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48화 (348/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48화

76.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3)

브뤼셀은 처음인데 밤에는 조금 쌀쌀한 정도라 집사님이 걱정되었다.

“ 춥죠?”

“껄껄. 딱 좋은 날씨군요.”

괜찮다고 하시지만 연세가 있으신 만큼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걱정되어 몇 번 더 여쭤도 괜찮다 고만 하셔서 숙소로 가는 길에 내 옷을 사는 핑계로 집사님이 입을 외 투를 몇 벌 샀다.

점잖게 사양하시더니 막상 입어보 니 마음에 드신 듯하다.

‘괜찮은 곳 같아.’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브뤼셀의 전 경을 살펴보았다.

브뤼셀시는 벨기에의 수도이면서도 유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EU의 주요 기관이 몰려 있는 곳이 기도 해서 인구 밀집도가 특히 높다고, 관광 가이드에 적혀 있다.

‘그랑 플라스가 생각보다 가깝네.’

오줌싸개 동상과 그랑 플라스가 명 소라고 하는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진행되는 파인 아츠 센터와 가 가웠다.

도시 자체가 크지 않아 다니기엔 편할 것 같다.

“숙소는 어디에요?”

“그랑 플라스 바로 옆입니다. 아미 고라는 곳인데 조용히 며칠 지내기 엔 좋은 곳이라 하더군요.”

호텔이야 어디든 괜찮지만 명소 주 변이라 다행이다.

200미터 정도만 가면 오줌싸개 동 상을 볼 수 있고 마그리트 박물관도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내일은 집사님과 느긋하게 관광을 즐기자.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너무 늦은 시간까지 연습하진 마세요.”

“내일까진 쉴 거예요. 아, 저기 잠깐 들렸다 가요.”

“그러시죠.”

숙소 근처에 이르니 광장이 나왔다.

여기가 그랑 플라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회색 블록 위로 치솟은 건물들이 눈에 띈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다들 색 바란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아버지도 와 봤을까?’

이렇게 근사한 곳이라니.

기회가 된다면 아버지께도 꼭 한 번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핸드폰을 들었다.

카메라 어플을 작동하자 곧 액정에 고딕풍의 높은 건축물이 들어왔다.

곳곳에 조명이 있어 밤에도 잘 살펴볼 수 있었고 또 그래서 더 멋져 보인다.

아치형 구조를 한 건물에 새겨진 그림은 조금 특별해 보였고 층이 올라갈수록 절반으로 줄어드는 기둥 사이의 폭도 재밌다.

3층까지 올라가니 기둥이 거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지붕 위에는 찔릴 것처럼 뾰족한 창문과 기둥까지 멋스러움을 자아내고 있다.

대체 언제 세워진 걸까.

따뜻한 차를 마시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랑 플라스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늦어져 버렸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어렸을 적부터 반복해 연습했던 쇼팽.

폴란드에서 우승했을 때는 정말 기뻤고 모스크바에서는 연주장이 너무 덥고 습해 고생했지만 새로운 곡을 연습해 차지한 우승이라 정말 기뻤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쇼팽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전문성을 요구한다면 퀸 엘리 자베스 콩쿠르는 전반적인 소화력이 부각된다.

예선만 해도 바흐, 하이든, 모차르 트, 베토벤 또는 슈베르트, 쇼팽에 하나의 선택 곡까지, 정말 여러 능 력을 시험했다.

곡을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에 예선 참가 신청을 하기 전부터 방대한 양을 준비해 왔고.

다행히 퍼스트 라운드에 연주해야 할 곡들은 준비해 왔지만 문제는 세미파이 널부터다.

하루는 리사이틀, 다른 날은 로얄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주곡을 준비해야 한다.

올해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곡 중에서 정해졌는데.

아무래도 리사이틀 쪽이 더 걱정되어 지금은 그쪽만 보고 있다.

“도련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따 니나 누나 만나기로 했어요.”

“그러시면 외출 전에 따뜻한 차로 몸을 데우시죠.”

“고마워요.”

집사님이 타주신 차를 마시며 본선 진출 사실과 함께 전달 받은 악보를 내려다보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위해 만들 어진 이 소나타는 세미파이널에서 연주해야 하는 과제로 생전 처음 보는 미발표곡.

단순한 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 교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점수가 갈 릴 테니 여러모로 걱정이다.

나도 다른 참가자도 조건은 똑같지 만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오를 정도 면 다들 훌륭한 피아니스트일 거다.

초견은 물론 곡을 익히는 속도도 빠를 테니 아마 그 부분에 있어서는 뒤쳐질 것 같다.

‘짧은 시간 안에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까.’

남들보다 하루 더, 일주일 더, 한 달 더 연습해서 가꿔 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도빈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결국 해내겠지.’

잠깐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으로 간 도빈이가 걱정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로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책임이 더해지니 아무래도 무리하고 있지 않나 싶다.

‘처음부터 무모했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쉬는 날을 정해두 고 있는 듯하니 차차 나아질 거다.

‘또 자기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 화낼 테니까.’

지금은 콩쿠르만 생각할 때.

다른 생각은 잠시 덮어두자.

만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새 친구와 친해지기도 바쁘니까.

‘여긴 이런 식으로 해볼까.’

까다로운 새 악보는 여전히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 * *

4월 29일.

하루 전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니나 케베리히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쉘에 도착했다.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근 10개월 만에 최지훈을 만난 니나 케베리히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또 컸잖아!”

“응. 아직 크고 있나 봐.”

베실베실 웃는 최지훈을 한참 올려 다보던 그녀는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최지훈의 등을 쳤다.

“뭐! 잘 먹고 잘 크면 좋지! 이제 완전 남자네!”

