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53화
77. 사랑과 질투와 갈림길(3)
5월 11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세미파이널이 시작되었다.
세미파이널은 두 파트로 나뉘는데 참가자들은 각각 개인 리사이틀과 왈롱 로열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 연을 준비해야 했고.
그들은 11일부터 13일까지 치러지는 1차 심사, 개인 리사이틀을 준비 하는 데에도 막막함을 느꼈다.
은퇴하기 전까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렸던 미카엘 블레하츠의 미 발표곡을 5분간 연주하고 총 40분 간의 프로그램을 구성해야 했는데.
문제는 미카엘 블레하츠의 곡이 1 차 심사 29시간 전에 주어진 점이었다.
악보는 형평성을 위해 연주 순서에 따라 시간별로 나누어 분배되었고 그것을 확인한 참가자는 모두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곡을 연주할지.
어떤 순서로 연주할지에 따라 리사이틀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기에, 어린 피아니스트들은 부랴부랴 프로 그램을 수정했다.
그 과정에서 포기하는 이가 나올 정도였고.
모든 참가자가 예년보다 훨씬 엄격해진 룰로 인해 밤을 지새운 채 세 미파이널 1차전을 맞이했다.
‘일주일을 연습해도 될까 말까 한 곡을 대체 어떻게 치라는 거야?’
‘원래 본선 진출 확정되면 주는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줘?’
잔뜩 예민해진 대기실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참가번호 13번,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참가번호 13번,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양은 무대 뒤에서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악보를 둔 채 손을 움직이던 엘리 자베타가 일어섰다.
‘할 수 있어.’
강인한 의지는 작은 몸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당당한 눈빛과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표현되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같은 색의 구두를 신은 엘리자베타는 진행 요원의 안내를 받아 무대 뒤로 이동했다.
수많은 무대에 올라섰고.
이보다 큰 무대를 몇 번이고 경험 했던 엘리자베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즐거운 게 최고란다. 어떤 무대에 서든 네가 행복해야 기쁨을 줄 수 있단다.’
스승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이 떠올랐지만 이번만큼은 적용할 수 없을 듯했다.
최지훈과 니나 케베리히를 두고 편히 있을 순 없었다.
그들보다 뛰어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그럴 거라 여기며 또각, 무대 위로 올라섰다.
심사 위원단과 시선을 교환하고 피아노 앞에 앉은 엘리자베타는 건반에 손을 얹었다.
잠시간 정적.
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가 벼락과 같이 건반을 때렸다.
미카엘 블레하츠의 도장조 소나타.
시작부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음표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왼손과 오른손이 번갈아 각기 다른 화음을 노래하니 마치 여러 개의 폭죽이 터지는 듯했다.
뭉개지는 음 하나 없이 완벽히.
파티를 연다.
모든 참가자가 ‘미카엘 블레하츠가 현역 때 연주하려 만들었다’고 말한 신곡 ‘생일’은 엘리자베타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아 그 힘차고 쾌활함을 뽐냈다.
‘이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
심사 위원장 질 루앙은 엘리자베타 의 연주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역시 뛰어난 음악가였으나 미카 엘 블레하츠의 신곡은 대회 룰 변경을 재고해야 할 정도로 난해했다.
갈수록 향상되는 참가자들의 수준을 고려, 변별력을 주기 위해 강행 하기는 했지만 질 루앙과 심사 위원 들은 그들이 ‘생일’을 제대로 연주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과연 사카모토 교수가 제자로 들일 만하군.’
그러나 그러한 예상을 뒤엎고 미스 하나 없이 연주를 이어나가는 엘리 자베타의 천재성.
질 루앙은 살아 있는 전설 사카모토 료이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미친 거 아냐?’
심사 위원단이 감탄한 만큼 대기실 에 있는 참가자들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겨우 완주할 정도에 그쳤던 ‘생일’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엘리자 베타에게 질려 버렸다.
재능의 차이를 절감하고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헐.’
한국대 음대 피아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소망사랑 역시 다르지 않았다.
