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33화 (33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33화

    72. 신년 음악회(3)

    전 세계 수백여 오케스트라의 정점.

    베를린 필하모닉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적적으로 티켓을 구한 관객들은 설렌 가슴을 조이며 그 면면들을 살 펴보았다.

    신년 음악회를 위해 재편성된 베를린 필하모닉의 구성원들은 그 이름 만으로도 왜 세계 최고라 불리는지 증명하는 듯했다.

    악장으로 나선 헨리 빈프스키는 푸르트벵글러의 아이 중에서도 니아 발그레이와 함께 아름다운 음색을 내는 연주자로 유명했고.

    제2바이올린을 맡은 나윤희 역시 오케스트라 대전에서의 불새 이후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연주자 중 한 명이었다.

    활력 가득히 노래하는, 벌써 십 년 이상 최고의 첼리스트라 불리는 이승희는 물론.

    역사상 가장 뛰어난 비올리스트 윌 리엄 프림로즈와 비견되는 에밀 프리지아.

    베를린 필하모닉의 베이스 수석으로만 30년 근속한 다니엘 홀랜드.

    그 외에도 각 연주자들은 지금 당 장에라도 본인의 이름을 내건 음악 단을 만들 수 있었으니.

    각국에서 배도빈을 보기 위해 찾아 왔던 이들도 신년 음악회를 위해 나 선 최고의 선발진이 어떤 연주를 들 려줄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에스트로!”

    “마에스트로!”

    마침내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피아노 솔로를 맡은 배도빈이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소리 높여 환영했다.

    지구 전체를 홀려버린 불세출의 천재 음악가와 지난 40여 년간 최고 의 지휘자로 군림해 온 폭군의 등장 에 팬들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수백 번 무대에 올랐던 배도빈도 그들과 같은 심경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 한 쾌감에 더 없이 행복했다.

    더욱이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긴 공백 기간을 가졌던 터라 그 감회가 남달랐다.

    시력을 잃고 조난되었을 때만 해도 이 자리에 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후회 없이 하자.’

    의지는 충만했다.

    배도빈은 피아노 앞에 앉고 숨을 고른 뒤 눈을 감았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연주하기 위해 오랜만에 무대에 올라선 흥분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솔직하게.

    오래 기다려 주었던 팬들을 위한 무대 위에서 배도빈은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푸르트벵글러에게 시선을 주었다.

    ‘준비됐어요.’

    시선을 교환한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끄덕이고 헨리 빈프스키에게 신호를 주었다.

    악단이 준비를 마치고.

    폭군이 제1바이올린을 향해 두 팔을 힘차게 벌리자 모든 악기가 활기 차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 G 장조.

    영광의 피날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남자 위로 수천 개의 꽃잎이 떨어진다.

    주제를 이어받아.

    피아노가 홀로 아름답게 피어오르며 오케스트라는 그에 호응하듯 꽃 잎처럼 춤춘다.

    왈츠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에 서 춤을 추듯 어울린다.

    ‘ 오오.’

    그 아름다움에 취할 수밖에.

    관객들은 이제 막 연주가 시작되었을 뿐인데도 두 손을 꼭 모았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던 피아노의 멜로디는 어느새 조금씩 하강한다.

    배도빈에 의해 하강하는 피아노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다.

    가장 소중한 동료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상실감이 불협화음 속에서 흐드러 져가고.

    피아노가 차마 연주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오케스트라가 파르르 떨리며 지난 날의 평화롭고 따뜻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배도빈의 피아노가 말한다.

    ‘오늘은 기분 좀 어때요?’

    ‘이건 정말 멋진 곡이 될 거예요.’

    ‘그때 기억나요? 더 퍼스트 오브 미 작업했을 때.’

    사카모토 료이치를 향한 배도빈의 말들이 피아노의 건반을 통해 전해 지고.

    그것이 이어질수록 잔혹한 현실은 클라리넷과 플루트로 더욱 서글퍼진다.

    절망의 선율이 선명해질수록 갈팡 질팡하는 피아노.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현악기들.

    떠나지 말라고.

    데리고 가지 말라고.

    비탄 속에 고뇌하는 배도빈의 마음 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 주곡 2번은 애처롭게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인사.

    이별을 직감한 두 위대한 음악가의 정수가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헨리 빈프스키가 이끄는 제1바이올린과 배도빈의 피아노는 마치 사카모토 료이치와 배도빈의 연주를 연 상시키듯 구슬프고.

    장렬하게.

    최후를 노래했다.

    간격을 길게 두고 울리는 팀파니와 묵직하게 눈물을 떨어뜨리는 콘트라 베이스.

    관객들은 어느새 사카모토 료이치 와의 녹음을 떠올리며 연주를 이어 나가는 배도빈의 심상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있었다.

    죽어가는 벗을 앞에 둔 피아노는 그저 엉망으로울 뿐.

    마음은 갈가리 찢겨나가 호수에 비 치는 달빛처럼 위태롭다.

    ‘ 아아.’

    그때.

    신비롭게 반전되는 분위기.

