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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56화 (35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56화

    78. 불굴의 피아니스트(3)

    “……브라움 악장 괜찮을까?”

    “이미 죽은 거 같은데.”

    “누가 가서 건드려 봐.”

    정기 연주회, 웃고 떠드는 밴드와 해상 오케스트라 준비, 개인 리사이틀 그리고 베를린 대학 강의로 지난 5개월간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찰스 브라움은 점점 시들어갔다.

    그런 반면 베를린 필하모닉은 긍정 적인 방향으로 개편되고 있었는데.

    배도빈 악단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0명의 경력직을 뽑은 사무국은 정상적인 업무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고.

    주 3회 정기 연주회를 주 2회로 줄인 덕에 연주진이 느끼는 부담도 줄었거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유일하게 찰스 브라움만은 행복할 수 없었다.

    “저번 달부터 좋아졌잖아. 왜 저러시지?”

    “우리보다 하는 일이 많잖아. 밖에 서 하시는 일도 있고.”

    “ 흐음.”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무직원 기준 근무 시간은 주 40시간으로, 35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다른 업계와 비교 하면 충분히 길었지만.

    귄터 부르비츠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체제의 베를린 필하모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했다.

    “솔직히 밖에서 하시는 일 줄이는 게 맞지 않나?”

    “그것도 그래.”

    다만 높은 보수와 강도 높은 업무 라는 과도기를 거쳐 철저히 성과제 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탈락하는 이들도 발생했다.

    카밀라 앤더슨 국장은 지난 1년간 의 업무 성과를 기준으로 21명의 직원에게 6개월간의 데드라인을 부여.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못할 경우 차등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가장 심각할 경우 해고까지 포함된 강력한 체제였기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 들어오실 때부터 약속했던

    일이라니까. 게다가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브라움 악장이 가장 일 많이 했던 건 다들 알고 있잖아.”

    “그것도 그렇네.”

    “난 좀 다른 생각이야. 일단 살고 봐야지. 저렇게 얼마나 더 버티시겠어. 언젠가 한쪽 선택하실 날이 올 텐데 그때 베를린 필하모닉 떠나신 다고 생각하면…… 좀 슬프긴 해.”

    한편 단원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 준이 적용되었는데.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 그리고 악 장단이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한 이 들답게 지난 1년간의 업무 성과에서 전원 통과한 상황에서.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인 찰스 브라움.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차지하 고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그의 건강 악화가 심히 우려되는 문제였다.

    “브라움 악장.”

    “브라움 악장.”

    연습실 한쪽에서 파이어버드를 꼭 껴안고 있는 찰스 브라움은 몇 번을 불려도 답이 없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은 갈라진 지 오래였고 백옥 같던 피부는 푸석푸 석해져 있었다.

    자기애로 가득했던 눈빛은 썩은 동태처럼 초점을 잃어 누구든 그가 정 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찰스 브라움의 3중 생활.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 역할뿐만 아니라 솔로로서, 베를린 대학 음대 정교수로서도 활동하는 그의 역할이 너무도 많은 탓이었다.

    때문에 배도빈으로서는 악단 내부 에서의 일을 아무리 줄여줘도, 피곤에 쩔어 있는 찰스 브라움이 안타까 웠고.

    베를린 대학과 솔로 활동은 포기하 지 않으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에게만 휴가를 요구함이 서운했다.

    반면 찰스 브라움의 경우에는 자신 만을 바라보는 학생과 개인 연주회를 바라는 팬들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

    두 사람이 합의점을 찾는 일이 수 월할 리 없었다.

    “악장!”

    “••••••므어?”

    “보스랑 국장이 찾아요.”

    “아……. 그래.”

    찰스 브라움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연습실을 벗어나는 모습마저 위 태로워 단원들은 그를 안쓰럽게 쳐 다보았다.

    이내 배도빈의 집무실을 찾은 찰스 브라움은 배도빈과 카밀라 앤더슨을 만났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너지듯 소파에 앉았다.

    배도빈이 그의 스케줄이 적힌 달력을 내놓으며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고집 부릴 거예요?”

    “고집?”

    “요즘 바쁜 거 알잖아요. 개편 마 무리 될 때까지만 버텨달라고요.”

    “난 분명 4월에 휴가를 준다고 약 속받았어.”

