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49화 (34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49화

    76.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4)

    4월 30일.

    아침 일찍 숙소 아미고 호텔을 떠나 파인 아츠 센터 인근에 도착한 최지훈이 차에서 내렸다.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정말 여기서 내리셔도 괜찮습니까?”

    “네. 잠깐 둘러보고 들어가고 싶어 서요.”

    인사를 마친 최지훈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 사자?’

    울타리처럼 있는 외벽에는 여러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걸 구경하며 천천히 걸으니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조용하네.’

    주변에는 큰 공원이 있었고 도로에는 트램 선로도 있었다.

    이른 시간대라 주변은 고요했고 최지훈은 그 차분한 분위기가 좋았다.

    ‘콩쿠르 끝나면 며칠 머물러야지.’

    색이 바란 대리석 벽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체스 말 중 룩을 이어 놓은 듯한 본 건물에 이르렀다.

    ‘세미나실은……

    조금 이른가 싶었지만 건물 내부로 들어선 최지훈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직원이 그를 맞이했다.

    “도와드릴까요?”

    “감사합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참가자 대기실로 어떻게 가나요?”

    최지훈이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답하자 직원이 반갑게 웃었다.

    “신원 확인을 마치고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신분증은 지참하셨나요?”

    “ 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최지훈이 접수 부스에 도착하자 이 미 몇 명의 피아니스트가 신원을 확 인받고 있었다.

    두 명의 가드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 제법 엄중한 분위기였는데 마침 신분 확인을 마친 엘리자베타 툭타 미셰바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역시 통과했구나.’

    아는 얼굴을 본 최지훈이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었지만 그녀는 최지훈을 노려볼 뿐, 무시하고 지나쳤다.

    최지훈은 어색함을 뒤로하고 안내 해 준 직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대기 줄에 서 내부를 구경하다 보 니 이내 차례가 돌아왔다. 부스로 향한 최지훈은 접수대 직원에게 인 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네요.”

    “좋은 아침이에요. 성함이?”

    “대한민국의 최지훈입니다.”

    최지훈이 내민 여권과 초대장을 확 인한 직원이 서류를 내밀어 대회 요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정된 프로그램은 변경하실 수 없습니다. 세미파이널과 파이널 라운드에서 연주할 미발표곡에 대해서는 기밀을 유지하셔야 하고요.”

    “세미파이널과 파이널 라운드에 연주할 곡이 다른가요?”

    “그렇기도 한데 올해는 특별한 분 께서 곡을 써주셨습니다.”

    접수대 직원은 미발표곡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이어나갔다.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하시게 되면 5월 17일부터 30일까지 약 2주간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퀸 엘리자베 스 뮤직 채플에 머물게 되십니다. 핸드폰, 노트북 등 통신 기기는 소 지하실 수 없으시고 당연히 콩쿠르 관련자 이외에는 연락하실 수 없습니다. 살펴보시고 서명해 주세요.”

    ‘정말 2주간은 아무 데도 못 나가 는구나.’

    최지훈은 결승 진출 시 2주간 퀸 엘리자베스 뮤직 채플 건물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확인하고 서명했다.

    접수 직원이 서류를 확인한 후 동 의서를 복사해 참가자를 위해 제작된 대회 안내 책자와 함께 건넸다.

    옆에 서 있는 보조직원이 생수와 종이컵 그리고 쿠키를 챙겨주며 응원했다.

    “건투를 빌어요.”

    “감사합니다.”

    ‘80명 중에 25명.’

    5월 4일부터 9일까지 치러지는 퍼스트 라운드의 목적은 세미파이널에 진출할 25명의 피아니스트를 가려 내는 것.

    최지훈은 방대한 범위의 과제 곡을 확인하곤 웃을 수밖에 없었다.

    퍼스트 라운드에서는 총 여섯 곡을 준비해야 했는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고전 소나타의 1악장이 첫 번째였고 (op.28 까지).

    심사 위원단이 정한 곡이 두 번째.

