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54화 (35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54화

    78. 불굴의 피아니스트(1)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세미파이널 1차전, 두 번째 날.

    앞서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던 미카엘 블레하츠의 신곡을 훌륭히 소 화하였기에 오늘 있을 연주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특히나 강력한 우승 후보인 최지훈과 니나 케베리히가 출전하는 날인 만큼, 심사 위원단은 격조 높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품위에 걸맞은 날이 될 거라 예상했고.

    그 바람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첫 번째 주자로 나선 최지훈의 첫 곡은 쇼팽의 녹턴. 그중에서도 20 번, C샤프단조였다.

    너무나 대중적인 곡이지만.

    그렇기에 특별하게 들리기 힘든 곡이 마치 처음 듣는 곡처럼 질 루앙 의 영혼을 긁어댔다.

    ‘믿을 수가 없군.’

    질 루앙은 그간 최지훈에게 향했던 평단의 말들을 믿을 수 없었다.

    ‘다들 귀가 먹기라도 했단 말인가.’

    읊조리듯 풀어내는 루바토.

    완벽한 강약 조절로 더욱 애절해지는 악상.

    수많은 쇼팽을 들었지만 가장 쇼팽 다운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군지는 너무도 명확한 일이었다.

    조성이 바뀌어 다시금 이야기가 반 복된다.

    연인의 살결을 느끼듯 섬세한 터치.

    단 4분간의 연주만으로 심사 위원 단은 참가자 최지훈의 팬이 되어버렸다.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40 분간 연주를 이어가려면 격렬한 곡은 자제해야 한다.

    그래서 쇼팽의 곡을 준비해 왔는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다.

    ‘어쩌지?’

    어떻게든 첫 번째 곡은 완주했지만 손가락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통증과 떨림.

    이 상태로 건반을 제대로 누를 순 없을 것 같다.

    아직 36분이나 남았는데.

    집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꼭 이번 대회에 출전하셔야 합니까? 도련님께선 아직 어리십니다. 기회는 많이 남아 있고 기량은 더 발전하실 테죠. 미래를 위해 치료를 우선해야 합니다.’

    정말 옳은 말뿐이라 고집을 부렸을 뿐이지만.

    막상 이곳에서 2주를 보내니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니나 누나나 툭타미셰바 씨.

    그리고 다른 참가자 모두 훌륭해서 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할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카 잔이란 사람의 독특한 싱코페이 션 활용은 무척 인상 깊었고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김소망사랑 씨는 정 말 유쾌하고 다정해서 부럽기도 했다.

    집사님의 말이 백번 맞지만.

    그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 아.’

    생각이 너무 길었다.

    오른손 손가락 때문에 섬세한 터치는 어려운 상황. 그렇다고 한심한 연주를 하고 싶진 않다.

    원래 녹턴을 이어가려 했지만.

    ‘……할 수 있어.’

    고민 따위 할수록 망설임만 나을 뿐.

    건반을 눌렀다.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그라데이션처럼 번지는 슬픔의 색.

    조용히. 과하지 않게.

    피아노가 입을 옷을 물들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욱신거리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도 록 최대한 집중한다.

    ‘평소대로 해.’

    도빈이가 어제 해줬던 말처럼.

    수백 번 연주했던 곡이니까 손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카덴차.

    페달을 밟으며.

    손가락에는 힘을 빼고 손목과 팔꿈 치에 힘을 준다.

    ‘아파!’

    하지만 소리는 제대로 내고 있어.

    옷을 입기 시작한 피아노가 손가락을 밀어낸다.

    아픈 옷은 입기 싫다는 그녀를 어떻게 달랠까.

    고통을 숨기는 방법 외에 있을 리 없다.

    팔의 움직임을 더 크게 주고 타건에 무게를 싣는다. 과감하게 나서 검게 염색한 옷을 입히고 조이고 찢 어낸다.

    ‘여쁘게.’

    쇼팽의 발라드를 입혀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로.

    세심한 조절이 안 되는 것은 과감한 타건과 페달로 커버한다.

    ‘미안.’

    오늘은 조금 다를 거야.

    트릴로 귀걸이를 달고. 트레몰로로 목걸이를 달아준다.

    금빛 액세서리로 이목을 집중시키 고 치맛단은 과감히 찢어낸다.

    사선으로 잘라낸 롱드레스.

    페달을 밟아 아래에 주름을 주고 아르페지오.

    오른쪽 어깨를 잘라낸다.

    평소와 다른 옷에 피아노가 당황한다.

    수백 번의 연주에서 항상 우아했던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검게 물들고 한쪽 치맛단이 무릎까지 올라오고 같은 쪽 어깨를 잘라내 금줄로 연결 되니 이래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

    통증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조금씩 그간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완성되어가는 피아노와 쇼팽 발라드 의 만남에.

    조금 두근거린다.

    ‘이런 면도 있었구나.’

    왜 몰랐을까.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좀 더 보고 싶다. 알고 싶다.

