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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42화 (34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42화

    75. 결성! 웃고 떠드는 밴드(2)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스칼라의 정 체를 눈치채신 모양.

    다시 생각해 보니 반평생을 테메스 문화를 연구하고 찾으셨으니 못 알 아보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그래. 이상하다 했어. 스칼라. 스 칼라……

    아버지께서 스칼라의 이름을 반복 해 되뇌셨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녀석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다.

    “왜, 왜 그러십니까?”

    “네팔 언어에 있는 이름이 아니야. 러시아어? 아니지. ……스칼라, 태 어났을 때부터 외딴곳에 할아버지와 둘이서 살았다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만.”

    스칼라 녀석이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할아버지 성함 알려줄 수 있을까?”

    “ 그게••••••

    저렇게 간절한 아버지는 처음이다.

    눈을 부릅뜬 상태로 잡아먹을 듯이 물어보시는데 건방진 스칼라 녀석도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 응?”

    “……칼입니다.”

    “성은 없으시고?”

    스칼라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혼잣말을 반복하셨다. 무엇인가를 생각하실 때의 버릇인 듯하다.

    “스칼라. 칼. 스칼라. 칼. 영어는 아니야. ……라틴어인가? 네팔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이번에는 양팔을 꽉 잡으셨다.

    “할아버님도 너처럼 푸른 눈과 갈색 머리시니?”

    스칼라가 뒷걸음질 쳤지만 아버지를 피할 순 없었다.

    “응?”

    “……아닙니다. 붉은 머리에 갈색 눈이십니다.”

    그 정도는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는 지 꺼려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한다.

    ‘위험한데.’

    역시나.

    아버지는 또 한 번 중얼거리시더니 책상 위를 훑으셨고 이내 녀석의 켈틱 하프를 발견하셨다.

    “켈틱 하프잖아. 금속 현이 아니야. 18세기에나 있던 물건이 어떻게 이렇게 잘 보관되어……

    하프를 유심히 관찰하시던 아버지가 확신에 차 물으셨다.

    “그때 물건이 아니야. 적어도 20년 안에 만들어진 거야. 그렇지?”

    이제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스칼라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피했지만 이미 의심하기 시작한 아버 지를 피해갈 순 없었다.

    “스칼라, 테메스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니?”

    “딸꾹.”

    녀석의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몹시 당황한 녀석의 눈빛이 내게 ‘네 아버지 정체가 뭐냐’고 묻는 것 같다.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해대 는데 비에 젖어 추위에 떠는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다.

    “들어봤지?”

    “그,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 할아버님은? 할아버님 은 원래 어디서 사셨는지 못 들었어?”

    스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진하던 아버지에게도 제동이 걸렸다.

    녀석이 발뺌한다면 아무리 아버지 라 해도 더는 알아낼 수 없으시리라.

    “……켈틱 하프를 가졌고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할아버님도 분 명 음악을 좋아하시겠지?”

    아닌가 보다.

    꿈을 목전에 둔 학자의 집요함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스칼라는 본인을 너무도 잘 아는 아버지에게 어떤 대답도 해선 안 된 다고 판단했는지 여전히 질문을 피 했다.

    입을 다문 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눈에는 긍정으로 비친 모양이다.

    “우리 집에 있어도 되는데 굳이 공 원에 들어간 거니? 역시 숲이 익숙 한 거지? 이런 형태의 집을 만들고 살려면 좋은 목재가 필요할 테니까. 테메스인들은 숲과 함께 노래하니까.”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녀석이 당 황하기까지 하자 아주 수상해졌다.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무의미한 도주를 반복할 뿐이고 그 나마 닫고 있던 입마저 무의미한 저항을 할 뿐이다.

    “그, 글쎄요.”

    “켈트, 아니, 테메스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줘. 작은 거라도 좋아. 할 아버지와 어디서 살았는지. 그것도 힘들다면 어떤 식으로 생활했는지.”

    정말 간절했다.

    스칼라를 붙잡고 애원하는 목소리와 눈빛에 지난 반평생의 염원이 담겨 마음이 불편해졌다.

    안타깝다.