큰 대회를 코앞에 두고도 니나 케 베리히는 평소처럼 밝았고 그 모습에 최지훈은 안도했다.

본인과 마찬가지로 여러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그녀가 일부 언론과 여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해 다 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콩쿠르에서 제 실력을 낼테고 최지훈은 니나 케베리히와 최 고의 컨디션으로 맞붙길 바랐다.

“밥 먹자!”

“Lievevrouwbroersstraat 쪽에 머 시룸 스테이크 맛있게 하는 곳이 있었어.”

“Lie? 뭐?”

“거리 이름이야. 영어로는 Sweethe art brothers street.”

“귀여운 이름이잖아. 출발!”

최지훈의 안내로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은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 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공연 들었는데 진짜진짜 좋았어.”

“봄의 여신 말이지?”

최지훈의 말에 니나 케베리히가 고 개를 끄덕였다.

“이승훈? 이라는 사람이 솔로 맡았는데 바이올린이 그렇게 선 굵게 치 고 나올 줄은 몰랐어.”

“응.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야.”

“ 알아?”

“이승희 첼리스트 동생 분이시잖아.”

“어쩐지. 남매가 대단하네.”

니나 케베리히는 천재 유전자에 납 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아리엘 얀스가 자신작이라 고 하더니 진짜 그럴 만했거든. 꼭 들어봐.”

“그러지 않아도 직접 듣고 싶었는 데 5월에 유럽 투어 온다고 하더라고. 콩쿠르랑 일정이 겹쳐서 아쉬웠 어.”

“LA로 놀러오면 되지! 나 이번에 집 샀다! 얼마든지 놀러와. 1호기랑 같이 오면 되겠네!”

니나 케베리히가 핸드폰을 꺼내 비벌리 힐스에 마련한 자택을 자랑했다.

단층에 외벽이 깔끔한 건물은 한쪽 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그 앞에 작은 풀장이 있었다.

언덕에 위치해 컬버 시티까지 내려 다보이는 전경은 여러 도시에 별장을 둔 최지훈이 보기에도 그럴 듯해 보였다.

“멋있다. 벌써 이런 집 살 정도가 된 거야?”

“히힣. 대출이지롱.”

북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라더니.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성공한 니나 케베리히는 최지훈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아버지가 그것도 능력이라 했어. 정말 축하해, 누나.”

“10년 전만 해도 월세는커녕 꼼짝 없이 굶어죽을 줄 알았는데. 나 진 짜 운이 좋나 봐.”

“운이 아니야.”

“1호기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지. 아, 저긴가 보다!”

“응.”

여행자 협회라는 레스토랑에 들어 선 최지훈은 머시룸 스테이크와 가지, 치즈, 토마토가 들어간 스튜, 연 어와 으깬 감자를 올린 스콘을 주문 했고.

니나 케베리히는 거기에 식사와 함께할 술을 추가했다.

그녀가 주문한 라임과 산딸기를 곁 들인 칵테일은 단맛이 강해 최지훈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어!”

“이거 무슨 칵테일이야?”

“몰라.”

“알고 시킨 거 아니었어?”

"응."

두 사람은 맛있어서 다행이라며 잠시 웃었다.

“그나저나 콩쿠르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쇼팽 이후로는 관심 없었잖아.”

“사실 지금도 그런데 선영이가 필 요하다고 하니까. 그래도 너 나온다 고 해서 재밌어졌어.”

“난 긴장되는데.”

“아학핳하! 너 농담 늘었다! 재밌었어!”

“정말이야.”

“그래. 그래. 좋은 시도였어.”

다시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아 최지훈은 웃어보이곤 스튜를 떠먹었다.

“확실히 준비할 게 많긴 해. 레퍼 토리 늘리는 게 쉽지 않더라고.”

“누나도?”

“나야 베토벤이랑 리스트 아니면 안 좋아하니까. 선영이가 오래 활동 하고 싶으면 넓히라고 혼냈어.”

니나 케베리히가 눈꼬리를 내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 부분은 걱정이야.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으음. 모르겠어. 어차피 우승은 너 나 나 둘 중에 하지 않을까?”

너무도 당찬 말에 최지훈이 어색하 게 웃는데 두 사람 뒤 테이블에서 금발의 여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팩 돌려 니나 케 베리히와 최지훈을 노려보았는데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툭타미셰바 씨.”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에서 만났던 터라 최지훈이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녀는 상당히 불쾌해 보였다.

그녀의 푸른 눈은 니나 케베리히를 향해 있었다.

“우승은 내가 할 거야.”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의 선전포고 에도 최지훈은 여전히 반가운 얼굴 이었고.

니나 케베리히는 한술 더 떴다.

“누구? 둘이 아는 사이야?”

“응.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 씨라 고 사카모토 료이치 선생님의 제자 야.”

“아, 그 귀여운 할아버지.”

쾅!

최지훈과 니나가 대화를 나누는 사 이에 엘리자베타가 끼어들었다.

테이블을 내려친 그녀가 얼굴을 들 이밀고 니나 케베리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날 몰라?”

“알아. 귀여운 할아버지 제자라며.”

니나가 고개를 살짝 내밀어 최지훈 에게 확인을 구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고 그 행동이 지금 껏 모든 메이저 무대에서 배도빈,

최지훈에게 밀렸던 엘리자베타의 자 존심을 구겨놓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다 신경질적으로 ‘여행자 협회’를 떠났고.

니나 케베리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귀엽다. 엄청 노력했나 봐. 나중에 보면 응원해 줘야지.”

“아하하.”

최지훈은 니나에게 악의가 전혀 없어 도리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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