    이 둘의 연주 시간은 14분 이내로 규정되어 있었다.

    나머지 네 곡은 에튀드였는데.

    쇼팽과 리스트의 에튀드 중 한 곡 씩 정해야 했다.

    나머지 두 곡은 버르토크 벨러, 드 뷔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라흐 마니노프, 스트라빈, 스트라빈스키의 에튀드 중에 하나와.

    한스 아브라함센, 파스칼 뒤사팽, 리게티 죄르지, 만토바니, 올리비에 메시앙.

    그리고 배도빈의 에튀드 중에서 한 곡을 선택해야 했는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악명이 과연 사실이었다.

    ‘op.28까지면…… 16번 소나타부터는 대상이 아닌가?’

    최지훈은 작품 번호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형제의 이름과 그의 연습곡을 확인했다.

    ‘채은이가 치던 곡이잖아.’

    배도빈의 에튀드는 지금껏 그의 다른 곡처럼 유명하지 않았는데 실연 자체가 없기도 했고 단순 음원으로 만 발표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의 곡이 심사 평가 대상으로 선정되었다는 것.

    ‘대단하다니까.’

    차채은의 연습을 도와주며 자연스 레 익혔기에 최지훈은 에튀드 중 하나는 배도빈의 작품으로 하고자 했다.

    또 하나 그가 놀란 점은 퀸 엘리 자베스 콩쿠르 운영회의 무자비함이었다.

    ‘1시간 전에 알려주는 건 무슨 심 보야?’

    심사 위원단이 정한 곡을 심사 1 시간 전에 통보하겠다고 하니, 실질 적으로 연습할 시간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쉽고 대중적인 곡을 정하리란 보장도 없어, 다른 참가자 와 마찬가지로 퍼스트 라운드부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에튀드는 정해두었어.’

    쇼팽 op.lO의 6번과 리스트의 파 가니니 대연습곡 6번, 라흐마니노프 op.39의 9번 그리고 배도빈 천사를 위한 에튀드 7번까지.

    모두 음악성이 뛰어난 에튀드였고 최지훈이 자신하는 곡이었다.

    심사 위원단이 정해주는 곡은 어차 피 1시간 전에야 준비할 수 있고 최지훈은 곧 준비했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7번을 떠올렸다.

    악보를 꺼내고 살핀 뒤.

    먼저 실수가 잦은 부분부터 연습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가장 어려운 대목부터 시작하는 건 최지훈의 버릇이었다.

    부분 연습을 통해 해당 부분을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손이 풀렸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곡을 해체했다.

    ‘화음으로 반복되니까.’

    진행을 훑은 뒤에는 화음에 따라 팔의 위치를 인식했다.

    음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팔목을 움직여 보았고 그것에 익숙해지면 로테이션을 확인했다.

    로테이션이 확실해지면 쉐이핑도 신경 썼다.

    마음에 들 때까지 자세를 교정하다 보면 어느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조금 무리했나.’

    잠시 쉬기 위해 물병을 집어든 최지훈이 시큰거리는 손마디를 매만졌다.

    어렸을 적부터 학대했던 탓에 특히나 자세에 신경 썼지만 그것으로는 치료가 될 리 없었다.

    이번 콩쿠르는 부담을 느끼는 만큼 더 열중했던 탓에 최지훈의 손은 상 당히 피로했고 통증으로 경고를 보냈다.

    ‘오늘은 보는 걸로 만족하자.’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무모하게 행 동할 최지훈이 아니었다.

    그는 악보를 들고 테이블로 나와 머릿속으로 연주를 계속했다.

    끊어야 할 부분을 반복해 인지하고 그에 따라 다시 한번 손가락과 손목 팔꿈치, 어깨의 움직임을 정리했다.