    망망대해에서 꿈을 좇는 심정을 아는 만큼 정말 돕고 싶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

    이대로 있다가는 녀석의 정체가 밝혀질 것 같아 나섰다.

    “켈트인들은 금발에 키가 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스칼라도 스칼라 의 할아버지도 다른 색이잖아요.”

    스칼라만을 보고 있던 아버지께서 돌아보셨다.

    “기원전 기록까지는 그렇지만 침략을 받고 유랑하던 민족이었어. 여러 인종이 섞여 민족 내에서도 여러 형 태를 보이는 게 가장 큰 특징이야. 존속 사이에도 차이를 보이는 게 그 증거지.”

    아무래도 거짓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두 분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우선은.”

    “아, 네. 부탁드립니다.”

    우선 안드레아스 볼 경사 덕분에 이야기가 더 이상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시간문제일 뿐.

    ‘어쩐다.’

    고민을 거듭하다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접근해야 하는 법.

    다음 날.

    WH 변호사의 힘으로 과태료 정도를 내고 풀려난 스칼라를 앉혀놓았다.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아버지 대체 뭐 하시는 분이야? 어떻게 우리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계신데?”

    “놀란 건 알고 있으니 진정해.”

    “그러고 보니 너도 처음부터 이상 했어. 우리말을 자연스레 쓰는 것부터 음식이나 악기도 알아보고.”

    “거 기까지.”

    더 이상 말하게 놔뒀다간 ‘처음부터 우리를 찾으려고 했던 거지!’라는 식의 망상으로 이어질 것 같아 입을 막았다.

    상황이 복잡하고 머리가 그리 좋은 녀석은 아니니 최대한 간단하게 선택지를 주는 게 좋다.

    “아버지는 역사학자야. 테메스 문명을 찾으려고 10년을 공부하셨고 몇 년을 직접 뛰어다니셨어.”

    “역시……. 아니, 그보다 왜? 설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를 왜 찾으시는지 납득할 수 없잖아.”

    “좋아서 하는 건데 이유가 어디 있어. 너는 왜 20년 동안 하프를 연주 했는데?”

    사랑하기에도 바쁜데 이유 따위 생 각했을 리가 없다.

    “잘 들어. 너와 네 마을을 숨기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뒷일은 내가 책임지고 막을게.”

    스칼라가 입을 굳게 닫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해 잠시 기다려주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에 남고 싶다.”

    이게 녀석의 진심일 거다.

    현대 문명은 스칼라에게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를 접했으니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 없다.

    테메스인이기도 하지만 음악가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마을이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아.”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려.”

    “무슨 말을!”

    “일단 들어.”

    녀석을 막아서곤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테메스 문명을 찾고 있는 조사단이 있어. 300명 정도 되는 큰 집단 이고 몇 년 전 빈 근처에서 테메스 의 옛 마을을 발견하셨어.”

    “빈이라면.”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너희가 살았던 곳이겠지.”

    “그곳에서 이주의 단서도 발견하셨다고 하셨어.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 야. 조사는 계속될 거고 언젠가는 찾으실 거야.”

    “그러니까 그래선 안 된다고 하잖아!”

    “그 조사단을 이끄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시고.”

    “아버지는 결코 남에게 피해를 줄 분이 아니야. 테메스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 못 하실 분도 아니고.”

    테메스인들이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 ‘꿈’을 포기하실 거다.

    많이 괴로워하실 테고 어쩌면 재기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많은 자본과 시간을 투자했던 사업을 중단하려면 스스로 꿈을 부정해 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걸 어떻게 믿고.”

    스칼라의 어깨를 꽉 쥐었다.

    “ 나는.”

    화가 난다.

    “아버지가 얼마나 너희 문명을 찾아 헤맸는지 몰라. 안다고 해봤자 아 버지의 진심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하겠지.”

    빌어먹을 인간들이 테메스를 이용해 그들이 숨어 살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스스로 꿈을 포기하시는 일에도 화가 난다.

    “너희 사정을 알고 지난 20년간 쌓 아온 것을 스스로 부정하시게 될 때 의 마음도. ……이해 못 할 거야. 내 가 만든 곡을 부정하게 되는 일 따 위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아버지에 게는 그런 느낌일 테니까.”

    스칼라의 눈을 보며.

