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55화 (35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55화

    78. 불굴의 피아니스트(2)

    2024년 5월 17일 오후 7시.

    전날 두 파트의 세미파이널을 모두 치른 참가자들이 플레이스 플레지에 (Place Flagey)를 찾았다.

    회색 타일을 터로 둔 건물은 같은 색의 현관과 옅은 갈색의 외벽, 창 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밝게 비치는 현관과 달리 건물 왼 쪽에 솟은 탑은 주홍빛 조명을 창밖으로 내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 뒤의 작은 호수가 운치를 더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우승.

    가장 권위 있는 3개 콩쿠르는 상위 입상과 동시에 거대 매니지먼트 와의 계약,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그 리고 세계 무대를 약속했다.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경쟁 속에서 자신을 갈고닦은 이들에게는 메이저

    로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었기에 간 절함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최지훈은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피아니스트의 꿈을 꾸는 사람 은 얼마나 많을까.

    그중에서 실제로 연습을 하는 사람 은 몇이나 될까.

    수만? 수십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적어 도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세미 파이널에 진출할 정도라면.

    삶의 대부분을 피아노와 함께했고.

    동시에 그 과정에서 숱한 경쟁자를 만나왔을 터.

    하지만 뼈를 깎는 노력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 중에서도 막상 프 로로 데뷔해 사랑받는 사람은?

    최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적부터 콩쿠르에서 상위 입 상을 해오던 사람도 대부분 잊혔다.

    바늘구멍과도 같은 기회를 얻고 그 중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은 만 명 중 한 사람.

    현실이 그러했기에 최지훈은 어렸을 적부터 홍승일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진 강력한 배경, 방송 출연 기회 그리고 무대 가 수천, 수만 명이 아무리 노력해 도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에.

    최지훈은 자신을 더욱 갈고 닦았다.

    더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동등한 입장에서 동등한 기준으로 평가받아 스스로 올라서고 싶었다.

    피아노를 사랑하니까.

    편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 진실 된 마음에 흠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만큼 본인을 향한 질투의 목소리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간절한 만큼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럴수록 실력을 쌓아 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형제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재력과 권력으로 유명해 졌다면 최지훈은 부끄러워 배도빈과 말조차 나눌 수 없을 것 같았고 하 늘에서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를 올 려다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이 그를 강하게 했다.

    어머니와 형제와 피아노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그는 강해질 수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

    무대 위에 서 있는 심사 위원단 사이로 질 루앙이 걸어 나왔다.

    “존경하는 폐하,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할 12명 의 피아니스트가 정해졌습니다.”

    객석에 자리한 참가자들은 저마다 의 방식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세미파이널에서의 연주 순서에 따 라 호명하겠습니다. 엘리자베타 툭 타미셰바.”

    의례적인 박수.

    “김 소망사랑.”

    비명.

    “카 잔.”

    포효.

    “……최지훈.”

    다시 의례적인 박수.

    “니나 케베리히, 티에리 준, 로베르 토 포르니, 엘자 세라피요, 웡 리. 마지막으로 타나카 유미.”

    진출자가 호명될 때마다 탄식도 이 어 졌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흐느끼는 이와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자.

    지독한 상실감에 한숨만 내쉬는 사람까지.

    최지훈은 콩쿠르의 필요성을 인지 하면서도 차등을 둘 수밖에 없는 현 실이 안타까웠다.

    배도빈이 왜 콩쿠르를 부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지 훌륭한 음악가와 같은 무대에 서 서로의 음악을 뽐내는 데 의의를 두는 건 아마 경쟁자를 존중하기 때문일 터.

    최지훈이 생각하기에도 탈락한 이 들의 피아노와 그 삶을 평가하기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기준이 턱없이 보였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파이널리 스트들이 앞으로의 대회 진행 방식을 안내받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12명의 피아니스트 모두 일단의 상황에 기뻐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일본에서 활동할 때 안면을 튼 타나카 유미와 가끔 말을 주고받았고.

    최지훈과 니나 케베리히는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이틀 만에 어떻게 낫는다는 거야? 정말 앞으로 피아노 못 치고 싶어서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아직 욱신대긴 해도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

    “정말 괜찮다니까?”