    찰스 브라움이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했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가만있었어요? 밴드 편곡은 스칼라랑 윤희 누나한테 넘겼고 A팀 정기 연주회 에서도 제외시켜 줬잖아요. 안정화 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요.”

    “이미 한계야.”

    “입단할 때 약속했던 일이야. 나는 베를린 필하모닉도 중요하지만 솔로 도 교수로서의 입장도 포기 못 해. 그래, 네 말대로 바쁜 시기니까 서 로 양보할 수도 있지. 그렇지만 내 할 일을 못 하면서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

    “그래서 기어이 2주나 쓰겠다고요?”

    두 고집쟁이가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찰스 브라움은 지난 몇 달간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달려온 몸을 위 해서라도 쉬어야만 했고.

    배도빈은 그런 찰스 브라움이 안타 까워 가능한 모든 것을 배려했음에 도 악단 상황을 이해해 주지 않는 그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배도빈은 다 죽어가는 찰스 브라움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배도빈은 본인의 잠을 줄여서라도 찰스 브라움의 공백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찰스 브라움이 교수 활동을 그만두길 바랐지만 그것은 그를 처음 데려올 때 양자가 합의한 일이었다.

    ‘이럴 줄은 몰랐지만.’

    배도빈 체제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2024년 4월부터 단원들에게 주 45 시간의 근무를 요구했고 그 외 연습 시간은 개인의 자율에 맡기고 있었다.

    화수금토일.

    주 5회 근무를 하는데 다른 단원 보다 훨씬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는 찰스 브라움이라 할지라도, 그 때문 에 과로가 겹칠 리 없었다.

    문제는 월화수목에 걸친 대학 강의 와 주말 오전 타임의 개인 연주회.

    업무량은 살인적이었던 작년과 비

    교해 절반이 줄었지만 찰스 브라움 이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리하여 배도빈은 충분히 배려했음에도 힘들어하는 찰스 브라움이 대학을 포기하길 바랐고.

    찰스 브라움은 본인의 의지로 포기 하지 않으니 서로의 입장이 좁혀지 지 않았던 것.

    배도빈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곤 입을 열었다.

    “카밀라.”

    배도빈의 말에 그때까지 상황을 지 켜보고 있던 카밀라 앤더슨 국장이 테이블에 서류를 꺼내놓았다.

    “보스께서 준비한 거예요.”

    그 말에 찰스 브라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배도빈과 카밀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뭔데?”

    “직접 확인해 보세요.”

    배도빈의 말에 찰스 브라움이 봉투를 뜯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튀어 나올 것처럼 커졌다.

    “배도빈 악단주와 WH그룹의 자가 용기와 별장을 이용할 수 있는 허가 증이에요. 휴가비는 1시간 내로 입금될 거고요.”

    오늘도 항의하러 오긴 했지만 설마 하니 이럴 줄은 몰랐기에 찰스 브라움이 머뭇거렸다.

    “다만 2주간의 휴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번 연도에 새로 작성한 근로계약서에 따르면 찰스 브라움 악장은 연간 30일의 휴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연주회를 연속해서 3회 이상 비울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한 사람의 장기 휴가로 대체인원에 게 주어지는 과도한 부담을 줄이기 위한 합의 사항이었다.

    “뭐……

    “그래서 최대 10일까지 가능합니다. 이후 남은 휴가를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연주회에 참여한 뒤 다시 신청하도록 하세요.”

    카밀라 앤더슨이 안내를 마치자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가든 상관없지만 되도록 크루즈 진수식엔 늦진 말아줘요.”

    “그래. 기말고사만 끝내면 돌아올 게.”

    “……기말고사?”

    “그래. 기말고사.”

    배도빈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말 힘들어 보여 그의 일까지 부 담할 각오로 휴가를 챙겨줬건만, 휴 가를 받아서도 대학 일을 하러 가겠다는 찰스 브라움을 걷어 차주고 싶었다.

    “그 일 관련해서 말인데요.”

    그때 카밀라 앤더슨이 다시 나섰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찰스 브라움 악장에겐 베를린 필하모닉에 충실할 의무가 있어요. 당신이 존중받아야 하는 만큼요.”

    “세프에게서 허락 받은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악단주도 계약서도 달라져 있네요. 하물며 예전 악단주와의 구 두계약이 효력이 있을 리 없고요.”

    “원칙대로 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카밀라 앤더슨이 커피를 마시곤 말을 이었다.

