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52화 (352/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52화

77. 사랑과 질투와 갈림길(2)

2024년 5월 9일.

마지막 참가자 니나 케베리히가 연주를 마쳤다.

배도빈이 우승했던 제17회 쇼팽 국제 콩쿠르(2015) 이후 미국과 캐 나다를 오가며 실전으로 다져진 니 나 케베리히의 피아노는 이제 막 대

학을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이들에 게 충격 그 이상이었다.

“빌어먹을. 저런 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대체 뭐가 부족해서 나온 거지? 여기서 우승하지 못하면 몇 년을 허 비해야 하는데.”

일부 참가자는 불만을 내뱉었다.

마치 자신의 리사이틀인 양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는 니나 케베리히와 같은 대회에 나왔다는 것을 탓할 뿐 이었다.

‘더 늘었어.’

그런 가운데 최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벼락같은 포르티시모와 익살스러운 스타카토는 여전했고 악보를 자신의 페인트로 덧칠하는 듯한 해석은 여 전했다.

세상 그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베토벤과 드뷔시, 만토바니.

종잡을 수 없이 발랄한 니나 케베 리히의 연주는 그의 가슴을 뛰게 했다.

대기실로 돌아온 니나 케베리히가 두 팔을 쭉 펴며 몸을 풀었다.

“멋있었어.”

“어? 왜 대기실에 있어?”

“객석에 있으면 긴장이 풀릴 것 같아서.”

“긴장하면 더 안 좋은 거 아닌가? 으음.”

“왜 그래?”

“감질나서. 이제 좀 손이 풀렸는데.”

니나 케베리히가 건반을 치는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의욕적인 모습에 최지훈은 작게 웃었다.

대화를 나누며 복도로 나선 두 사람은 객석으로 향했다.

온전한 1층과 다소 좁은 2층.

그리 넓지 않은 장소라 자리는 거 의 다 차 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한 두 사람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도 있었지만 퍼스트 라운드 결과에 집중하고 싶어 거절했다.

잠시 뒤 질 루앙과 심사 위원단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참가자들은 박수로 그들에게 예를 표했고 심사 위원단도 고개 숙여 답 했다.

쉼 없이 재잘대던 니나 케베리히의 입은 굳게 닫힌 지 오래.

질 루앙이 마이크를 잡은 순간 참가자 중 일부는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콩쿠르.

이제 막 프로로 데뷔한 또는 준비 중인 이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오를 수 있는 유일한 무대.

그중에서도 쇼팽 국제 콩쿠르, 차 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퀸 엘리자 베스 국제 콩쿠르는 상위 입상 시 대형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과 여러 도시에서의 리사이틀이 약속된.

피아니스트들의 꿈의 무대였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준 비했던 만큼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지색 바닥과 그보다 좀 더 짙 은 소파에 앉은 이들은 저마다의 바 람을 기도했다.

“폐하, 그리고 신사숙녀 여러분. 세 미파이널에 진출할 24명의 피아니스트가 정해졌습니다.”

질 루앙의 차분한 목소리가 긴장감을 더했다.

“연주 순서에 따라 세미파이널에 진출한 피아니스트를 호명하겠습니다. 량 샤오, 소망사랑 킴, 카 잔.”

박수 소리가 울렸다.

브라질에서 태어난 23살의 카 잔 은 스스로 가장 불행한 세대라 여기는 2000년대 태생의 어린 피아니스트였다.

사카모토 료이치, 글렌 골드, 크리 스틴 지메르만이라는 리빙 레전드가 여전히 활동 중이고.

미카엘 블레하츠가 은퇴한 뒤에도 그레고리 소콜라브, 밀스 베레조프 스키 등 완숙한 거장들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

황제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가우왕

과 혁명가 막심 에바로트가 이분하는 시대.

너무나 뛰어난 이들이 권력을 틀어 쥐고 있었다.

그뿐일까.

앞선 세대만큼이나 경쟁 상대는 절 망적 이었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피아니스트 들은 배도빈이 피아니스트로서는 거 의 활동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손가을, 니나 케베리히, 최성신, 남 궁예건, 엘리자베터 툭타미셰바, 최지훈까지 역사상 이렇게 뛰어난 피

아니스트들이 함께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은 시대에.

