훈이었기에, 그 힘 없는 미소와 사과 그리고 슬픈 눈망 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한편.

    다른 기자들은 최지훈이 더 이상 인터뷰에 응하지 않자, JH 엔터테인 먼트와 콩쿠르 운영위원회에 이와 같은 사실을 문의했다.

    두 단체 모두 불필요한 이야기 없이 간결하게 상황을 전달했고 그 내 용은 즉시 기사화되었다.

    [최지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포기 선언!]

    [유망한 피아니스트에게 무슨 일이?]

    【최지훈. 지난 4년간 염증으로 고통받아]

    【통증 부위만 7곳. 천재의 뒷모습】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운영위원회 공식 입장, “탁월한 참가자에게 닥친 불행에 유감. 이른 시일 내에 쾌차 하길 바랄 뿐.”]

    해당 보도에 팬들은 충격에 빠졌다.

    ㄴ 세상에나.

    ㄴ 피아노 친다고 손이 저렇게 망가져?

    ㄴ 키보드만 오래 써도 망가짐. 사무직 종사자들은 다 가지고 있잖아.

    ㄴ 내 이럴 줄 알았어 TTTT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무리하더니. 몇 번 쓰러졌었잖아.

    ㄴ 도빈이도 지훈이도 진짜 자기 관리 좀 잘했으면 좋겠음 ㅠㅠ

    ㄴ 맞아. 열심히 해주는 것도 좋지만 오래 듣고 싶다구.

    ㄴ 대체 얼마나 혹사시켰기에 고작 20살 먹은 애 손가락이 저 지경이 된 거야?

    ㄴ 그렇게 노력해서 저 위치에 간 듯.

    ㄴ 부상은 뭔 ㅋㅋㅋ 딱 봐도 우승각 안 나오니까 빤스런한 거잖앜ㅋㅋㅋ 지가 뭔 배도빈인 줄 알아. 3대 콩쿠르 제패는 무슨ㅋㅋㅋㅋ

    ㄴ 지는 서른 넘도록 방구석에서 엄 마 등골이나 빼먹는 주제면서 1년에 몇억씩 버는 애한테 훈장질이네.

    ㄴ 딜 력 무엇ㅋㅋㅋㅋ

    ㄴ 아 진짜 얼마나 힘들까? 웃고 있으니까 더 슬프다 TT 천사라고 해도 믿을 거야irm

    ㄴ 천사 맞음.

    ㄴ 그게 뭔 소리야?

    ㄴ 뭐야, 안 믿네.

    ㄴ 정말 큰 기록 세우기 직전이라 너 무 아쉽다. 나도 이렇게 아쉬운데 본 인은 얼마나 힘들까 싶네. 힘냈으면.

    클래식 음악계가 떠들썩할 때 베를린에 있던 배도빈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하던 진달래가 기사를 보고 입을 가렸다.

    몇 번을 봐도 달라지지 않는 내용에 깜짝 놀란 그녀는 최지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파이널 라운드를 관람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둔 최지훈이 받을 리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진달래를 본 배도빈이 의아해하며 다가갔다.

    “뭐야?”

    배도빈을 보자 울상이 된 그녀가 조심스레 핸드폰을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배도빈은 가슴이 무 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잘 생각한 거야. 무리하다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많이 안 좋아?”

    “그렇진 않을 거야.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럼 다행이고.”

    “남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부터 해. 2주밖에 안 남았잖아.”

    "응."

    최지훈을 걱정하던 진달래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고도 기운을 못 차리다가 편곡 작업을 맡게 된 나윤희가 코멘트할 것이 있다며 부르자 뺨을 쳐 기합을 넣고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배도빈이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문에 기댔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주르륵 미끄러지 고 말았다.

    그대로 주저앉은 배도빈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예상했던 일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다행이지만 그러한 상황을 강요받은 최지훈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눈치채지 못 하고 위로해 주지 못했던 자신이 싫었다.

    ‘괜히 했나.’

