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51화
77. 사랑과 질투와 갈림길(1)
무대에 오른 최지훈은 평소와 같이 곧은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고개를 든 채 숨을 고르면 상처 주던 목소리도, 심사 위원도 사라지 고 오직 피아노와 악보만이 그 앞에 놓였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7번, 1악장.
프레스토(Presto: 매우 빠르게).
발랄하게 시작된 사교회.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타건이 즐 겁게 춤추는 이들의 대화와 발소리 같이 어우러진다.
여러 발소리로 이뤄지는 화음들.
왼손과 오른손에서 동시에 이뤄지는 레가토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하게 이 뤄지는 왼손의 펼친화음이 사교회장 의 우아한 조명처럼 깔리고.
최지훈은 묻는다.
새침한 답이 돌아온다.
싫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린 채 앞으로 나서는 여성.
양손이 번갈아 스케일을 이룬다.
곡풍이 바뀌었다.
최지훈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표현되었다.
그녀는 강렬한 등장과 함께 사교회 장을 휘어잡는다. 주인공의 등장과 함께 이어지는 정렬의 멜로디.
‘마음에 들어?’
‘나쁘지 않네.’
피아노는 오늘 최지훈이 입혀준 옷 이 싫지 않았다.
그가 지난 한 달간 피팅해 준 드 레스는 시스 라인이 들어가 피아노 의 음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비딩은 조금도 없는 심플함.
딥그린 색상의 이브닝드레스는 마 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여 성과 어울렸다.
어깨선부터 등, 허리, 엉덩이와 허 벅지까지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실 크는 악보라는 옷을 가장 잘 입혀주 고 싶었던 최지훈의 집념이었다.
그래서.
피아노는 더욱 신나게 자신을 뽐낼 수 있었다.
우아하게 회장 가운데로 걸어 나가 당당하고 도발적인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 뒤.
재잘대는 찬양의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짓는다.
우아하게 때로는 요염하게.
그 일련의 광경을 들은 심사 위원 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누군가 완벽하게 조율된 연주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최지훈의 이번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다.
피아노란 악기를 너무도 잘 활용하 면서도 그로 인해 연주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7번은 무척이나 세련되었다.
마치 파티장을 연상시키는 듯한 연주에 그들은 자신들이 채점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었고.
그사이 최지훈은 심사 위원단이 정해준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진달래가 합류하면서 ‘웃고 떠드는 밴드’를 완편할 수 있었다.
지난 한 달간 맞춰본 결과.
엉망이다.
나윤희와 소소, 다니엘 홀랜드는 제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스칼라와 찰스 그리고 진달래는 제멋대로라 과하다는 느낌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 니 딱 그 꼴이다.
더군다나.
천재들 사이에 낀 나카무라 료코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매서워졌다.
“……나 말고 A의 에리히 피크 수 석이나 B의 데니어스 토로 수석이 더 좋지 않을까.”
“그거야 당연하지.”
당연한 말을 하기에 맞장구를 쳐주 니 녀석이 발끈했다.
그러나 이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라는 걸 깨닫고는 말을 삼킨다.
“에리히나 데니어스가 더 잘하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들이 지 금 웃고 떠드는 밴드가 하려는 음악을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게 무슨 뜻이야?”
“너야 평소에도 팝 음악을 많이 듣잖아. 단순히 실력을 비교하면 그 두 사람보다 못해도 너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그게 이 일이고.”
“에리히랑 데니어스가 바빠서 너로 정한 게 아니야. 웃고 떠드는 밴드 에 더 어울리는 사람을 뽑은 거지. 아. 모레 요코 씨 공연 보러 오시는 거 아니었어?”
“맞아.”
“멀리 오셨는데 즐겁게 해드려.”
“응. ……저기.”
아웅다웅하고 있는 스칼라와 찰스를 혼내주려 가려는데 료코가 한 번 더 붙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시선을 피하 고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고마워.”
“뭐가?”
“……여기 다들 천재들만 있잖아. 나 같은 건 아무리 노력해도 못 따 라간다고 생각했는데. 필요하다고 말해줘서.”
잠시 말을 멈추고는 입술을 깨문다.