18살 때 크리크 국가 예선 ‘칸토’ 에서 2등,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 부문에서 4위를 차지한 그녀는 특기생으로 한국대 입학.
3학년 때는 이미 계약만으로도 절 반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샛별 엔터 테인먼트에 소속되었던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주변은 물론 김소망사랑 본인도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의 호 성적을 기대했고.
그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또라이 수준이잖아?’
바로 앞 차례의 연주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뿐이었다.
‘뭔데? 약 했나?’
그럴 리가 없는 도핑을 의심해 볼 정도로 엘리자베타의 ‘생일’은 설명 할 수 없었다.
‘생일’ 이후 이어진 곡은 차이코프 스키 피아노 소나타 C샤프단조.
첫 곡과 전혀 다른 우울하고 심후 한 멜로디가 회장을 잠식해 나갔다.
‘속주만 잘하는 게 아니었어?’
완벽한 강약 조절.
음을 깊이 있게 전달하여 작고 정적인 멜로디를 효과적으로 감상하게 하는 엘리자베타의 연주에 김소망사랑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째 곡.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8번, 도장조로 이어지는 구성은 과감했다.
‘다 다른 분위기잖아.’
전혀 다른 풍의 세 곡을 연달아 연주한다는 건 엘리자베타가 본인의 표현력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발랄한 첫 곡과 우울한 두 번째 곡 그리고 우아한 세 번째 곡까지 어느 연주 하나 묻히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스스로에 대한 믿음.
엘리자베타는 연주로써 그것을 증 명하고 있었다.
‘세상에.’
선명히 퍼지는 음표들이 잘 관리된 정원의 꽃처럼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얼굴을 내밀고 각기 아름 다움을 뽐내면서도 함께 보았을 때 더욱 아름다운 화원.
‘ 멋있다.’
김소망사랑이 보기에도 건반이란 이름의 꽃을 가꾸는 엘리자베타는 근사했다.
엄격하게 쳐내 잔가지 하나 없는 심플한 연주.
정돈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듯했다.
‘어……. 그래. 일단 쟤는 제쳐두 고. 최지훈이랑 케베리히까지 생각 하면 4등은 할 수 있겠지? 그래. 4 등이라도 하자. 그게 어디야.’
일찌감치 포기하자 마음이 편해진 김소망사랑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자랑하는 화원을 감상했다.
눈을 감으니 만 송이의 분홍 장미 가 펼쳐졌다.
순수한 이슬을 머금은 꽃잎들이 셋 잇단음에 따라 살랑이며 교태를 부린다.
‘좋다.’
2악장을 넘어서 3악장.
고운 꽃잎에 이끌리던 김소망사랑은 어느새 시작된 카덴차에 깜짝 놀 란다.
우아함에 속아 가시에 찔린 듯.
장식음 하나 없이 이어졌던 절제미 뒤에 이어지는 엘리자베타의 카덴차는 마치 이것이 본 모습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름다운 잎과 날카로운 가시.
엘리자베타의 연주가 끝나자.
김소망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쟨 또 뭐야.’
세 번째 차례의 카 잔은 엘리자베 타의 연주를 듣고 박수를 보내는 동양인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말도 안 되는 완성도를 보여준 엘 리자베타의 연주에 질려 있던 그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넘어서야 하는 경쟁자.
그런 이에게 손뼉을 치는 행위가 멍청해 보였다.
무대 위의 엘리자베타도 황당한지 잠깐 고개를 돌려 김소망사랑을 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저렇게 굴복하지 않아.’
카 잔은 팔짱을 끼고 무대에 오르는 김소망사랑을 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포개 무릎 사이에 두고 꾸부정하게 앉았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며 동시에 어깨와 허리를 폈고 양 손을 턱 높이까지 들었다.
‘뭔 자세가 저래?’
카 잔의 미간에 주름이 짙어졌을 때.
김소망사랑이 슈만의 피아노 소나 타 3번, 도단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울리는 상처.
장엄하게 울리는 사랑의 시작.
