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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57화 (35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57화

    78. 불굴의 피아니스트(4)

    최지훈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서는 것 이외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꿈도 본인 몸이 건강해야 꾸는 거 예요. 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던 의사의 눈 에 최지훈이 들어왔다.

    그는 떨고 있었다.

    그 순간 겨우 20살인 남자의 손이 이 지경이 되려면 그간 무엇을 어떻게 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노력.

    스스로를 혹독하게 밀어붙일 만큼 연습했을 것이 뻔했다.

    의사의 목소리가 다소 부드러워졌다.

    “……치료 기간은 1년입니다.”

    최지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큰 눈이 그렁대고 있어 의사는 차마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수술을 권하긴 조 심스럽습니다. 3년 전에 특효약이 개발되었으니 간단한 시술과 병행하 면 돼요.”

    “그래도 안 쓰는 게 최선입니다. 완치 기간은 6개월이 될 수도 1년이 될 수도 2년이 될 수도 있어요. 환자 분의 노력에 달린 거예요.”

    의사는 최지훈의 손 상태를 확인하 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연주를 했던 건지. 본인의 바른 자세에 고마워하세요. 그마저도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으니까.”

    ‘역시 포기해야겠지?’

    몇 번을 생각해도 의사 선생님 말 씀이 맞다.

    1년 정도 치료에 힘쓰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니까.

    재활을 충분히 하면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1년 정도 안 친다고 해도 또 노력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조금 돌아가는 것뿐이야.

    어차피 피아노 말고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 없잖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조금 무뎌지는 건.

    어쩔 수 없지.

    다시 감을 찾기까진 얼마나 걸릴까?

    이제 겨우 다른 옷도 입혀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좋아했지.’

    그동안 단정한 옷만 입혀서 그런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피아노는 너무 도 기뻐했다.

    이제 다른 옷도 주고 싶은데.

    그래.

    직접 연주는 못 해도 쉬는 동안 어떤 옷을 입힐지 생각해 보면 되겠다.

    조금 과감해도 괜찮겠지?

    가우왕 씨처럼 원색과 가죽 소재를 써도 멋질 것 같고 도빈이처럼 트위 드를 써도 될 것 같다.

    니나 누나가 자주 쓰는 올리브색 쉬폰도 과감하지만 입혀보고 싶고 툭타미셰바 씨처럼 이른 새벽의 하 늘 같은 쉬폰도 좋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블레하츠 씨의 포근한 캐시미어도 좋았지.

    ‘왜.’

    맞아.

    따뜻한 건 사카모토 선생님이 최고였어. 울이 많이 섞인 것 같았어.

    혼합해서 쓰는 것도 재밌겠다.

    ‘왜.’

    또 누가 있었지?

    빨리.

    맞아. 크리스틴 지메르만 선생님은 좀 특이했던 것 같아. 순면에 색이 없는데도 너무 깨끗해서 더 예뻐 보였어.

    그런 연주를 할 수도 있구나 싶어 서 자꾸만 듣게 되고.

    따라 할 순 없을 것 같지만 그래 서 동경했어.

    그렇게 서로 아끼면서 가우왕 씨랑 안 맞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왜.’

    무슨 옷이 있었지?

    아, 성신 선배.

    탄성이 강한 레이온 같아서 정말 좋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좋은 생각만 하려 해도 치미는 감 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제 겨우 피아노랑 친해진 것 같은데, 볼 수조차 없었던 곳에 닿았는데.

    정말 노력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억울해.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노력하면 될 거라 생각해서, 그냥 좋아해서 열심히 했는데.

    이제 정말 도빈이랑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한테는 노력하는 방법밖엔 없었는데.

    그랬을 뿐인데 대체 왜.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5월 22일 오후.

    차채은이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작년에 발표한〈배도빈 음악의 철 학: 베토벤을 계승한 자〉를 통해 베를린 대학에 특례 입학을 확정한 차채은은 보다 본격적으로 칼럼리스트 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필호 편집장은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그녀의 가능성을 재확인.

    월간 〈관중석〉에 차채은의 전담 코너를 기획하여 10페이지의 지면을 할애해 주었다.

    기회를 잡은 차채은에게 2024년 최고의 화제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보다 좋은 활동처는 없었고.

    그렇게 취재차 브리쉘을 방문한 차채은은 최지훈이 머무는 호텔에 체 크인을 했다.

    짐을 풀자마자 모레 퀸 엘리자베스 뮤직 채플에 입장할 최지훈을 응원 하려 그의 방을 찾았을 때.

    그녀는 희망과 총기를 잃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 오빠?”

    “어서 와.”

    최지훈이 애써 웃으며 차채은을 안으로 들였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차채은이 최지훈의 손을 잡아끌어 앉혔다.

    그는 차채은을 보다가 웃었다.

    “아무 일 없어. 놀래켜 주려고. 나 연기 잘하지?”

    “뭐?”

    “영화 주연으로 출연도 했다구. 망했지만.”

    “응. 재미없긴 했지……

    “아하하하. 너무하네!”

    최지훈이 크게 웃으며 마실 것을 가지고 왔다. 적당한 온도의 애플 주스를 두곤 룸서비스 안내 책자를 찾았다.

    “저녁 아직이지? 뭐 먹을래? 여기 연어 스테이크 괜찮던데.”

    “무슨 일인데.”

    “……연기를 못 해서 그랬나.”

    최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 치료 받아야 한대. 1년 정도.”

