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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46화 (34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46화

    76.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1)

    “마지막이야. 후회 없게 해.”

    배도빈은 다시금 이 자리의 무게감을 상기시켰다.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모습이 평소 집에서의 배도빈과는 사뭇 달라 진달래는 마른침을 삼켰다.

    면접자에게 주어지는 작은 생수로 목을 축이고는 각오를 다졌다.

    ‘후회 없게.’

    록 스타가 되어 세계 투어를 하고 싶다는 첫 번째 꿈은 현실의 벽에 막혔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스스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제법 쓸 줄 알았지만 호 흡을 사용할 줄은 몰랐고 곡을 깊이 전달할 수 있는 기교 따윈 없었다.

    그래서 가르쳐 주는 것은 최대한 익혔다.

    다시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꿈을 잃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았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노래하 고 싶다는 두 번째 꿈은 반드시 쟁 취해 낼 거라 다짐했다.

    차가운 오른손을 볼 때마다 자신의 무지함을, 안일함에 대한 경각심을 가슴속에 새겼다.

    “할게요.”

    진달래의 눈에 각오가 비쳤다.

    배도빈 악단주와 니아 발그레이 고 문. 찰스 브라움, 나윤희, 왕소소, 세 명의 악장과 다니엘 홀랜드 수석, 스칼라가 참관하고 있는 가운데.

    진달래가 입을 열었다.

    “누가 창을 두드렸죠?”

    말하는 듯했다.

    밤은 올빼미와 죽은 소년을 불렀다. 그 어둠이 이젠 자신도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은 담담했고 그렇기에 더욱 애절했다.

    잠시간의 공백.

    감정이 공기 중에 충분히 녹아들자 노래가 다시 이어졌다.

    차분히 이어지는 고백.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세상을 하 얗게 물들이고. 발을 내디뎌 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김음을 시작으로 감정을 점층시 킨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는 어떠한 지옥과 파도가 있더라도 여행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여정의 끝은 없을 거라고 외쳤다.

    슬픔을 덮고 있던 담담한 목소리는 쓰러지지 않고 자신을 응원하듯, 다 짐하듯 앞으로 뻗어나갔다.

    목이 열리고.

    비강이 열리며 진달래는 그간 쌓아 올린 감정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핀란드의 록 밴드 나이트위시의 ‘Escapist(도피자)’.

    그것을 부르는 맑은 목소리는 투란 도트를 부를 때처럼 높은 수준은 아 니었지만 가슴속에 불을 지폈다.

    스칼라의 몸이 자꾸만 앞으로 쏠렸다.

    생전 처음 듣는 방식의 발성과 언 어의 장벽조차 허무는 고조감.

    노래하는 사람의 감정이 그대로 전 해지는 듯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스칼라는 정말 바깥세상에 나오길 잘했다고 고향 사람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용당하지만 않으면 이런 걸 느 낄 수 있을 텐데.’

    높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런 아쉬 움을 느낄 만큼 매력적인 노래였다.

    마지막 음을 내고.

    몰입하고 있었던 진달래도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들렸을까. 긴장과 초 조함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배도빈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데 채점표를 보고 있는지라 정면의 진 달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내 배도빈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 참가자 불러주세요.”

    “네. 보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진달래를 밖으로 안내하려 다가오자 진달래가 배도빈에게 말했다.

    “어땠어?”

    배도빈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별로였어?”

    진달래가 직원을 뿌리치고 심사 위원석 앞에 다시 섰다. 목이 잠겨 있었다.

    “어디가? 어디가 안 좋았어? 응?”

    “무슨 짓이야?”

    “감상 정돈 들려줘도 되잖아……

    진달래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지만 배도빈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진달래는 자신이 떨어진 것을 확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중음악도 열 심히 연습할 걸.’

    ‘믿고 정말 많이 도와줬는데. 실망 시켜 버렸어.’

    ‘또. 또 놓쳤어. 바보. 등신.’

    “끕

    눈물이 커다랗게 떨어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고장이라도 난 듯 하염없이 나왔고 진달래는 소리를 죽인 채 눈물을 닦아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배도빈이 눈썹을 좁히고 말했다.

    “ 나가.”

    “끄으으읍.”

    겨우 참아내고 있던 진달래는 나가라는 말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응. 끕. 미안.”

    진달래는 코를 들이마시며 힘없이 면접장을 벗어났다.

    유진희와 배도진은 몇 시간째 베개 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진달래가 걱정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면접을 보러 간다 고 들었는데 마음처럼 안 되었던 모양.

    소리를 내서 우는 건 아니지만 들 썩이는 어깨만 봐도 진달래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진달래와 가장 친한 배도진은 동생을 데리고 누나를 위로했다.

    침대 옆에 선 배도진은 배토벤을 머리 위에 올려놓곤 엎드려 있는 진달래를 살폈다.

    “ 괜찮아?”

    “끄으억. 가.”

    “아파?”

    진달래가 대답은 않고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아프다는 말에 배도진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술 마실래?”

    8살 꼬맹이의 헛소리에 울고 있던 진달래가 눈물과 콧물과 침이 범벅이 된 얼굴을 돌렸다.

    엉망이 된 얼굴을 본 배도진은 흠 칫했지만 이내 진달래와의 우정을 위해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학교 형, 누나들이 그러는데 원래 헤어지면 아프대. 아프면 술 먹는대.”

    “뭔 소리야아아! 나 좀 내버려 둬 어억. 허어어엉.”

    목이라도 상할까 봐 소리 내서 울지 못했던 진달래가 다시금 얼굴을 파묻었다.

