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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37화 (337/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37화

73. 2024년 봄(2)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 요즘.”

“저기.”

“아, 머, 먼저 말해.”

당황한 나윤희가 말을 더듬었고 배도빈은 작게 웃었다.

“아마 같은 말일 것 같아요. 제 이 야기는 들은 뒤에 할게요.”

배도빈의 말에 나윤희가 입을 다물 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 나았다고 들었는데. 아직 신경 쓰이는 건가.’

그는 나윤희의 작은 행동에도 신경이 쓰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연주를 위해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손을 망가뜨릴 수도 있었던 그 일이, 상실을 경험했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배도빈이 나윤희의 손가락에 신경쓰고 있는 사이, 준비를 마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실은 일정 문제 때문에.”

“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배도빈은 나윤희의 한탄을 들어줄 생각으로 귀를 열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생각지 못한 발 언을 한 그녀라면 어쩌면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알려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악단 운영하는 것도 부담일 텐데 A팀이랑 C팀 맡고 있는 게 걱정되 어서……. 조금 쉬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네?”

예상했던 이야기가 아니라 배도빈은 드물게 당황했다.

“응?”

“아니.”

잠시 간격을 두고 물었다.

“누나 이야기는요?”

“ 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나윤희를 보며 배도빈이 피식 웃고 말았다.

“힘들어서 온 거라 생각했어요. 그 러지 않아도 일정에서 뭘 빼면 좋을 까 의논하려고 했었고.”

“나, 난 괜찮아. 그보다 네가 더……

“저도 괜찮아요. 푸르트벵글러가 자꾸 쉬려고 해서 문제지 나머지는 원래 하려던 일이니까요.”

배도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괜찮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 에서 묻어나오는 피로감을 본 나윤희는 입을 다문 채 입술을 두어 번 씹었다.

그리고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이후로…… 많이 생각했어.”

배도빈이 조난을 당한 뒤로 반복해 생각했던 이야기였다.

나윤희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정리 했던 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 정말 네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우리 모두 그랬구나 하고.”

배도빈은 차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나윤희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네가 돌아와서 실망하지 않게 다 들 열심히 했어. 슬퍼서 힘들었지만 그래야만 했으니까. 근데 잘 안 되더라구.”

두 사람이 온전히 눈을 마주했다.

“결국엔 그 고생을 하고 돌아온 네가 다시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진 것 같아서……. 미안하고 걱정이야.”

“그건.”

“그래서.”

나윤희가 배도빈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나도 소소도 다른 단원들도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 네가 없더라도, 아니, 쓰러지기 전에 짐을 나눠 질 수 있는 연습. 우리한 테도 나눠주면 좋겠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나윤희는 배도빈을 걱정스레 보았다.

이제 겨우 19살.

평범한 아이였으면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안고 있는 일은 세상 그 어떤 음악가라 할지라도 감당키 어려울 만큼 전문적이었고 그 양은 터무니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모든 사람이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짐을 짊 어진 사람은 배도빈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발표되는 모든 신곡이 그가 만든 것이었고.

정기 연주회와 이벤트 연주회의 절 반가량이 배도빈이 편곡한 대로 연주되었다.

피아노가 필요할 때는 직접 나섰고 단원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마찬 가지.

무대 배치, 악단 운영까지 책임지 면서 동시에 본래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 공부하고 싶었던 다른 문화 권의 음악도 틈틈이 공부하니, 기본 생활에 필요한 시간을 최소한으로 가져가도 수면 시간이 부족할 수밖 에 없었다.

더욱이 본인은 신경 쓰지 않지만.

유명해지면서 동시에 생겨난 안티 들을 경험한 나윤희는 어떻게든 배도빈과 엮여보려고 발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무시하려 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얼마 나 많았으면 저리도 무감각해졌을까.

안타까웠다.

‘저러다 쓰러져.’

그가 조난되고.

그 빈자리를 절감한 나윤희는 배도빈이 쓰러지기 전에, 그를 잃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생각 했다.

너무도 소중했기에 잃을 수 없었다.

능력이 부족해 배도빈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가능하다면 단원 모두가 가장 많은 짐을 짊어진 그를 도와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걱정스레 살펴보는데.

배도빈이 고개를 숙이고는 이마를 짚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배도빈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곡을 안 쓰고 지휘를 안 하고 연주를 못하는 것보다 힘든 건 없어요.”

“그럼 적어도 음악 외적인 일이라도.”

“카밀라랑 멀핀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대부분 보고를 받고 의사결 정만 할 뿐이니까요.”

배도빈의 단호함에 나윤희는 할 말을 잃었다.

고집스러운 그는 어떤 말을 듣더라 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음악만을 생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좋지만.

그래서 싫다.

자신을 챙기지 않는 무모함이, 그 어린 생각이 주변의 걱정을 사는 것에 앞서 본인을 망치고 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했다.

“제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제 누나 일정 좀 볼게요. 저번 주에.”