재능으로는 모차르트를.

교향곡에서는 베토벤에 버금가고 세계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진 배도빈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야샤 하 이페츠와, 피아니스트로서는 요제프 호프만에 비견되었다.

배도빈이 피아노를 계속했다면 아 마 카 잔은 좌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반갑습니다, 카잔. 영어를 할 줄 아시나요?”

“네. 그럼요.”

이日가 진행하고 있는 다큐 프로그 램 ‘로열로드’의 사회를 맡은 우진 은 세미파이널에 진출한 이들을 상 대로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촬영에 앞서 인사를 나눈 뒤 곧장 대본을 읊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카잔. 24명 안에 들었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우선 막막하죠. ……제 이름은 카 잔이 아니라 카 잔입니다.”

“ 아.”

“풀 네임을 불러주시는 건 감사하 지만 알고 계셨으면 해서요.”

“실례했습니다. 카 잔. 그럼 계속해 서……. 막막하다고 하셨죠?”

“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준 비해야 하는 곡은 너무 많고 미카엘 블레하츠의 신곡은 터무니없이 복잡 해요.”

“하하. 하지만 세미파이널 무대에 서는 기대해 봐도 되겠죠?”

“기대요?”

카 잔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많은 노트를 5분 안에 연주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29시간 안 에 준비해야 한다고요. 블레하츠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곡을 하루 만에 어떻게 연주하라는 건지 알 수 없어요. 더 말이 안 되는 건 우진 씨 말 대로 니나 케베리히나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최는 해내겠죠?”

“하하. 글쎄요. 저는.”

“됐어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아 니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카 잔이 말릴 새도 없이 방을 나 섰고 녹화는 중단되었다.

로열로드의 제작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3명째 이러네. 괜찮아?”

카메라 감독이 걱정스레 물었다.

“나쁠 거 있나요. 다들 예민하겠죠. 인생이 달린 문제니까. 다음은……

다음 인터뷰 대상자를 훑던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지훈이네.”

“ 누구?”

“최요. 지훈 최. 우리 제작비를 대 주는 JH의 사장 아들이잖아요.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런. 앞에 3명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는데.”

“글쎄요. 만나봐야 알겠죠. 맥, 연 락은 했어요?”

“네. 오고 있다고 하네요.”

로열로드의 제작진이 초조하게 기 다리길 얼마간. 최지훈이 인터뷰실 의 문을 두드렸다.

“반가워요, 지훈 군.”

우진을 확인한 최지훈이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여기서도 뵙네요.”

“불러주면 어디든 가는 게 프리랜 서죠. 그런데 저희 언제 한번 만난 적 있었나요?”

“작년 잘츠부르크에서 얼굴만 뵈었죠. 취재차 나오셨잖아요.”

“아.”

오케스트라 대전 이야기가 나오자 우진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나눈 뒤 우진은 분위기를 풀어내기 위해 적 당한 질문을 건넸다.

“벨기에에서의 2주는 어땠나요?”

“편해요. 숙소도 조용하고 연습 환 경도 좋고요.”

예민했던 앞선 참가자들과 달리 여 유를 보이는 최지훈에게 로열로드의

제작진은 시선을 교환했다.

귀공자에 실력까지 갖춘 어린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도도할지 걱정했던 것이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다행이라 말씀드리고 싶은데 어젯 밤 추첨 결과가 좋진 않네요. 내일 첫 번째 순서로 나서게 되셨는데.”

우진의 말에 최지훈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특별한 분이 곡을 주셨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카엘 블레하츠 씨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금방 은퇴하셔서 아쉬웠는데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나 이런 식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셔 서 다행이에요.”

“최근에는 시카고에서 후진 양성도 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세 미파이널은 어떤 느낌인가요?”

“최선을 다해야겠죠. 아무래도 협 주곡이 있는데 미리 맞춰볼 시간이 없어 걱정이에요.”

“미카엘 블레하츠의 신곡도 마찬가 지겠죠?”

최지훈은 잠시 고민하다가 우진이 고개를 살짝 틀어 답을 재촉하니 웃 으며 입을 열었다.

“본인이 연주하려 만든 곡을 잘못

넘겨주신 것 같더라고요.”

“하하하.”