    “봐!”

    니나 케베리히가 최지훈의 오른손을 낚아채 힘을 주자 그가 비명을 질렀다.

    “아!”

    “봐! 뭐가 괜찮다는 건데!”

    “그렇게 세게 쥐는데 당연히 아프지!”

    그들의 대화에 참가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영어는 기본.

    독일에서 공부한 이도 많기에 많은 이가 두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심히 듣고 있던 김소 망사랑이 슬쩍 입을 열었다.

    “저……

    그러나 막상 최지훈과 니나가 고개를 돌리자 헛기침이 나왔는데.

    그녀가 샛별 엔터테인먼트 소속이 라는 걸 아는 최지훈이 친절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음. ……엿들어 버렸는 데 손 많이 안 좋아요?”

    최지훈은 김소망사랑의 말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보통 의도치 않게 들었다고 하지 않나?’

    조금 별난 사람으로 여기며 답했다.

    “아, 네. 세미파이널까진 안 좋았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아.”

    김소망사랑이 입을 벌리고 상체를 뒤로 뺐다. 그 표정이 이상한 거라 도 본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아픈 상태로 그런 연주를 했다고 생각하니까 좀 괴물 같아서요.”

    그녀의 말에 최지훈이 멍하니 있다 가 웃기 시작했다.

    “ 아학핳학학.”

    뒤에서 수군대는 말은 많이 들었지 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묘하게 신선했다.

    “뭐야? 얘가 뭐랬는데?”

    한편 니나 케베리히는 심각한 이야 기를 나누던 최지훈이 갑자기 끼어 든 옆 사람의 말을 듣곤 웃으니 일 단 화를 죽였다.

    “아픈 데도 그런 연주를 해서 괴물 같대.”

    그 말을 들은 니나가 고개를 빼 김소망사랑을 보고 인상을 썼다.

    “너 29호기지?”

    “29호기?”

    “까불지 마.”

    “아냐. 누나. 나 기분 안 나빠.”

    “시비 거는 거 아니었어?”

    “응. 그냥 좀 재밌는 분 같아.”

    겨우 진정한 최지훈이 니나와 김소 망사랑 사이를 중재했다.

    “그러지 마, 누나. 나쁜 의도가 있었으면 이렇게 앞에서 말하지 않았겠지.”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니나가 취조하듯 물었다.

    “아니, 뭐. 괴물 같으니까 괴물 같다 하죠. 당신도 마찬가지고. 여기 있는 사람한테 다 물어봐요. 당신이나 이쪽이나 저기 저 금발이랑 다 괴물이지.”

    “ 하?”

    관심 없는 척하고 있던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어이없다는 듯 성을 냈다.

    그러곤 최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콧 방귀를 뀌곤 고개를 돌렸다.

    “너 왜 자꾸 시비야?”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워서! 난 평생 그런 연주 못 할 것 같으니까!”

    “그런 생각이면 연습은 왜 해!”

    “……그러네?”

    최지훈은 아무래도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을 억지로 떼놓았고 곧 심사 위원장 질 루앙이 파이널리 스트 대기실로 들어왔다.

    다소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겨우 진 정되었다.

    “모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질 루앙은 가벼운 박수와 함께 축 하와 인사를 건넸다.

    “파이널라운드는 8일 후 5월 25일 부터 30일까지 6일간 이어집니다. 알고 계신 대로 여러분은 그동안 제 약을 받게 되십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설명 뒤에 ‘나 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덧붙었다.

    “내일 18일부터 여러분은 연주 순 서에 따라 하루 두 명씩 퀸 엘리자 베스 뮤직 채플로 이동하게 됩니다. 순서는 투표로 정해질 예정입니다.”

    파이널리스트들은 질 루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정확하고 적당한 속도로 말을 이었다.

    “이동 시간은 매일 오전 11시로 입장 1시간 전에 미팅을 가집니다.

    자세한 사항은 그때 다시 설명 들으실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설명 중 의문 사항 있으십니까?”

    카 잔이 손을 들었다.

    “네.”

    “파이널라운드에서 연주할 악보는 입장 후 바로 주어집니까?”

    “그렇습니다.”