빗속에서 피어나는 애틋한 감정처럼 우울한 반주 위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이어진다.
원곡보다 조금 더 빨리 연주하면서 도 감정을 충실히 표현하는 김소망 사랑.
그녀를 별 볼일 없는 참가자로 여겼던 카 잔은 갑작스레 파고드는 슬픔에 당황했다.
‘ 뭐야.’
원곡에 큰 변화를 두지 않고.
단지 표현력만으로 이렇게 짙은 감성을 낼 수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세미파이널 1차전 첫 심사를 마친 심사 위원들은 그들이 참가자들의 실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했다.
8명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 득한 사람은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였지만 각 참가자 모두 훌륭한 연주를 해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사랑하는 그들로서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최와 케베리히, 툭타미셰바만 뛰 어난 줄 알았는데. 다들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전 무엇보다 콩쿠르를 대하는 자세가 보기 좋았습니다.”
“툭타미셰바의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보내던 킴도 그렇고. 킴의 연주를 들은 카 잔도 손뼉을 쳤죠.”
“하하하. 이번 콩쿠르의 문화라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참가자가 본 인 앞의 연주자에게 경의를 표했으니 말이죠.”
심사 위원들의 말에 질 루앙도 내 심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으로서 훌륭한 연주에 경의를 표하는 어린 피아니스트들의 자세는 심사 위원단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질 루앙은 이를 격식 있고 품위 있는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의 좋은 일화라 여기며, ‘로열로드’의 제작진과 기자들에게 이와 같은 사 실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늦은 밤.
연습을 이어가던 최지훈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으아어아으.”
고개를 파묻은 채 신음한 최지훈은 시체처럼 엎드려 있다가 몸을 뒤집었다.
이제 익숙해진 호텔 천장에 그려진 무늬를 보는 것도 지쳐 입을 열었다.
“스피커 무.드루 도빈이한테 전화해 줘.”
몇 번의 발신음 뒤에 배도빈의 목 소리가 들렸다.
- 어.
“뭐 해애애?”
-숨어 있어.
“ 어?”
늘어지던 최지훈의 목소리가 놀라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빠 죽겠는데 찰스가 4월에 주 기로 한 휴가 왜 안 주냐고 자꾸 칭얼대서.
“지금 5월이잖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근데 아직 핸드폰 제출 안 했나 보네.
“응. 파이널리스트 정해지면 내게 될 거야.”
-그렇구만. 세미파이널은 언제야? 내일?
“응. 맞아.”
-전화한 거 보니 여유롭나 보네.
“그렇지도 않아. 미발표곡이 좀 난 해해. 어떻게든 손에 익히긴 했는데 좀 답답해서 전화했지.”
-평소대로 해. 더 하려고 하지 말 고. 그럼 떨어질 리 없으니까.
“평소대로 하면 한 달은 걸릴 텐데?”
배도빈은 최지훈의 말에 답하는 대 신 말을 돌렸다.
- 손가락은?
“손가락? 왜?”
최지훈이 두 손을 위로 뻗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 작은 통증이 계속되었다.
-모르는 척하지 마. 누굴 속이려고.
“히힛. 괜찮아. 콩쿠르 뒤에 제대로 치료받을 거니까.”
-망가뜨리지 마.
"응."
그 순간 전화기 너머가 요란해졌다.
-쾅쾅쾅! 배도빈! 쾅쾅쾅! 배도빈! 쾅쾅쾅! 여기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리는 듯이 커 최지훈은 찰스 브라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아……. 미치겠네. 끊는다.
“응. 잘 자.”
통화를 마친 최지훈은 대 자로 누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힘들어하던데. 베를린 필하모닉 들어가는 게 진짜 맞는 건가?’
“으으으음.”
고민을 이어가던 최지훈이 자신의 두 뺨을 치곤 일어섰다.
“일단은 연습부터.”
그는 평소대로 ‘생일’을 흥얼거리며 피아노 앞에 앉아 자주 틀리는 부분 부터 반복해 연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