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39화
74. 최지훈 출격(1)
“웃지 마!”
귀여워서 웃는 건데 심통이 나버린 모양이다.
잔뜩 성을 내기에 간신히 웃음을 참고 다가갔다.
“ 앉아봐.”
“안 해!”
“예전처럼 해보자. 내가 먼저 칠 테니까 따라 해봐.”
“안 한다니까? 웃을 거면서!”
“내가 언제?”
“헐. 뻔뻔한 거 봐.”
“아하하하!”
어르고 달랜 뒤 맞은편 피아노에 앉았다.
최지훈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쿡쿡 댔고 차채은은 입을 있는 대로 내밀고 있다.
“박자 감각은 살아 있는 것 같으니까 금방 늘 거야.”
그렇게 말하곤 8번 연습곡을 연주 하는데.
틀렸다.
“틀렸대요! 틀렸대요!”
아주 신났다.
방금 일을 복수라도 하는 듯 어깨 까지 들썩이며 놀려대니 간신히 진 정했던 최지훈이 또 터지고 말았다.
“아학학학하. 아아아. 나 도빈이가 틀리는 거 처음 들어.”
“……까먹었어. 악보가 어디 있더라.”
연습실 안쪽, 악보를 보관해 두는 쪽방으로 들어갔다.
정리 좀 하라고 다그치시던 어머니도 필요한 건 금방 찾아내니 포기하셨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어지러워도 나름 있어야 할 곳에 놓아둔 거라 남의 손을 탔다간 영영 못 찾게 될 것이다.
“세상에. 돼지우리가 따로 없네. 이 게 다 뭐야? 찾을 수 있긴 해?”
어머니랑 진달래와 청소부에 이어 네 번째로 듣는 말이다.
“여기.”
잊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때는 내 피아노를 넘어설 거라 생각했던 찬란한 재능을 만나, 가르치는 즐거움을 느꼈는데.
지금은 좋은 추억일 뿐.
‘진지하게 시작한 건 아니니까.’
이 악보를 다시 꺼낸다 해서 채은 이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접어둔 아쉬움도 꺼낼 필요는 없을 거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8번 연습 곡을 연주했다.
“해봐.”
궁시렁거리면서도 결국 따라한다.
역시나 어렸을 때처럼은 되지 않는지 반복해 틀리는데, 확실히 감이 좋다.
“단순히 세게 친다고 다가 아니야.”
채은이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밀었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이 전달 돼. 손가락에도 무리가 덜 하고.”
“응.”
“이 부분은 손가락 번호를 지키지 않으면 꼬여. 이렇게.”
“오.”
“여긴 팔꿈치를 같이 움직여 주는 게 소리가 더 예뻐.”
“이렇게?”
“아니. 원을 그리듯이. 그래.”
자세를 잡아주고 틀린 곳을 몇 번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금방 좋아진다.
가우왕도 니나도 지훈이도 이만한 재능을 가지진 못했다.
‘생각하지 마.’
자꾸만 아쉬움이 밀려들어 안타깝다.
“아, 재밌었다. 자, 이제 오빠 차례.”
차채은이 일어나 최지훈을 보며 말했다.
따라서 같이 고개를 돌리니 최지훈 이 평상시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러니까 너무 좋다. 예전엔 우리 이러고 놀았는데.”
“난 기억 안 나.”
주말 오전부터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놀고 싶었던 것 같다.
“뭐 할까?”
“뭐든.”
최지훈의 피아노는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로 처음이라 그간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도 할 겸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녀석의 연주는 듣기 편하니까.
첫 번째 음이 울리고.
길고 앙상한 손가락이 장막을 헤치고 나온다.
‘메피스토 왈츠.’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인데 자주 연주되는 곡이 아니기도 하고 최지훈 이 연주하는 걸 듣는 것도 처음이다.
그간 레퍼토리를 더 추가한 모양.
혹은 연습 중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뭐야.’
너무도 선명히 시작되고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첫 음과 끝 음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시력을 잃고 얻은 내 귀를 완전하게 만족시킨 소리는 여태 없었고 여러 연주자의 앨범을 찾아 듣기를 벌써 몇 달째.
그나마 만족스러웠던 연주는 크리스틴 지메르만과 가우왕, 바이올린에서는 찰스 브라움과 스노우 한 그리고 나윤희 정도였다.
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조차 성에 안 찼으니 어지간한 연주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하다.
그런데.
설마 내 귀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피아니스트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이야.
눈을 떴다.
피아노와 그 앞에서 행복하게 웃는 최지훈이 시야에 들어온다.
항상 방실방실 웃는 녀석이지만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유독 즐거워 보여 보고 있자면 그 행복이 전해지는 듯하다.
‘혹시.’
금방 알 순 없었지만 자세히 보고 있자니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잠깐만.”
“어?”
“방금 거기 다시 연주해 봐.”
최지훈은 흔쾌히 다시 연주했다.
“한 번 더.”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연주한다.
네 번째도 다섯 번째 연주도 들으며 거듭 확인한 뒤에야 난 이 미련 한 천재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너…… 이거 얼마나 연주했어?”
“이상해? 평소대로 연습했는데.”
평소대로.
생각해 보면 최지훈은 어렸을 때부 터 곡을 익히는 속도가 느렸다. 단 하나의 곡을 한 달 내내 반복해 연주했던 녀석이다.
하루 14시간 이상 단 하나의 곡을 한 달 내내.
혹은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연습실에 피아노만을 앞에 둔 채 미련하고 가장 바른 길로 걸어 나갔던 것이다.