“그러다 아프면 어떡해.”

나윤희가 다시 한번 배도빈의 말을 끊었다.

“아프련 곡도 못 쓰고 지휘도 못 하고 연주도 못 하잖아. 그땐 어떻게 하려구.”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에 배도빈이 입을 다물었다.

단원으로부터 이렇게 사랑받는 지휘자가 있을까.

예전 삶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기에 악장의 진심 어린 걱정이 지휘자에게는 너무도 큰 기쁨이었다.

“너무 걱정 말아요. 병원도 다니고 있고 푸르트벵글러랑 산책도 하고 있으니까.”

반대로.

나윤희에게는 배도빈의 태연한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안쓰러웠다.

유진희와 차채은을 통해 배도빈이 6살 무렵부터 과로로 쓰러지길 반복 했던 정황을 들었고.

실제로 그를 잃을 뻔 했던 경험이 자꾸만 겹쳤다.

“아파서 병원 가면 늦잖아.”

“쉬면 돼요. 아픈데도 일할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걱정을 덜어주려고 했던 말이 나윤희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아,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 마! 바 보 같고 미련해 보여!”

배도빈의 방은 항상 이러했다.

악보와 서류가 가득했고 어찌나 마셔대는지 그 종이에 커피 향이 밸 정도였다.

항상 피로에 젖어 눈 주변이 검었고 최고의 환경에서 자랐건만 얼마나 무리했으면 성장도 제대로 못 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 배도빈은 마치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고 그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할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아직 어리잖아. 19살밖에 안 됐잖아. 다른 사람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면서 왜 네 몸은 막 대하는 거야?”

배도빈의 얼굴이 굳었다.

* * *

맞는 말이다.

푸르트벵글러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사카모토나 발그레이나 노이어,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에게서 들었던 말일진대.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쾌했다.

울먹이는 나윤희와 눈을 마주하고 그녀가 시선을 피한 뒤에야 무엇을 못마땅해하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었다.

배도빈으로서의 삶도 벌써 18년.

아이 취급 받는 일에는 익숙하다.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 료이치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나를 동등한 입 장에서 대했지만.

고작해야 스무 살도 안 된, 아니, 유아시절부터 활동했던 탓에 기본적으로 많은 이로부터 알게 모르게 아 이 취급을 받았다.

결국에는 음악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그들 눈에는 어쩔 수 없는 아이였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일인데.

나윤희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불쾌했다.

그녀가 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금까지만 해도 기뻤는데.

분명 그러했는데 짜증이 난다.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아? 커피 안 마시면 버틸 수도 없잖아. 벌써 부터 그러면.”

“ 그만.”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말았다.

나윤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은 크게 떴고 말을 되삼키고 있는 모습에 아차 싶었다.

“……이해했어요.”

진심이다.

“제 이야기는 이만 하고 누나 일정 봐요. 뽑아놓은 게 있었는데.”

멀핀이 뽑아준 나윤희의 스케줄러를 찾으러 일어서는데.

갑자기 눈앞이 컴컴해졌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간신히 소파를 짚었지만 시야가 좁아지면서 찾아온 갑작스러운 어둠과 어지러움을 이겨 낼 순 없었다.

“도빈아!”

소파에 의지해 반쯤 넘어진 상태에서 나윤희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다급한 목소리와 동시에 시야를 되찾았다.

나윤희의 간절한 얼굴을 보니.

사카모토가 죽어갈 때 나도 이랬을까 싶다. 잔뜩 찡그린 미간과 당장 에라도 터질 것만 같은 눈물.

비틀린 입술까지.

‘ 아.’

알 것 같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들어 앰뷸런 스를 부르려 해 손목을 잡았다.

“ 괜찮아요.”

“안 괜찮잖아!”

나윤희와 넘어지면서 쓰러뜨린 악보들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무실을 둘러보니 돼지우리가 따로 없다.

‘괜찮아 보일 리가 없지.’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하하. 하하하핫.”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는 나윤희를 보니 피로가 몰려든다. 소파를 짚고 있던 손을 빼 악보 무더기에 몸을 뉘었다.

잉크 냄새가 물씬 풍겼고.

편안하다.

“도빈아? 도빈아!”

“……졸려요.”

“어?"

“잠깐 이러고 있을게요. 잠깐이면 되니까.”

“정말 괜찮은 거야?”

나윤희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엉망이 된 방을 둘러보더니 날 흔들었다.

“쉬, 쉴 거면 휴게실에 가서 침대에 눕자.”

“싫어요.”

바흐와 모차르트와 쇼팽과 슈베르 트와 드보르자크에 둘러싸인 이곳이 가장 편안하다.

“……그, 그럼 쉬어. 이따 올게.”

나윤희가 일어서려 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가지 마요.”

“어?”

“쉬라면서요. 잠깐만 같이 있어줘요.” 정말 잠깐이었지만.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 보니 그 편안함에 취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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