    갈 곳 없는 분노를 삼켰다.

    “지금 난 그런 일을 제안하는 거다.”

    ‘갈 곳 없기는.’

    부정하지 말자, 배도빈.

    지금 이 화는 아버지를 슬프게 할 일을 제안하는 나에 대한 것이다.

    병신.

    어떻게 될지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 잔인한 짓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겪도록 하다니.

    아버지. 아버지.

    목 아래가 묵직해지고 터져 나오려는 성질머리를 죽이기 위해 입을 악 다물었다.

    “……미안하다.”

    그때 녀석이 내게 사과했다.

    “네 입장을 몰랐다. 진심으로 사과하지. 네 말대로 하겠어.”

    스칼라의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눈은 마치 브라이언 그린의 초끈 이 론 강의를 보는 도진이처럼 초롱초 롱했다.

    이야기를 듣다가 너무 궁금해 질문을 하셨다가도 이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라고 재촉하기도.

    그들의 역사에 진심으로 슬퍼하기 도 함께 화를 내주기도 했고 조사팀 의 연구와 들어맞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다.

    “계층에 따라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달랐던 것도 사실이었구나?”

    “예전에는 그랬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하긴. 마을 단위의 공동체에서 계 급을 나누기보다는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테니까.”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슬픔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응?”

    “알고 계시겠지만 스칼라와 그 사람들이 숨어 사는 건……

    차마 목이 메어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그 말에 더없이 행복해하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렇지.”

    그들의 긴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안식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테메스인보다도 테메스의 역사를 잘 알고 계신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리라.

    이대로 감추려면.

    여러 대학에서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테메스 문명 발굴 사업을 멈춰야 할 테고 아버지는 스스로 일구었던 업적들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결국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김남식에 의해 저지되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테메스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니 어떻게든 숨기려 하실 거다.

    그러니 더 고민할 수밖에 없을 터.

    스칼라와 나도 그 복잡함을 더 키 우지 않고자 침묵을 지켰다.

    늦은 오후에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말없이 석양을 맞이하고 있었고 마침내 고개를 떨어뜨린 아버지에 의 해 다시 시작되었다.

    “도빈아, 아빠가 헬기 싫어하는 거 기억해?”

    무슨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21살 때 오키나와에 보물을 찾으러 갔었어. 홍가왕이라는 사람이 류 큐 왕국을 지키기 위해 숨겨둔 보물을 찾는 일이었는데 나쁜 사람들이 그걸 차지하려고 별별 짓을 다 했거 든 ”

    오래전 일을 회상하는 아버지는 즐 거워 보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놈들이었는데 나중에는 총까지 쏘더라고. 기관총 달린 헬기를 몇 번 만났는지 몰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어찌저찌 보물은 찾았는데 그 인간들에게 빼앗길 것 같아서 바다 깊은 곳에 던져 버렸어.”

    아버지는 밝게 웃으셨다.

    “아무도 안 믿어줬지만 아빠는 그 걸로 되었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세상에 나와선 안 될 물건이었던 거야. 그리고 테메스에 대한 이야기도 마 찬가지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정하게 울렸다.

    “걱정하지 마. 이야기 들려줘서 정말 고맙다.”

    “아저씨……

    “아버지.”

    아마 지금도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계실 거다.

    지금까지 함께한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부터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한 것까지.

    어쩌면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포기 하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아버지 스스로 삶의 목적을 잃으실까 봐.

    그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끄응.”

    무릎을 짚고 일어난 아버지는 기지개를 켜곤 말했다.

    “이제 또 뭘 찾아본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 말과 표정으로 여태까지 내가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빈아, 엘도라도라고 아니? 황금이 넘쳐난다는 전설인데.”

    아버지의 꿈은 테메스가 아니었다.

    기록과 유물과 유적을 통해 과거를 찾아나가는 행위 자체를 즐거워하셨던 것 같다.

    테메스의 일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으셨으면서도 끝이 아니라 다른 모험을 찾으시는 모습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역시 스페인부터 시작해야겠지. 예전 생각나겠네. 혼자 움직이는 건 오 랜만이니까.”

    “위험한 일은 아니죠?”

    “하하. 글쎄.”

    난 이분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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