    깜짝 놀란 차채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1년이나 치료 받아야 할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지훈은 너무 놀란 탓에 선뜻 위 로조차 건네지 못하는 차채은을 앞 에 두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더 무리하면 못 쓰게 될 수도 있대. 어젠 신경 주사 맞았는데 통증 이 사라져서 정말 아픈 건가 싶기도 하고.”

    말을 이어나가던 낭랑한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대회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남아 있는데, 그러다 정말. 정말 못 치게 되면 어쩌나 무 서워서…… 이러고 있어.”

    “아니야. 괜찮을 거야. 치료 받으면 꼭 나을 거야.”

    차채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아차 싶었는데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었다.

    음악가에게 감은 그 무엇보다 중요 한 요소였고 1년이란 공백은 쉽게 메울 수 없었다.

    기껏 걸어온 길을 다시, 더욱 힘든 방법으로 반복해야 한단 사실이 얼마나 큰 절망일지.

    최지훈이 그 누구보다 노력했음을 아는 그녀로서는 섣불리 위로할 수 없었다.

    차채은은 최지훈의 손을 보다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그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슬펐다.

    얼마나 좌절하고 분하고 억울했을지.

    지금도 다르지 않을 텐데, 내색하 지 않으려고 웃으며 문을 열어준 것 부터.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까지.

    차채은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떨 어뜨리고 말았다.

    “무서웠지……

    최지훈은 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되었다.

    “왜 말 안 했어. 왜 바보 같이 혼자 힘들어 했어어.”

    “그러게.”

    “끄읍. 도빈 오빠는? 알아?”

    최지훈이 고개를 젓자 차채은이 칭얼댔다.

    “친구라곤 나랑 도빈 오빠밖에 없으면서 왜 자꾸 강한 척 하는데. 끄읍. 기대도 된다고.”

    갑작스레 가슴을 후벼 파인 최지훈 이 차채은의 말을 부정했다.

    “나 친구 있어.”

    “거짓말 마. 친구 없잖아앙. 왜 자꾸 센 척 하는데. 하나도 안 멋있어. 끄읍. 많이 아프지? 아프지 않은 것도 거짓말이지?”

    니나 케베리히도 친구라고 말하려던 최지훈은 그럴수록 구차해지는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그의 머리에 친구라고 할 사람이 정말 배도빈, 차채은, 니나 케베리히 이외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차채은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애애!”

    며칠간 절망에 빠져 있던 최지훈은 괴롭히는 건지 슬퍼해 주는 건지 모를 차채은의 곡소리를 들으며.

    3일 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

    차채은이 간신히 진정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저녁 식사를 받았다.

    한참을 운 탓에 입맛이 없었던 차채은은 무감각하게 연어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고, 폭신한 식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맞은편에 앉은 최지훈과 시 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미쳤다. 미쳤어.”

    “맛있지.”

    “개맛있어.”

    혹시 몰라 주문한 클래식 버거까지 해치운 차채은이 포만감에 만족하며 입 주변을 닦았다.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아, 칼럼 때문에.”

    최지훈은 차채은이 전담 페이지를 할애 받았단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 했다.

    “진짜 잘 됐다.”

    “그치? 이번엔 오빠 이야기로 쓰려고 했는데.”

    즐거웠던 대화가 잠시 우울해졌다.

    최지훈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복귀할 때 멋있게 써주라.”

    그 말에 차채은이 가슴을 탕탕 두 르려 보였다.

    “맡겨만 줘.”

    그 모습이 믿음직스러워 웃었다.

    “특집 기사 쓸 거면 궁금한 거 많겠다.”

    “응. 오빠는 누가 우승할 것 같아? 세미파이널은 연주 다 들어봤잖아.”

    “으음. 역시 니나 누나가 아닐까.”

    “역시?”

    “응. 연주가 엄청 세련되어졌어. 쉬 폰 같은 느낌.”

    “쉬폰? 쉬폰이 뭔데?”

    “원단. 왜 살짝 비치는 거 있잖아. 드레스나 블라우스에 들어가는. 세 미파이널에선 하늘색 블라우스였어.”

    “어…… 연주가 원단 같다고?”

    차채은이 눈썹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표현이 좀 어렵나?”

    “어려운 게 아니라 이상해.”

    “아하하. 그런가. 난 그렇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 연주도 그래?”

    “응. 도빈이는 트위드.”

    “그건 또 뭔데?”

    “두텁고 까끌까끌한데 되게 멋지다 고 해야 하나?”

    트위드를 검색해 본 차채은이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실치 않은 느낌을 받아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다. 이런 걸 시너스시저라 고 하나?”

    “시너스시저?”

    “응. 공감각이라고. 예술 하는 사람 은 왜 동시감각을 가졌대잖아. 오빤 소리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나 보다. 옷이나 원단 같은 걸로.”

    최지훈은 어떤 감각에 주어졌을 때 다른 영역의 감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감각 전이 현상을 떠올렸다.

    “도빈 오빠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했는데. 천재들은 다 그런가 보네.”

    “이 야기?”

    "음."

    차채은의 말에 최지훈은 가슴이 몹시 뛰었다.

    지금껏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경지 가 바로 이것임을 확신한 탓이었다.

    거장의 반열에 이른 음악가들은 저마다의 확고한 세계가 있었다.

    말 그대로 ‘세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고자 망망대해를 헤엄쳤거늘.

    오케스트라 대전을 시작으로.

    피아노에 옷을 입히기 시작했던 최지훈은 그것이 자신만의 세계라는 것을 인지했고.

    그것이 배도빈과 같은 거장들의 ‘무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 내가.’

    터질 듯한 기쁨.

    그렇기에 당장 피아노를 칠 수 없는 상황이 더욱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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