    “만약 계약서에 그런 걸 명시했더 라도 외부 활동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에서의 일에 소홀하진 않았으면 해요. 브라움 악장의 의무기도 하고 여기 보스도 단원들도 당신을 좋아 하니까.”

    카밀라 앤더슨의 말에 찰스 브라움 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 넘기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단 한 번도 소홀한 적 없다는 건 배도빈이 잘 알겁니다.”

    찰스 브라움의 말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단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요. 나라고 좋아 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의 말에 카밀라 앤더슨이 귀를 기울였다.

    “돈 없고 차별받는 애들 모아다가 만든 학교인데 어떻게 제가 빠지겠습니까?”

    “아시아 애들은 교수마저 차별합니다. 점수는 개판으로 하고 개인 레슨은 대충 시간만 때우죠. 그 애들 은 대체 뭘 배우겠습니까?”

    찰스 브라움은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이슬람 쪽 애들은 말 같지도 않은 쓰레기들 때문에 테러범 취급당해요.”

    조금씩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영국 애들은요? 그 빌어먹을 브렉 시트 때문에 영국 출신 애들은 독일 에서 공부하려면 20배나 많은 학비를 감당해야 한다고요. 20배나. 난 왕가의 일원으로서 그런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악단 일에 소홀한 적은 없지만……. 외부 일을 겸하는 것 때문에 단원들이 서운해 하는 건 알고 있습니다. 피곤한 건 사실이니 까요.”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들어 배도빈을 보았다.

    “네가 얼마나 많이 신경 써주는지 알고 있어. 나도 가능하다면 양쪽 일 모두 잘하고 싶은데, 미안하다.”

    “ 찰스.”

    “또 교수 구하는 건 얼마나 힘든지. 성과를 보인 졸업생도 없으니 대학에서 지원받는 데도 한계가 있고. 논문은 써야 하고. ……개인적인 일인데 자꾸 말이 나오네. 미안하다.”

    “찰스.”

    “이런 말해선 안 되었는데. 요즘 내가 지치긴 했나 봐. 정교수 한 명 만 더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찰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휴가도 욕 심이었어. 한 3일 푹 쉬면 돼. 그래. 좀 힘들다 보니 무리해서 많이 달라 고 했던 거야. 정말…… 정교수, 아 니, 조교수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작부리지 마요. 암만 그렇게 말 해도 그건 안 해줄 거예요.”

    “해주면 휴가 안 갈게.”

    “웃기지 마요. 다 죽어가게 생겨놓곤 헛소리 말고 쉬어요. 안 쓰고 있다가 밴드 데뷔나 진수식에 겹쳐서 쓴다고 하면 진짜 걷어찰 거니까.”

    “그럼 이번에 한 일주일 정도만 강 의 맡아줄래?”

    “수작부리지 말라 했어요.”

    “그럼 쉴 수가 없잖아. 학생들이 너 언제 복학 하냐고 계속 묻는데, 이렇게라도 가면 좋아하지 않을까 싶군.”

    “……하아.”

    배도빈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 쉬었다.

    * * *

    한편.

    파이널라운드 진줄을 확정한 최지훈은 브리쉘의 병원을 찾았다.

    MRI를 통해 문제를 확인한 의사 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통증이 심하지 않다고요?”

    “네. 욱신거리는 정도로만.”

    “ 흐음••••••

    사진을 여러 장 보며 고민한 의사 가 최지훈의 손을 살피곤 고개를 저었다.

    “피아니스트들에겐 많이 보이는 일 입니다. 다만 염증이 심해요. 이대로 혹사시켰다간 정말 크게 고생할 수 있어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2년 정도 피아노를 못 칠 수도 있고요.”

    “……네?”

    “심각하단 뜻입니다. 통증이 오는 주기가 앞으로 짧아질 거예요.”

    순간적으로 시야가 좁아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다시 통증기가 오면 그땐 진통제 없이는 버티기 힘들 겁니다. 바로 치료를 시작하는 게 맞습니다.”

    “ 지금은.”

    당황해서 말이 안 나오는 최지훈을 대신해 집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도련님께선 중요한 콩쿠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의사가 한심하다는 듯 대꾸했다.

    “지금 고작 콩쿠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손가락 망가지고 우승해서 뭐 하려고요.”

    의사가 고개를 숙인 최지훈을 보며 말했다.

    “심정이야 이해가지만 포기하는 게 맞아요. 돌아가게 되지만 앞으로 계속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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