    그런 뒤에야 아르페지오나 스케일 등 기교를 풀어냈는데 최지훈이 곡을 익히는 시간이 유독 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최지훈은 그 기본적인 과정을 어떤 곡을 연습하든 빼놓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최지훈은 그것이 막대한 양의 연습 량 속에서도 본인의 손목과 손가락, 팔꿈치를 지켜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매우 자연스러운 자세를 익히지 못 했더라면 팔과 손에 가해지는 부담은 더욱 커졌을 테고 매일 14시간 이상 혹사시킨 그의 ‘악기’는 오래 전에 망가졌을 것이다.

    ‘차분히 하면 돼.’

    비록 그 속도는 느렸지만 최지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속도가 있다는 배도빈의 말을 믿었다.

    어렸을 적의 짧은 대화였지만 그것 이 최지훈에게는 큰 힘이 되었고 그렇게 유지한 집요함이 배도빈마저 인정하는 완벽한 타건을 낳았던 것.

    최지훈은 늦은 밤까지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천재와 함께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적어도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에게는 저주였다.

    빠른 벨로시티를 기반으로 한 화려 한 연주는 어렸을 적부터 러시아 최 고였고 모스크바 중앙 음악학교에서 그녀는 최고의 유망주로 인정받았다.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 에 진학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 국내 콩쿠르는 모두 석권했고 국제무대에 서도 성과를 보였다.

    그렇게 제1회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출전할 당시, 러시아 국민 모두 그녀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천재라고 불릴 때마다 화낼 정도로 노력가이 기도 했던 그녀는 자신에 차 있었다.

    본인을 향한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단 한순간에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배도빈.

    7살 차이가 나는, 그때는 더더욱 어렸던 배도빈은 다른 참가자들을 농락하는 듯했다.

    마치 유치원 재롱잔치를 앞두고 딸을 위해 축하 무대에 선 록 스타 같았다.

    배도빈이 첫 번째 주자로 나와 연주하면 관중은 물론 심사 위원, 참 가자들까지 넋이 나가버렸다.

    16년간 단 한 번도 최고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엘리자베타 툭타미 셰바에게는 충격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재능만 믿고 우쭐대는 머저 리였으면 덜했을 터였다.

    그러나 매일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그녀는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소년의 그림자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했다.

    ‘왜?’ 또는 ‘어떻게?’라는 질문만 반복되었다.

    때마침 손을 뻗어준 사카모토 료이치의 케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충 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뛰어난 스승은 그녀가 다시 피아노 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도왔다.

    여태 콩쿠르를 위한 연주만을 했던 그녀에게 사카모토 료이치의 피아노 교실은 너무나 즐거웠다.

    간혹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디자인 그룹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그 감상을 바탕으로 OST를 연주하는 게 그렇게 즐거운 일인 줄은 몰랐다.

    같은 멜로디를 다르게 연주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피아노에 대한 사랑과 기량을 회복하여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출전한 쇼팽 국제 콩쿠르.

    이번에야말로 우승할 거라 생각했다. 지난 4년간 정말 열심히 했고 스스로 얼마나 발전했는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4년 전 자신보다 못했던 최지훈에 게 추월당했을 때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피아노를 사랑했던 엘리자 베타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풍부한 레퍼토리를 활용, 2년 뒤 차이코 프스키 콩쿠르에 도전했다.

    기가 막혀서.

    ‘우승, 지훈 최!’

    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묻고 싶었다.

    크고 작은 콩쿠르마다 번번이 앞을 막아서, 치고 나갈 틈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녀석은 매번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약이 올라 배도빈 과 최지훈을 넘어서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현재 북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 니나 케베리히가 출전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우연히 같은 식당에 있던 그녀가 당연하게 내뱉은 ‘어차피 우승은 너 나 나 둘 중에 하지 않을까?’라는 말이 엘리자베타를 자극했다.

    ‘이번에는 안 돼.’

    게다가.

    과제곡 중에 배도빈의 이름이 있으니 그녀는 정말 재능과 실력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건지.

    이제 정말 끝인 건지 의심할 수밖 에 없었다.

    ‘아니. 재능 따위 없어도 할 수 있어. 그런 거 없어도 더 노력하면 돼.’

    엘리자베타는 애써 고개를 저은 뒤 모차르트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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