    질 루앙이 파이널리스트들을 둘러 보았다. 그러나 손을 들거나 말하는 사람이 없어 안내를 이어나갔다.

    “그러면 채플 안에서 만나게 될 분 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질 루앙이 신호를 보내자 중년 남 성이 미팅룸으로 들어섰다.

    “우선 여러분의 생활을 도와드릴 마크 피레스 관리장입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중년은 부드러 운 미소로 파이널리스트들과 눈인사를 나누었다.

    “생활 중 필요하신 물건과 불편하 신 점은 모두 마크 피레스 관리장께서 해결해 주실 예정입니다.”

    김소망사랑이 마크 피레스와 질 루 앙을 번갈아 보았다.

    “파이널라운드의 모든 문제 상항은 마크 피레스 관리장께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리허설도 역시 이분을 통 해 안내받으실 수 있고, 통역이 필 요하다면 이 역시 요청해 주시기 바 랍니다. 아울러 여러분께 가장 중요 한 미발표 피아노 협주곡의 악보도 관리장께서 전달해 주실 겁니다.”

    “반갑습니다.”

    파이널리스트들이 손뼉을 쳐 진심으로 그를 환영했다.

    관리장이 모든 참가자와 악수를 나 누자 질 루앙이 다시 한번 신호를 보냈다.

    잠시 뒤 한 노인이 미팅룸으로 들 어섰다.

    그 순간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눈을 빛냈다.

    “다음은 여러분과 함께하실 브뤼셀 필하모닉의 마에스트로 디디에 파예 지휘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원형 탈모가 온 지긋한 노인.

    결승전에서 협주곡을 지휘할 사람 이었기에 질 루앙의 소개가 이어지는 가운데, 참가자들은 적극적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질 루앙의 멘트가 마무리되자 디디 에 파예가 점잖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벨기에의 고상한 지휘자를 만나.

    파이널리스트들은 그들이 진정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의 결승전에 진출했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네, 아버지. 저는 마지막에 들어가요. 집사님도 지금 아버지랑 같이 듣고 계세요.”

    최지훈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아 버지 최우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까요. 2주 내내 꼼짝없이

    잡혀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일주 일 정도만 참으면 될 것 같아요. 호 텔이요? 음……. 지낼 만해요.”

    작년 잘츠부르크에서의 방음이 전 혀 안 되는 방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렇다고 흡족스러운 장소는 아니었는데, 하루 숙박비 167만 원에 해 당하는 스위트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최지훈으로서는 단순한 호텔일 뿐이었다.

    “아버지도 참. 저 그런 말 신경 안 쓰는 거 아시잖아요. 괜찮아요. 이제 그런 말 안 들릴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전화를 하고 있던 최지훈이 집사와 눈을 마주했고.

    집사가 고개를 젓다 조금 화난 목 소리로 추궁했다.

    “막 협박하고 그러시면 안 돼요?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아, 시간이 남아서 병원에 좀 가보려 해요. 네. 아직 욱신거리긴 해도 통증은 많이 가라앉았어요. 걱정 마세요. 집사님 계시잖아요. 네. 네. 아버지도 안녕 히 주무세요. 사랑해요.”

    통화를 마친 최지훈이 배도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도 자료 봤어.

    “응! 축하해 줘!”

    -결승전 오른 거로 축하받을 입장 은 아니잖아. 손가락은 어때?

    “아직 욱신대긴 해도 많이 좋아졌어.”

    - 다행이네.

    “뭐 하고 있었어?”

    -……찰스랑 약속한 거 때문에 자 료 정리 좀 하고 있었어.

    “ 약속?”

    -베를린 필하모닉 일을 못 줄일 거면 대학 강의라도 줄여달라 해서. 나 거기 휴학생인데 강사로 가도 되

    는지 모르겠다.

    “헐! 대학생 가르치는 거야?”

    -웃고 떠드는 밴드 자리 잡을 때 까지만 맡기로 했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는데 베를린 대학에서 수락해 버리는 바람에 난감하게 됐지.

    “와, 나 교수 친구 처음이야!”

    -……좋아보이네.

    “그럼! 아, 나도 강의 들어보고 싶다.”

    -웃기지 마. 오려고 했단 봐.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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