“위로가 되었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아직 길을 못 찾은 것 같다.
확실히 말해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쓸데없는 한계와 기준을 만들고 그 이상 올라가지 못할 것 같다.
숨을 내쉬고 의자를 빼냈다.
녹음실 안에서는 스칼라와 찰스가 여전히 투닥거렸고 나윤희와 소소, 다니엘 홀랜드, 진달래는 그러거나 말거나 저들끼리 대화하고 있다.
“너랑 저 사람들이 뭐가 다른데?”
“..실력?”
“그건 사실이지.”
료코가 입을 내밀었다.
“솔직히 말해봐. 저 사람들한테는 있는 재능이 너한테는 없다고 생각 하는 거잖아.”
가만있던 녀석이 고개를 살짝 끄덕
인다.
“그럼 너는 뭔데. 19살에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연주하고 있잖아.”
“18살인데.”
“아. 한국에선 19살로 세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응."
“어디까지 말했더라.”
“18살에 베를린에서 연주하고 있다고.”
“그래.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노력했으니까……
“그래.”
“기술적인 문제는 재능이 있고 없고를 떠나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야. 개인차는 있지만 딱히 재 능이 없어도 훈련으로 커버가 돼.”
기술을 익히는 속도는 다를 수밖에 없어도 달성 여부는 노력으로 극복 할 수 있다.
도중에 포기하는 건 의지 문제.
애초에 그 분야를 좋아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던 거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만큼 피아노와 친해지고, 친하게 지냈던 만큼 더 잘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길 바라다 보면 자연스레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이상은.”
“그래. 재능의 차이지.”
하지만 예술에서 스킬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
재능의 차이는 심미안에 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무엇 이 개인마다 부여되어 있다고는 생 각한다.
하지만 빌어먹을 순위 놀음에, 줄 세우기에 익숙해진 ‘콩쿠르’라는 것 때문에 많은 이가 착각하고 만다.
자신은 결코 뛰어난 음악가가 될 수 없다고 말이다.
우울해하고 있는 료코에게 물었다.
“찰스랑 가우왕 중에 누가 더 잘한 다고 생각해?”
“어?”
못 들었을 리가 없어 대답을 기다 리니 녀석이 인상을 쓰고 답했다.
당연하다는 말투다.
“그걸 어떻게 비교해. 악기가 다른 데.”
다행히 멍청이는 아니다.
“그럼 찰스랑 윤희 누나 중에는 누가 더 잘한다고 생각해?”
“그것도 이상해. 브라움 악장은 음 색이 멋지고 윤희 언닌 템포 조절이 랑 힘이 좋은데.”
“아깐 악기가 달라서 비교 못 한다 며.”
말문이 막힌 료코를 보며 말했다.
“누구나 연주자가 될 수 있어. 누 구는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누구는 20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스킬은 반복 숙달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해. 정해진 거니까.”
그러나 많은 이가 이 과정에서 포 기한다.
음악성을 펼치기 전, 스킬을 익히는 과정에서 많은 이가 익히는 속도 에 매몰되어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떨어져 나간다.
재능의 차이를.
자신의 한계로 규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들 그전에 포기하지. 기 술의 한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누 가 더 잘하는지 비교하기 쉬우니까. 지금 너처럼.”
“알아둬. 너랑 에리히 수석의 차이는 기술이지 음악성이 아니야.”
아직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다.
“기술을 다 갖췄을 때. 음악은 그 때부터 시작되는 거야. 자신을 온전 히 드러내야 음악가가 될 수 있는 거지. 저 사람들처럼.”
료코가 녹음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조급해하지 마. 언젠가는 네 손이 에리히 수석만큼 정교하고 빨라질 거야. 시간이 더 지나면 에리히보다 나아지겠지. 그녀는 더 늙을 테고 넌 더 성숙해질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에리히 수석의 음악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네가 기술을 완성하고도 너만의 음악을 하지 못한다면 관객은 널 인정하지 않을 거야.”
“난 그런 게 없는데.”
“아니.”
단언한다.
