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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40화 (340/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40화

    74. 최지훈 출격(2)

    배도빈이 전달한 소식에 잔잔했던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가우왕이 출전한다고 하던가요? 출전 자격은 30세 이하까지로 제한될 텐데.”

    “질 루앙이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나 봐요.”

    “질 루앙?”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 위원이자 운영회장을 떠올렸다.

    “폐막식 때 우승자와 번외 경합을 가질 수 있도록 약속했대요. 지훈이 에게는 좋은 동기가 되겠죠.”

    “멋진 일이네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참가하지 않았다니 예상외라 아쉽네요. 그는 당신과 함께하길 바라고 있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 지인 것 같고요. 분명 함께 출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미 예선이 진행 중이니 돌이킬 수도 없겠고.”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탄식에 배도빈은 슬쩍 웃을 뿐이었다.

    형제의 진면목을 발견한 순간.

    그의 가슴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깊은 뜻을 지메르만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푸르트벵글러와 마리 얀스, 사카모토 료이치와 같이, 다음 세대의 더 발전한 연주를 직접 듣고 싶을 뿐이었다.

    정점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그녀 로서도 배도빈과 최지훈이 경쟁하며 일으킬 시너지가 어디까지 향할지 알 수 없었고.

    본인이 도달한 한계를 넘어선, 지 금껏 없었던 피아노를 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지메르만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 어나왔다.

    “레퍼토리가 협소해 어려움은 겪겠지만 그 나이 또래에 최지훈 군보다 나은 피아니스트는 못 봤어요. 경쟁 상대가 있으면 분명 좋은 영향을 받을 거라 생각했죠. 당신 같은 피아니스트라면 더더욱.”

    “그에게 피아노를 함께하자고 권유한 것은 그런 생각의 연장이었어요.”

    현재 최지훈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

    누구도 명확히 말할 수는 없으나 연주는 단순히 표현력만 좋다고 전부가 아니었다.

    곡이 지닌 심상을 확장하고 파고들 어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선물해주는 것이 핵심이었고.

    아직 어린 최지훈에게는 그러한 면 모가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한 배도빈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뗐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같은 무대에 서자고 버릇처럼 말했어요.”

    배도빈은 일어나 형제의 진면목을 알아봐 준 이를 응시했다.

    그녀가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알기 에 거짓은 조금도 담지 않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퍼스트 피아니스트 자리에 가우왕을 보고 꿈을 키워온 아이는 필요 없어요.”

    최고의 자리를 정 때문에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차마 완성하지 못했던 10번 교향곡, 그랜드 심포니를 연주할 피아니스트는 14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어머니를 잃고.

    학대에 가까운 일정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음악을 사랑했던 피아니스트.

    그 모습에서 배도빈은, 아니, 루트 비히는 자신의 과거를 투영했다.

    자신과 달리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웃고 피아노를 사랑한 최지훈이라면 이겨낼 거라고.

    마침내 해낼 거라고.

    언젠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거라 여기며 응원했다.

    그렇기에 사카모토 료이치, 미카엘 블레하츠, 가우왕, 니나 케베리히, 차채은 등 이미 완성되었거나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를 숱하게 만나왔어도 최지훈에게 그랜드 심포니를 맡긴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배도빈이 말을 이어나갔다.

    “규격 외의 천재에 가려진 수재로 남아서도 안 돼요.”

    배도빈이 언급한 규격 외의 천재가 누구를 뜻하는지 이해한 지메르만이 빙그레 웃었다.

    천재 중의 천재.

    역사에 이름을 새긴 무결점의 피아니스트 앞에서 그런 말을 당당히 꺼낼 수 있는 남자는 여태 없었다.

    그러나 배도빈이라면 그 말조차 부 족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등한 입장에 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뿐이에요. 스스로 올라올 때까지 지켜봐야죠.”

    “대단한 신뢰네요.”

    “심지가 굳으니까.”

    배도빈은 단호히 말했다.

    “착해서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게 문제지만 스스로도 어엿한 피아니스트예요.”

    ‘무슨 일로 왔나 싶었더니.’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그제야 배도빈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경고를 하러 왔던 것이다.

    배도빈은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어도 최지훈이라면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흥미로워 지메르만은 변덕을 부렸다.

    “당신도 알다시피 저와 그는 여러 면에서 닮아 있어요. 보다 쉽게 이 쪽으로 이끌어줄 수 있죠.”

    “필요 없어요.”

    지메르만의 도발에 배도빈의 눈빛 이 달라졌다.

    ‘형제가 이렇게 다르군요.’

    지메르만은 온화하고 예의바른 최지훈을 떠올리며 배도빈과 눈을 마 주했다.

    언론에서 비쳐지는 그는 다소 무료 해 보였다. 감정 변화를 느낄 수 없었고 어떨 때는 염세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직시하고 있는 눈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베를린의 마왕이라더니.

    그녀는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할 줄 아는 배도빈이 싫지 않았다.

    “멋지네요.”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배도빈이 떠나고.

    지메르만은 올해 5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하며 차분히 남은 차를 즐겼다.

    오랜만에 통화한 히무라가 재밌는 이야기를 전달해 주었다.

    니나 케베리히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가 신청을 넣었다는 소식 이었다.

    “이제 와서 굳이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나 봐. 니나 도 타이틀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

    북미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치는 니 나 케베리히는 대학 졸업 후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힘을 빌려 곧장 데뷔했는데.

    인지도를 쌓기 위해 박선영이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주거나 명문 악단과의 협연을 잡아주곤 했다.

    사실 박선영의 협상 능력이 대단했기에 가능했던 일.

    ‘생각해 보니 그러네.’