    사랑하는 피아노.

    사랑하는 쇼팽.

    어느새 손가락의 통증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 * *

    ‘이게 최지훈이라고?’

    심사 위원단은 첫 번째 곡에서 최지훈의 완벽한 세공미에 감탄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어지는 쇼팽의 발라드에서 최지훈은 과감했고 그의 피아노는 고혹적이었고 그로 인해 들리는 쇼팽은 퇴폐적이었다.

    다소 정제되지 않은 연주였지만 곡을 크게 훼손시키지 않은 선에서 변 주된 곡은 그 어떤 연주보다 뜨거웠다.

    왼손 아르페지오와 종막의 코다.

    쇼팽의 1번 발라드에서 가장 중요 한 부분은 믿을 수 없는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추락하듯 하강하는 스케일은 비대 칭으로 잘린 치맛단과 같았고 그 끝 은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마디.

    그전까지 페달을 적극적으로 활용 했던 최지훈은 발을 떼고 매우 신중 하게 상체와 어깨와 팔꿈치, 손목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조절인가.

    질 루앙과 심사 위원단은 이 연주를 퀸 엘리자베스 콩쿠크의 운영위 원과 참가자만이 들을 수 있다는 사 실이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땀을 뚝뚝 떨어뜨리는 최지훈이.

    ‘생일’을 포함해 남은 시간을 마치자.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마주치려는, 그래서 소리를 내려는 두 손을 억지 로 내려야 했다.

    한편.

    최지훈의 연주를 들은 니나 케베리 히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을 울리는 연주에 감탄하면서 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안 좋았어.’

    평소 그의 연주와는 전혀 다른 다소 폭력적이고 야성적인 연주는 상처를 감추기 위한 수단.

    니나 케베리히는 침을 삼켰다.

    이런 무대에서도.

    스스로 후회 없는 연주를 하기 위 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간 그녀 가 생각했던 최지훈이 아니었다.

    니나 케베리히는 재밌는 대결이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렸다.

    피아니스트 최지훈을 충분히 잘 알 고 있다고 생각한 본인의 안일함을 탓했다.

    이런 남자를 즐기며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연주를 해내는 피아니스트를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 할 순 없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참가번호 56번 니나 케베리히 양, 무대 뒤에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참가번호 56번 니나 케베리히 양, 잠시 후 심 사가 진행될 예정이니 무대 뒤에서 대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기실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수많은 연주회 사이에 휴가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다시 무대로 복귀했다.

    수백 명의 관중을 앞에 둔 마음으로 팬들에게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그 앞에 놓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조금 이상하다.

    ‘왜?’

    어느 순간 통증을 잊긴 했지만 몰 입해서 그런 것일 뿐.

    연주를 끝내면 분명 망가지겠구나 싶었는데.

    조금 시릴 뿐 크게 아프지 않다.

    ‘너무 아파서 그런가?’

    말도 안 돼.

    물리 치료 방법에 충격을 활용하는 것도 있다더니 그런 건가 싶다가도 이 역시 말도 안 되어 고개를 저었다.

    ‘좋긴 한데.’

    영문을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을 이어나가며 객석에 서 연주를 듣고 있는데 니나 누나 차례가 되었다.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세미파이널에 오른 만큼 지금부터는 본래 실력을 보여줄 것 같은데, 콘서트에 직접 찾은 지도 꽤 되어 궁금하다.

    프로그램 구성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자세를 곧게 하고 연주를 시작한 순간.

    손이 날았다.

    머리 위에 머리 하나 더 높이로 날아오른 손이 내려왔다가 다시 한 번 뛰어오른다.

    그러면서도.

    건반은 물결처럼 아름답게 무대를 채워나갔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

    손을 과하게 들어 잔뜩 늘어진 템 포가 어느새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은 연주.

    도빈이도 하지 않을 연주.

    그 어떤 사람도 이 곡을 저렇게 연주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베토벤 특유의 끊기는 듯한 도입부가 좀 더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전개부.

    화음들이 반복적으로 나서고.

    그 뒤에는 하나의 음만이 아름답게 물결을 이루고 다시금 빠르게 이어 지는 고뇌의 연속.

    빨라질수록 가슴이 가빠진다.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씩 하강하는 이미지는 고뇌를 이겨내려는 사람과 그럼에도 반복되는 고통에 조금씩 지쳐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역시 악성이고.

    역시 니나 누나다.

    빠르지만 결코 하나의 음조차 허투 루 다루지 않는다.

    음과 음 사이의 공백을 최대한 활 용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명 확히 짚고 나간다.

    벼락같은 타건.

    견고한 템포.

    평론가들은 니나 누나를 정확히 파 악하고 있다.

    ‘ 대단해.’

    정말 대단해.

    도빈이가 왜 자기를 위해 만들어진 샛별 엔터테인먼트에 니나 누나를 붙였는지 알 것 같다.

    이렇게나 멋진 연주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고 싶을 거다.

    지금 나처럼.

    ‘누나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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