    배도빈은 최지훈에게 괜한 부담이 지워졌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또다시 테메스의 힘에 기대 게 되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테메스 부족의 힘은 기적이 아니라 고 들었지만 기적을 경험했던 배도빈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덜컹-

    그때 마침 연습실 문이 열리고 스칼라가 나섰다.

    “뭐 하고 있어?”

    “……잠깐 따라와 봐.”

    배도빈은 본인의 집무실로 스칼라를 끌고 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당황한 스칼라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대했다.

    “방음실이야. 여기서 나는 소리 아무도 못 들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테메스인들의 힘. 쓰는 법 좀 알려줘.”

    “ 뭐?”

    “알려줄 수 없으면 한 사람 좀 봐 줬으면 해.”

    스칼라는 평소 배도빈답지 않은 모습에 당황하다 강경한 태도 뒤에 숨 겨진 간절함을 엿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앉은 스칼라가 배도빈도 앉을 것을 권했다.

    “일단 진정해.”

    배도빈이 순순히 앉자 그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 힘은 기적이 아니야. 단순히 심신을 안정시킬 뿐 이지. 몸 상태가 좋아지면 스스로

    회복하는 힘도 생길 테니까. 건강해 질 순 있어도 무슨 병을 고치거나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은 없어. 그런 게 있었다면 초능력이지.”

    “우릴 이용하려 했던 이들도 결국 엔 그걸 깨닫고 포기했어. ……억지 로 끌어내려고 끔찍한 실험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걸 찾을 수 있을 리 없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사실이야.”

    “내 눈은.”

    배도빈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었다.

    “내 눈은 그럼 뭔데.”

    “그래서 나도 할아버지도 놀랐잖아. 정말 기적이라고. 어쩌면 일시적 인 충격으로 인한 일이었는지도 모 르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스칼라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최지훈의 손을 낫게 해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배도빈은 한 번 더 좌절했다.

    ‘……안 될 일이지.’

    최지훈의 병환으로 잠시 이성을 잃었다가 조금씩 혈기가 가라앉으면서 이내 자신이 하려던 일이.

    테메스를 이용하려던 ‘그들’과 다 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단지 기적이었을까.

    하는 의문과 최지훈이 느낄 죄책감 이 심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

    마크 피레스 관리장으로부터 한 명 의 참가자가 기권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말도 안 돼.’

    최지훈을 목표로 자신의 한계를 넘 어서길 반복했던 엘리자베타 툭타미 셰바는 최지훈의 상태를 믿을 수 없었다.

    보통 그러한 일은 잘못된 자세가 장기간 누적되었을 때 생기는데, 최지훈의 경우 그녀가 아는 누구보다도 바른 자세를 보였다.

    본래부터 몸이 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보기에 최지훈은 건장했다.

    마른 편이긴 하지만 넓게 벌어진 어깨와 큰 키는 건강하게 잘 가꿔진 모습이라 부드러워 보일 뿐, 유약한 이미지는 없었다.

    넘어설 수 없었던 최지훈이란 존재 가 어쩌면 본인처럼 노력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개를 저은 그녀는 이를 악물고 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브뤼셀 필하모닉과 함께 ‘A108’이 라는 부제가 달린 미발표곡, 피아노 협주곡 C장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전주가 달린 곡이었다.

    독일 민요 ‘소년 한스’.

    한국에서는 ‘나비야’의 멜로디가 처연하게 울렸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관람하던 팬들의 즐거움 중 하나는 지금까지 발표되지 않았던 새로운 곡을 듣는 것이었다.

    그만큼 교양 있는 이들이었는데.

    갑작스레 들린 익숙한 멜로디에 슬며시 웃었다.

    재밌는 시도라고 생각하며 작곡가의 귀여운 장난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단 한 사람.

    최지훈만은 웃을 수 없었다.

    전주만 들었을 때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본 연주에 들어서면서 느껴지는 심상.

    그리고 부제까지.

    이 곡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무엇을 생각하며 만들었는지 알았기에.

    눈앞의 무대에 서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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