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50화
76.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5)
니나 케베리히, 최지훈,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와 같이 빼어난 인물이 참가했다는 소식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예년 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승 무대에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가우왕이 함께한다고 하니 피아노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보다 좋은 구경거리도 없었다.
이日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견하 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운영위원 회와 협의.
세계 최초로 격조 높은 콩쿠르의 준비 과정과 퍼스트 라운드를 토크 쇼와 다큐 형식을 빌려 자사 플랫폼 에 공개하고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대한 전반 적인 설명과 지난 대회의 우승자를 소개하고 벨기에 브뤼셀의 전경을 담은 1부에 대한 반응은 미적지근했지만.
얇고 긴 눈썹. 날카로운 콧날.
깊고 치명적인 눈매의 남자를 주인 공으로 한 2부는 기존 기록을 모두 경신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과감하고 솔직한 멘트로 여러 화제를 불러일으킨 중국이 낳고 세계의 사랑을 받는 피아니스트.
“가우왕 씨와 만나보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가우왕이 스 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팍을 풀어헤친 검은 셔츠.
레드와 블랙으로 구성된 체크무늬 의 스키니 팬츠와 검은 워커를 신은 가우왕은 여유롭게 웃으며 카메라를 주시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앉은 그는 사회자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시청자 분들께 인사 먼저 부탁드립니다.”
가우왕은 사회자의 요청에 붉은 빛 이 들어오는 카메라에 시선을 주곤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ㄴ 저런 것만 안 하면 좋은데.
ㄴ 진짜. 멀쩡하게 잘생겨놓고 얼굴 함부로 쓰는 거 안타까움.
“하하하하. 멋진 인사였습니다. 지 난 달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그 뒤로는 어떻게 지냈나요?”
“평소처럼 지냈죠. 기르는 강아지 랑 산책을 하거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 기획을 도와준다거나.”
사회자가 고개를 뒤로 빼고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이거 갑작스러운 발언이시네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 기획을 돕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얌전하게 연주만 하던 인간들이 뭘 알겠어요. 동생이 새 프로젝트에 포함된다 해서 겸사겸사 돕고 있죠.”
“이야. 동생 사랑이 각별하시네요.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하시는 건 아니고요? 왜, 피아노 섹션을 개설 하지 않았습니까. 가우왕 씨나 최를 염두에 둔 거라는 추측이 있던데.”
“하핫. 그럴 리가. 배도빈과 함께하는 건 괜찮은 일이지만 그건 협연으로도 충분하죠.”
“협연! 올해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 일정이 잡혀 있나요?”
“해상 오케스트라에 초청받아 검토 중입니다만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게 저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을 테니 배려해 줘야죠.”
ㄴ 자뻑도 저 정도 급이면 인정해 줘야 함거 ㅋㅋㅋㅋ
ㄴ 배도빈이랑 베를린 필하모닉에 저딴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우왕뿐일걸?
ㄴ 친하니까 농담하는 거 아니야?
ㄴ 농담은 무슨. 500% 진심임.
ㄴ 베를린, 빈, 암스테르담 정도 아 니면 거들떠도 안 보잖앜ㅋㅋㅋㅋ 원 래 저런 인간임ㅋㅋㅋ
ㄴ 진짜 가우왕 약자 멸시 심함. 자기 수준이랑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벌레로도 안 봄.
“베를린 필하모닉과 가우왕 씨의 만남은 항상 성공적이었죠. 벌써부 터 기대되는데. 가우왕 씨, 그에 앞 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회자의 질문에 가우왕이 깍지를 끼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살짝 턱을 든 그의 거만함은 무척 이나 자연스러웠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에게 한 수 가르쳐 줄 생각입니다.”
“허 허허.”
사회자가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가우왕을 담당하고 있는 카메라가 줌인 되었고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정해진 건가요?”
“신경 쓰이는 녀석이 출전해서 말이죠. 질 루앙에게. 질 루앙이 누군지 아시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운영위원장 이시죠.”
“네. 바로 그 사람. 원래는 콩쿠르에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규정을 어길 순 없다고 하더군요. 수상자 콘서트 때 번외 경합을 마련하기로 했죠.”
ㄴ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듯ㅋㅋㅋ
ㄴ 아닠ㅋㅋㅋ 탑 먹고 있는 인간이 콩쿠르엔 왜 나갘ㅋㅋㅋㅋ
ㄴ 질 루앙도 이건 원 또라인가 싶었을듯ㅋㅋㅋㅋ
ㄴ 앜ㅋㅋㅋㅋ 가우왕 뿌듯해하는 거 너무 귀엽다 ㅠㅠ
“신경 쓰이는 사람이라. 혹시 엘리 자베타 툭타미셰바인가요?”
“ 누구?”
“사카모토 교수의 제자이자 러시아 최고의 재원이요. 저번 쇼팽 콩쿠르 에서는 2등을 했습니다.”
“아, 뭐. 그런 친구가 있나 보군.”
심드렁하게 혼잣말을 한 가우왕은 무척 불쾌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모습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사회자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제가 직접 나선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니나 케베리히나 최지훈을 언급하는 게 맞지 않나 싶네요.”
“하핫. 가우왕 씨 덕분에 강력한 우승 후보 세 명 모두 언급되었네요. 진행하기 수월해졌습니다.”
사회자는 노련하게 토크 방향을 다 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우승 후 보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놓았다.
가우왕도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리 고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니나 케베리히는 처음 봤을 때부 터 주목하고 있었죠. 지금은 그녀만 큼 강렬하고 명확한 피아니스트가 없는 것도 아쉽고.”
“가우왕 씨가 남을 칭찬하다니 별 일이네요.”
“사실이니까요.”
“그렇다면 방금 질문 드렸던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가우왕이 입을 샐쭉했다.