“너도 너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어. 너뿐만이 아니라 세상 어떤 사람에 게나 있어. 그것이 단지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는 능력이라든지, 단숨에 곡을 완성 시킬 수 있다든지 하는 재능이 아닐 뿐이야.”
“재능의 차이를 인정해. 남을 인정 해. 하지만 남의 기준을 네 것으로 받아들이진 마. 그래서는 결코 음악 가가 될 수 없어.”
음악사를 공부하면서.
정말 많은 후배들이 나를 목표로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슈만은 베트호펜을 따라 하고 싶어서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어.”
“따라 할 수 있을 리 없지. 베트호 펜은 위대하니까.”
암. 그렇고말고.
“1번부터 3번까지의 교향곡은 베 트호펜의 느낌이 짙은데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4번 교향곡 은 다르지.”
슈만의 4번 교향곡은 마치 오케스트라가 피아노가 된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돌출되는 악기 없이 모두 색을 죽 이고 하나의 악기가 되었는데 참으로 색다른 발상이고 놀라운 도약이었다.
“베트호펜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 났던 거지. 슈만은 그것으로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지금의 미숙함을 네 한계로 치부 하지 말라는 뜻이야.”
아마데에 대한 치기.
하이든에 대한 갈증.
음악 역사상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여 있던 당시 빈은 그야말로 발악의 장이었다.
모든 음악가가 바흐와 아마데, 하이든을 넘어서기 위해 발버둥 쳤고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오랜 시간 이어왔던 생각을 한 번에 전달할 순 없는 법.
인내심을 갖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랑하고 계속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거장이란 선에 닿을 수 있다는 말이야.”
“……응.”
“그 선은 남이 열어둔 문으로는 넘 어설 수 없어. 그랬다간 거장은커녕 놀림감이 되겠지.”
“너만의 기준을 세워. 그러려면 남 이 열어둔 문을 정확히 인지하고 네 가 무슨 음악을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해. 기술의 차이 따위, 일정 수준을 넘어선 뒤에는 의미 없어져. 누가 더 낫다는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단 말이야.”
“모르겠어.”
“그걸 아는 인간을 두고 재능을 가 졌다고 하지.”
료코는 아직 자신의 명확히 무슨 음악을 하고 싶은지, 어떤 비올라를 가지고 싶은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가우왕이 나를 벗어났던 것 처럼.
내가 바흐와 아마데와 하이든을 벗 어났던 것처럼 언젠가 그 날이 올 것이다.
“노력한다면 언젠가 그 날이 올 거 야. 네가 기억해 둘 건 하나. 그 어떤 재능으로도 위대한 음악을 할 순 없어.”
하지만 투쟁 끝에는 결실을 맺는 법.
재능 있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이 만나왔다.
이름을 남기기도 했고 뭇사람의 사 랑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위 대한 일을 해낸 이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투쟁이라 표현할 만큼 자신을 몰아붙였던 이들의 작품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나만의 기준.
음악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
나를 드러내 소통하는 일에 하나의 동일한 기준이 적용될 리 없다.
“기준은 너. 네가 어떤 음악을 하 는지가 중요한 거야.”
그전에 일정 교양을 갖추는 건 부 수적이고 당연한 일.
최지훈이 스킬을 완벽히 익히고 자 신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처럼 나 카무라 료코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기준이란 게 뭔데?”
“……난 보통 서사성을 부여하지.
지훈이는 옷을 입혀준다고 말하던 데.”
"...?"
이해할 수 없나 보다.
쾅
“정말 믿을 수 없군! 배도빈! 난 저렇게 연주하는 놈을 인정할 수 없다! 모든 게 애드리브야! 이럴 거면 악보는 왜 만들어!”
“그거 좋겠다. 즉홍곡은 어떨까.”
“감히 내 파이어버드를 그 제멋대 로인 멜로디에 맞추라는 말이냐!”
아무래도 찰스와 스칼라 사이에 조율이 필요할 듯싶다.
3명의 위대한 작곡가 중 모차르트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말하고.
베토벤은 베토벤 자신이 어떤 사람 인지를 말한다.
그리고 바흐는 우리에게 우주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더글러스 애덤스(소설가: 1952-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