“정말 그래요. 처음 악보를 받았을 땐 뭐랄까. 하루 안에는 절대 준비 못 할 거라 생각했어요. 오늘 아침 까지 연습해 봤는데 여전하고요.”

“스스로 곡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 다고 밝히신 적 있는데 이번에는 어 떨까요?”

“그건 사실이에요.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타협을 봐야겠지만……. 그 런 만큼 다른 곡에서는 절대 실수할 수 없으니까 부담은 더 큰 것 같아요.”

우진은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최지훈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살짝 올라간 입 꼬리와 작게 웃고 있는 눈을 설명할 수 없었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지훈이 떠나자 우진을 보조하고 있던 맥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손바 닥을 들어 올렸다.

“긴장은커녕 여유롭던데요?”

“그러게. 역시 폴란드와 모스크바에서 우승했던 사람인가?”

“하기사. 쇼팽은 몰라도 차이코프 스키는 대부분 러시아 사람이 우승 하잖아요. 편의를 봐주는 것도 있고. 그런 대회에서 자국 최고의 스타인 리자를 누르고 우승했으니. 겸손한 척해도 자신 있겠죠.”

“그렇겠지. 어. 다음이었네.”

우진이 다음 인터뷰 대상 명단을 훑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를 확인 했다.

“연락 넣었어?”

“아쉽게도 거절하겠대요.”

“이런.”

우진이 아쉽다는 듯 체크리스트로 눈을 돌렸다.

‘안 좋은데.’

미카엘 블레하츠 씨가 만든 곡은 조금 당황스럽다.

처음부터 쉼 없이 이어지는 3도 음형에 숨이 턱 막히고 손가락을 고 문하는 듯한 운지법에 이걸 어떻게 입혀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초견을 해보는데 피아노가 불편해 하는 게 느껴져서 조금씩 늘이고 넓 히긴 했지만 여전히 부담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 G장 조는 미리 준비해 둔 곡이라 감을 잃지만 않으면 될 텐데.

최근 손에 무리가 와 블레하츠 씨 의 곡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쑤시는 검지와 약지를 꾹꾹 쥐는데 욱씬거리는 느낌이 여전하다.

‘상상하자.’

실제 연주는 최대한 줄이고 머릿속으로 어떻게 연주할지 그리는 것이 최선일 거다.

최지훈과 니나 케베리히에 대한 자 극적이고 편향적인 목소리를 최우철 이 모를 리 없었다.

그에게 아들 최지훈은 인류의 존속 보다도 중요했다.

스스로 지은 죄가 많아 혹시나 누 군가 자신에게 향해야 할 칼을 아들 에게 들이밀지는 않을까 하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최근에는 아들과의 사이도 좋아지 고 EI전자 때와는 달리 온전히 자신 의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어 차도를 보였지만.

아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그를 자극했다.

관심은 곧 돈이다.

그렇기에 아들 최지훈에게 향하는 비판과 응원은 도리어 그를 기쁘게 했지만.

최우철은 이번 일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방식이 그가 20대 때 했던 것과 유사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였다.

‘머리는 좀 굴릴 줄 아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JH에 의해 유럽 시장을 2년 만에 빼앗긴 인터플레이의 끄나풀이었던 쇼익과 일부 언론 단체의 의도가 포 착되었다.

누군가를 무너뜨릴 때.

상대하기 꺼려진다면 주변부터 무 너뜨린다는 정책은 나쁘지 않았지만 일을 진행하는 방식은 고루했다.

‘아마 지훈이를 시작으로 이日의 콘텐츠 품질을 저하시킬 테고. 이日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운영위가 결 탁해 지훈이가 우승했다는 시나리오겠지.’

고루하고 진부하다.

최우철은 본인이 30년 전에나 썼던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제임 스 버만과 그 참모진을 안타깝게 여 겼다.

‘적당히 숨은 쉬고 살게 해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어떻게 죽일까.

인터플레이는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다.

제임스 버만의 심장을 멎게 하는 건 의미 없다.

고통을 느낄 수 없을 테니.

최우철은 가만히 생각을 이어나가 다가 미소 지었다.

그러곤 눈을 떠 책상에 놓인 아내 이지우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마. 이번만큼은 당신 도 화냈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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