“정말 모르시나요?”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관심을 줄 정도로 한가하진 않죠.”
“이거 또 한 번 엄청난 발언을 하 시네요. 그녀는 최근 쇼팽과 차이코
프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했던 피아니스트입니다. 특히나 바리에이션이 넓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최나 케베리히보다 앞서 있다는 의 견이 많고요.”
어떻게든 흥행 요소를 살려야 하는 사회자는 최선을 다해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를 옹호했다.
“그럼 지금 한번 들어보죠.”
생방송 도중 갑작스러운 제안에 사 회자가 감독을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연주가 깔렸다.
ㄴ 좋다.
ㄴ 엄청 빠르잖아. 속주로는 가우왕 하고 큰 차이 없는 것 같은데?
ㄴ 그렇다고 음이 뭉개지는 것도 아 니고. 미스도 거의 없고.
엘리자베타의 시원한 연주에 시청 자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가우왕의 입장은 반대였다.
이제 그만 듣겠다는 신호를 보낸 가우왕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쁘지 않네요. 소리도 좋고. 한 곡을 듣고 판단할 건 아니지만.”
“그럼?”
“어디까지나 힘을 냈다는 정도죠.”
“상당히 박한 평이시네요. 그녀에 게 부족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회자의 질문에 가우왕은 당연하 다는 듯 단언했다.
“ 재능.”
그 말에 여태 부드럽게 진행을 이어오던 사회자의 말문이 막혔다.
채팅창도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이런저런 지식은 많이 쌓았고 연습도 많이 한 것 같은데, 이런 연주로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요. 화려하고 대단해 보일 순 있지만. 그걸 모르는 이상 결코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죠.”
ㄴ 가우왕 선 넘네.
ㄴ 그럼 재능 없는 인간은 어쩌라는 거야?
ㄴ 이제 겨우 26살인 애한테 너무 심한 말 아니냐.
ㄴ 저 거만한 인간 언젠가 말실수 할 줄 알았다.
ㄴ 오빠 왜 그래 TT
사회자는 어떻게든 경직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입을 열었다.
“가우왕 씨도 20대 때는 비슷한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세계가 인 정하는 자리에 올라서 있습니다. 엘 리자베타 씨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그의 발언은 더 좋은 먹잇 감이었다.
ㄴ 맞아. 지도 예전엔 깊이 없다고 욕먹었잖아. 재능은 무슨.
ㄴ 엘리자베타 불쌍하지도 않냐. 그렇게 잘하는데 맨날 2등만 하잖아. 그런데도 열심히 하는 애한테 재능 이 없다면서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업계 최고 선 배가 할 말임?
ㄴ 같은 상황이면 조언은 해주지 못 할망정 뭔 소리래?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재능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뒤이어 나온 가우왕의 발언 에 사회자도 시청자들도 행동을 멈 추었다.
“네?”
“재능이 있었다면 27살이 될 때까 지 그딴 연주는 하지 않았겠죠.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7살 때 이미 알 고 있던 걸.”
그가 말하는 빌어먹을 꼬맹이가 누 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어떠한 음악가도 그 앞에서 재 능을 논할 수는 없었다.
만 3세에 작곡을 시작해 만 4세 때 이미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천재 배도빈.
12년 전, 그와 가우왕의 피아노 경 합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명연주였다.
“가우왕 씨가 재능이 없다고 말씀 하시는 건가요?”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니나 케베 리히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그녀를 모르는 피아니스트가 없었어요. 배도빈이야 말할 것도 없고. 언론에서는 최지훈보고 색이 없다고 하는데, 대체 뭔 생각들을 하는 건지. 걔 지 금 19살이에요.”
“그런데 비하면 나나 이 엘리자베 타라는 애나 재능이 없는 건 마찬가 지란 말이죠.”
“……그럼 가우왕 씨는 어떻게.”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가우왕이 되묻자 사회자는 눈을 껌 뻑이다 겨우 답을 내놓았다.
“영감을 얻었다거나.”
가우왕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가우왕 씨도 천재니까.”
사회자의 말에 만족할 수 없었던 가우왕은 흥미를 잃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재능의 차이를 인정했죠.”
“ 네?”
“그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조언이 뭐가 있냐고 물으셨죠?”
“예……
“하나 있죠. 재능의 차이를 인정하 라고. 그래야만 스타트라인에 설 수 있어요.”
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전까지는 무슨 짓을 해봤자 의 미 없습니다. 그때의 저처럼. 그렇지 않고서는 남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렇게 속주랑 정교함만 갈고닦지.”
그러나 그 건방지고 독선적인 남자 의 입에서 자신의 과거를 평가절하하는 말이 나왔을 때는.
뭔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참가번호 47번, 미스터 최. 입장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체 대기실에서 눈을 감고 있던 최지훈은 호명과 동시에 손을 풀었다.
두 손을 마주해 한쪽 손바닥으로 반대쪽 손가락을 밀며 모니터를 보았다. 항상 스트레칭은 평소대로 꼼 꼼했다.
“엄청 진지하네.”
“욕심이지. 3개씩이나 나와서 대체 뭘 하려고.”
그 모습이 다른 참가자의 눈에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순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경쟁 속 에서 앞서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우승했던 최지훈의 존재는 꺼려질 수 밖에 없었다.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벨기에, 영국 출신의 참가자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한국 출신 음악가들이 유독 많이 찾는 콩쿠르이기도 했고 그들조차 ‘해외파’ 최지훈을 곱게 보지 않았다.
여러 나라의 말로 들리는 질투와 시기의 목소리.
최지훈은 평소대로 스트레칭을 마 친 뒤 앞선 참가자의 연주가 끝나갈 때에 맞춰 일어섰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