    변변한 타이틀도 없이 그런 일을 해냈다는 것이 상식 밖의 일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잘 해냈지만 히무라의 말대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모양.

    현재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이기 위해선 공인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우승 타이틀 하나 정도는 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요즘엔 활동도 잠시 쉬고 있고. 니나도 이제 28살이니 거의 마지막 기회지.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

    확실히 나이 상한선인 서른을 넘기기 전에 하나쯤 따두는 게 앞으로의 활동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일주일 뒤에 예선 결과가 통보될 텐데 레퍼토리 늘리느라 고생 좀 하는 것 같아.

    히무라는 니나의 우승을 상당히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확실히 나와 슈베르트에 치우쳐진 레퍼토리만 확장시킨다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니 무리도 아니다.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간판이기도 하고 동시에 소속 아티스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매출을 올려준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니 잘 됐으면 좋겠다.

    물론 친구로서도 조상으로서도 응원한다.

    ‘좋은 승부가 되겠지.’

    “지훈이도 출전하는데 재밌겠네요.”

    -최 군이?

    “네.”

    놀랐는지 히무라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었다.

    -쇼팽이랑 차이코프스키 우승했잖아. 차이코프스키에서 우승한 지 이제 2〜3년밖에 안 됐는데?

    “그 정도는 해내야죠.”

    전화기 너머에서 히무라가 당황하는 게 전해진다.

    -최 군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대단한 대회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북미에 서 최상위권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니나 케베리히의 적수라 할 만한 사람은 없을 거다.

    아마 히무라도 박선영도 같은 생각이었으니 당황하는 것 같다.

    “두 사람 친하잖아요. 당사자들은 좋아할 것 같은데.”

    -으으음. 뭐, 어쩔 수 없지. 그나 저나 최군도 대단하네.

    “ 뭐가요?”

    -3대 콩쿠르를 제패하겠다는 말이잖아.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네 기준에서 생각하면 안 돼. 두 개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것만으로도 유래가 거의 없잖아.

    최지훈 전에는 블레하츠가 쇼팽 콩쿠르와 차이코프스키에서 우승했다고 들었다.

    -애초에 한 명의 작곡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거장으로 인정 받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일 같은데. 게다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다른 대회보다 준비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래요?”

    -응. 비교할 순 없지만 일단 준비 해야 하는 바리에이션이 너무 넓어. 현대 곡까지 준비해야 하고. 게다가

    세미파이널에서는 과제 곡을 29시 간 전에 알려주는데 심지어 미발표 곡이야.

    “그건 알고 있어요.”

    작년 최지훈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한다고 말했을 때 이미 알아본 내용이다.

    최근까지 바빴던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최 군이야 당연히 알고 참가하는 거겠지만 대단하다. 이거 니나도 쉽게 생각할 순 없겠는데?

    “열심히 해야 할 거예요.”

    -그렇지. ……잠깐. 도빈아, 설마 너도 참가하는 건 아니지? 그렇지?

    “하하. 아니에요.”

    니나 케베리히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한다고 알려주니 녀석이 입을 떡 벌렸다.

    건반을 치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 조금 재밌다.

    “아니, 왜?”

    “왜긴. 니나도 타이틀이 필요하겠지.”

    “그러니까 왜 하필 지금이냐구!”

    “28살이잖아. 더 늦기 전에 따야지 안 그러면 기회가 없어지니까.”

    “……나 갈래.”

    보나마나 또 연습하러 갈 게 뻔해 군말 없이 배웅해 주었다.

    빠끔빠끔.

    배토벤 녀석도 문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인사했다.

    ‘니나라.’

    녀석에게 니나 케베리히는 가우왕 과 또 다른 느낌인데, 아마 나이 차이가 많지 않아 더욱 그러할 거다.

    가우왕이야 녀석이 어렸을 때 이미 세계를 상대로 활동하고 있었다지만, 변변한 교육 과정조차 제대로 밟지 못한 니나가 데뷔 후 보여준 파급력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기 시작한 최지훈에게 강한 인상을 주 기에 충분했을 터.

    열등감 따위 느낄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할 바보도 아니다.

    또 그녀의 독특한 매력을 누구보다 도 잘 아는 만큼 부담될 터.

    ‘또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해내겠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만족할 때까지 땀 흘려 멋진 연주를 들려줄 것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올해 가을 공연할 피델리오를 검토하려고 일어섰는데 사카모토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곧장 전화를 받아 들었다.

    “사카모토.”

    -껄껄. 목소리가 건강해 보이네. 잘 지내는가?

    자는 시간을 늘렸을 뿐인데 티가 나는 모양이다.

    “그럼요. 사카모토도 건강하죠?”

    -요즘은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일세. 사는 게 즐거워.

    천만다행이다.

    -노먼 감독이 재밌는 제안을 해서 연락했네.

    “노먼이요?”

    사카모토와의 마지막 작업이 될 줄 알았던 영화,〈Pole to Win〉의 개봉일이 다가온 모양이다.

    -OST 공연을 제안하더군. 자네에 게도 메일이 갔을 텐데 아직 확인 못했는가?

    시계를 만져 메일함을 여니 어제 일자로 노먼에게서 온 메일을 볼 수 있었다.

    “아, 있네요.”

    -껄껄. 살펴보고 이야기하지.

    “그래요. 확인하고 전화할게요.”

    사카모토와 통화를 마치고 노먼이 보낸 메일을 눌렀는데 때마침 전화 가 왔다.

    ‘누구지?’

    일반 전화인데 모르는 번호다.

    업무용 번호는 전부 멀핀에게 가도 록 되어 있고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단원 중에서도 몇 없어 의아해하 며 받으니.

    -안녕하십니까. 베를린 경찰국의 안드레아스 볼 경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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