그것이 곡의 깊이를 더하는 일과 표현력을 더해줄 순 없지만 단 하나.
일정하고 정확한 소리를 내는 일만 큼은 녀석을 완벽한 수준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전율이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한 번 연주할 때마다 정확히 하려 고 했던 거야. ……자기 입맛이 아 니라 악보 그대로.’
녀석이 곡을 깊이 이해하여 박자를 가지고 놀거나 장식음을 추가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 재능은 없었으니까.
어린 최지훈에게 있어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방법은 최대한 악보를 똑 같이 연주하는 것과 그것을 항상 일 정하게 유지하는 것뿐이었으리라.
그렇게.
무난한, 군더더기 없는, 단점이 없는 피아니스트라 불리게 되었는데.
‘아니야.’
최지훈은 특출한 부분 없이 두루두 루 좋았던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 이 녀석의 피아노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나마저. 그 누구도.
이 시대가 최지훈이란 피아니스트를 몰라봤던 것이다.
“많이 이상해? 어디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걱정하는 녀석을 두고 소파에 기 댔다.
이건.
재능이 아니다.
이 고결함을 재능이란 쉬운 말로, 그 따위 말로 치부할 순 없는 법이다.
녀석이 다섯 살 때부터 반복해 왔던 모든 경험이 발현된 맑은 소리.
우직하게 바른 길로만 걸었던 녀석만이 낼 수 있는 소리다.
범재였던 아이가 피아노를 사랑했고.
사랑한 끝에 수재가 되어서도 재능과 시기에 굴하지 않고 정도를 걸어 마침내 거장의 반열에 오른 지금.
“너……
“응?”
목이 메어 다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오빠……. 울어?”
말로는 차마 다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어나 천천히 발을 옮기고.
“어? 어?”
꽉 끌어안아 축하를 대신했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어린 손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불쾌하기는커녕 반색하고 나섰다.
지난 모든 역사를 통틀어 고전 음악의 정점에 도달한 음악가이자 격정의 문을 연 손님이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와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배도빈에게 가장 아끼는 차를 내어주곤 맞은편 에 앉았다.
“무슨 일로 급하게 찾아온 건가요?”
“얼마 전에 지훈이랑 만났다고 들었어요.”
“그랬죠?”
지메르만이 눈매를 들어 올렸다.
배도빈은 그 날카로운 시선과 눈을 맞추고 확신하고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 해요. 지훈이의 연주에서 무엇을 찾으셨나요.”
질문을 받은 지메르만은 빙그레 웃 더니 일어나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건반을 쓸어내리다가 C음을 눌렀는데 그 맑고 안정적인 소리가 깔끔하게 퍼졌다.
“건반을 눌러 현을 때린다. 피아노 뿐만이 아니라 모든 타현악기의 기본이죠.”
이번에는 1도 화음.
“박자를 가지고 놀고 작곡가의 의 도를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감정을 더 잘 전달할까는 고민하지만 단 한 번의 터치를 완벽하게 하려는 사람은 없어요.”
지메르만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소파로 돌아왔다.
“난 내가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얼마 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어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배도빈을 보며 미소 지었다.
“지훈 군은 피아니스트로서 갖춰야 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경험과 본인을 드 러내는 것뿐. 정말 장래가 기대되는 사람이에요.”
배도빈은 지메르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주의자인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본인과 같이 뛰어난 청력을 지녔음과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제자, 가우왕에게 그렇게 혹독한 타건 연습을 시켰던 것이었다.
덕분에 가우왕은 빠르고 정확하게 건반을 누를 수 있게 되었고 그 기교는 현재 스승 지메르만을 넘어서 있었다.
배도빈은 처음 가우왕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기교는 훌륭하나.
곡에 깊이가 없는 반쪽짜리 피아니스트
그러나 배도빈과의 경연을 통해 연주에 깊이를 더해감으로써 배도빈도 인정하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지메르만은 스승으로서 가우왕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는 데까지 도왔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당시의 가우왕은 완성되지 않았고, 배도빈의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인데.
그 가우왕이 최지훈의 롤모델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나.’
어렸을 적부터 최지훈은 가장 좋아하는, 가장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가우왕을 언급하곤 했는데.
그를 목표로 피아노를 연습했던 만큼 자연스럽게 지메르만과 가우왕이 이어나가는 타건의 세계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크리스틴 지메르만이 어떻게 최지훈이라는 준비된 거장을 알아 볼 수 있었는지 모두 이해되었다.
또.
그때의 가우왕과 지금의 최지훈을 비교해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소리를 정확하게 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지훈이 듣는 ‘무난하다’는 평은 아직 그만의 작품 세계가 옅다는 뜻 이고 그것만 채워지면 된다는 말과 같았다.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가우왕이 그러했듯이 최지훈도 경험이 쌓이면 도약할 거라 말하고 있었다.
배도빈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형제예요.”
“……그건 몰랐네요. 입은 무거우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뭐라는 거야.’
배도빈은 눈을 감고 손바닥을 펴 보인 지메르만을 이상하게 여겼다.
어색한 웃음을 사이에 두고 이번에는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출전한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함께 출전한다면 그가 허물을 벗고 날개를 펼칠 수 있지 않을까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제의에 배도빈이 고개를 저었다.
“같은 길을 먼저 걸었던 사람이 나선다고 했어요. 지금 지훈이에겐 저 보다 그 사람과의 만남이 더 좋을 거예요.”
“먼저 걸었던 사람?”
“당신에게 문자를 받고 자존심이 상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