    다음 날까지 면접 일정을 끝낸 베를린 필하모닉의 웃고 떠드는 실내 악단은 미팅을 가졌다.

    채점표를 통해 상위 5명의 후보자를 두고 그중 합격자를 가리기 위한 자리였다.

    다섯 명 중 4명이 이미 유럽 무대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이들이라 니아 발그레이로서도 누구를 뽑아야 좋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 명씩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왕 악장부터 시작해 볼까?”

    발그레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소소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며 차례를 피했고 니아 발그레이는 나윤희에게 물었다.

    “저도••••••

    두 사람이나 확답을 피했지만 후보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럴 만하여 니 아 발그레이는 다니엘 홀랜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네요.”

    입을 뗀 그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더 고민했다.

    “실력이야 채점표대로 비슷하니 같이 해보고 싶은 사람을 뽑고 싶네요. 전 진달래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렇죠?”

    “그치?”

    다니엘 홀랜드의 말에 나윤희와 왕 소소가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주변 사람의 눈을 의식한 두 사람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고.

    찰스 브라움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생각하고 있는 사람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해?”

    “그게……. 브라움 악장은 어떠신대요?”

    “나도. 좀 다듬을 구석이 있지만 바탕이 좋아. 그림 그리기엔 딱 좋은 소재던데.”

    “진달래라.”

    니아 발그레이가 진달래의 이력서 와 채점표를 확인하곤 고개를 들었다.

    “신규 실내악단의 홍보성을 위해서 라도 이름 있는 사람을 들이는 게 유리해. 평가 항목도 노래를 제외하 면 미달이고. 실기 점수마저 나머지 4명에 비해 낮아.”

    니아 발그레이는 이들이 복합적인 문제를 인지하길 바라며 조언했다.

    그러나 악단주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듣고 싶은 노래는 그 녀석밖에 없었어요.”

    배도빈이 진달래를 평가할 때 따로 적어둔 메모지를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

    다니엘 홀랜드가 그것을 들어 읽는데.

    “……알아볼 수가 없는데. 이건 뭐 라 적은 거야, 보스?”

    눈을 동그랗게 뜬 배도빈을 대신해 그의 필적에 익숙한 나윤희가 메모지를 대신 읽어주었다.

    “외모 불량. 어?”

    “심사 기준에 있었나?”

    나윤희의 말에 다니엘 홀랜드가의 문을 제시했는데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머리 양옆을 밀어버린 걸 보고 70년대 펑크족이라도 보는 줄 알았지. 그 괴상한 염색도 마음에 걸리더군.”

    찰스 브라움은 검정-핑크-파랑-금색으로 이어지는 진달래의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자 나윤희가 다시 메모지를 읽기 시작했다.

    “인성 불량. 멍청함. 무례함.”

    적혀 있는 대로 읽을 뿐인데 나윤희는 메모지와 배도빈을 번갈아 보았고.

    인상을 쓰고 있던 왕소소는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

    다음 이야기 역시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실기 점수 상위 다섯 명의 사람 중 4명은 이미 수없이 많이 무대에 올랐던 유명인이었다.

    그런 탓일까.

    베를린 필하모닉이란 좋은 조건의 선택지를 고른 것처럼 느껴졌고, 반드시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함은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진달래는 달랐다.

    배도빈의 말대로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반주도 없이 마치 최고의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노래하는 모 습과 그러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점 이.

    그녀가 얼마나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오고 싶은지 말해주었다.

    배도빈이 나윤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이야 기도 모두 풀어냈다.

    “노래 들어줄 만. 불편하지 않다. 다음을 듣고 싶다.”

    그 말에 니아 발그레이가 공동 채 점표를 확인하곤 빙그레 웃었다.

    “들어줄 만하다고 하면서 7점이 네?”

    그의 말에 사람들이 시선을 옮겼고 10점 만점 중 배도빈이 7점을 준 사람이 단 다섯 명뿐이라는 걸 발견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섯 명이 최종 후보자로 뽑혔 으니 배도빈의 귀와 판단력을 다시 금 확인할 수 있었다.

    배도빈이 다시 나섰다.

    “아마 두 사람이 망설였던 건 아는 사람이라 그랬을 거예요. 편드는 걸 로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소소와 나윤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달래 면접 때……. 나가라고 해서.”

    “지금도 울고 있을걸?”

    두 사람의 말에 배도빈이 눈을 끔뻑였다.

    “화났구나 생각해서……

    “ 악마.”

    “하하. 아는 사이니까 더 냉정하게 하려 했던 거겠지.”

    니아 발그레이가 웃으며 배도빈의 행동을 포장해 주는데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아뇨. 화났던 거 맞는데.”

    미팅을 나누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애도 아니고 면접장에서 그게 무 슨 짓이에요. 제 단원이 그랬으면 당장 내쫓았어요.”

    배도빈의 눈치를 보느라 진달래가 좋을 것 같다고 말하지 못했던 나윤희와 소소가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그래도 노래는 제법이고 열정도 있으니까. 한번 길들여봐야겠죠.”

    배도빈의 말에 다시금 표정이 밝아 졌다.

    이틀 내내 울고 있는 진달래가 얼 마나 기뻐할까 생각하며 좋아하는데 찰스 브라움이 구석에서 인상을 썼다.

    “이럴 거면 회의는 왜 하는 거야?”

    그의 불평에 다니엘 홀랜드가 크게 웃었다.

    “세프랑 어떻게 이렇게 닮았는지 몰라. 세프도 굳이 회의하자고 하곤 결국 자기 뜻대로 결정했거든.”

    “과연 폭군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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