    단 한순간 내려온 굵은 빛에 피아노는 의아해한다.

    그러나 이제 그를 떠나보내지 않아 도 된다는 그 기쁨의 감정이 고조되 며 의뭉스러움 속에서도 안도하는 피아노.

    관객들도 한시름 놓는다.

    그 순간 잔인하게 반전되는 악상! 칼날 같은 바람을 타고 내리는 눈. 갑작스레 찾아온 또 다른 시련.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대부분 죽고 눈보라가 이는 험지에 홀로 남겨진 배도빈은 좌절한다.

    건반 위의 양손이 거리를 벌릴수록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앞을 볼 수 없는 절망감.

    나란히 움직이는 양손에서 전달되는 두려움.

    사랑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기에.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듯한 그 애절한 피아노 소리에 콘서트홀을 찾은 팬들은 조용히 눈물을 홈쳤다.

    그제야 오늘 배도빈이 준비한 차이 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진의를 이해한 것이었다.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찬란한 날만 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던 이들과 마 찬가지 로.

    배도빈 역시 밝은 미래만을 생각했었기에 지난 몇 달간의 일은 받아들 이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러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배도빈은 자신의 경험과 그때의 마음을 팬들에게 솔직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그리웠다고.

    천재 음악가의 고백에 팬들은 배도빈 역시 그러했냐고 그들도 그랬다 며 동조하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연결된 순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소리, 연주를 넘어서 대 화와 이해로 이어졌다.

    함께 슬퍼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기쁨을 나누는 50분간의 연주.

    그 뒤에 터져 나오는 감동의 물결이 쌓이고 쌓여.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 관객들은 그들이 받았던 감동을 그대로 베를린 필하모닉에 돌려주었다.

    “브라보오!”

    슬픔과 행복을 준 베를린 필하모닉 은 관객들의 격렬한 환호에 또한 감동받아.

    잠시간 연주를 멈추고 온전히 그 기쁨을 받아들였다.

    ‘정말 끝을 알 수 없어.’

    객석에 있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맺힌 눈물을 애써 무시하곤 박수를 보 냈다.

    배도빈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 했다는 보도를 접한 그는 가슴이 무 너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자책하며.

    늙은이의 욕심으로 가장 빛나는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여기며 단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배도빈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하 기 전까지 기껏 회복한 몸이 다시금 악화되었고.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주변의 말 따위 들리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아른거리는 배도빈의 뚱한 표정과 눈물 그리고 그의 피아노 소리 때문에 사카모토 료이치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그래서 살아 돌아왔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배도빈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단숨에 베를린까지 날아와 그를 품에 안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멋들어진 연주를 들려주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복귀 무대는 지금까지의 너무도 훌륭했던 모습보다도 더욱 가슴 에 와닿았다.

    가슴을 폭행당하는 듯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마치 연주자와 청자가 하나가 된 듯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시련 뒤에 더욱 굳세지는 신 화 속 인물처럼.

    더 나아갈 것 없이 보였던 완벽한 천재가 다시 한 발 내디뎠음을 확인 한 사카모토 료이치는 좀 더 오래 살고 싶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다.

    【베를린 필하모닉. 세계 최고의 이름을 각인시키다]

    【크리스틴 지메르만, “베를린 필하모닉만큼 완성도 높은 오케스트라는 없다.”]

    【마리 얀스.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침체되었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리는 듯한 무대.”

    【사카모토 료이치, “완벽에 완벽을 더하는 그들의 행보에 팬으로서 기 쁠 뿐이다.”]

    【미카엘 블레하츠, “오랜 공백이 무색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배도빈은 더욱 정교해졌고 듣는 순간 동화된다.”】

    [가우왕. “저런 실력 두고 솔로만 해대니까 답답한 거 아니야.]

    【최지훈, “도빈이의 피아노와 어울리는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하모닉 뿐이에요.”]

    수많은 음악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배도빈의 신년 음악회는 첫 번째 날부터 큰 호 응을 얻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 서비스와 웹플릭스, 뉴튜브, 미시시피 비디오 프리미엄 서비스까지 4개 사 동시 송출된 당일 연주는 전 세

    계 800만 명이 동시 시청하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위엄을 과시하였고.

    다소 침체되었던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키고야 말았다.

    그래모폰, 피가로, 타임지 등 각국 의 주요 언론사에서는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기사를 쏟아 내기 바빴고.

    세계가 베를린의 마왕이 재림했음을 실감하던 도중.

    테메스의 스칼라는 더없이 큰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배도빈의 바이올린만 들었던 스칼라로서는 그 진면목을 목도한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듯했다.

    솔직하게 멋진 연주를 하는 정도라 생각했던 배도빈이 피아노 앞에 앉아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건반 하나를 누를 때마다 퍼지는 영혼의 공명이.

    마치 테메스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동굴의 물방울처럼 울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바깥세상은 정말 놀라운 것뿐이다. 지금 가장 훌륭한 음악가는 누구지?’

    ‘ 나.’

    ‘농담은 그만해. 네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건 알지만 난 좀 더 세계를 알고 싶어.’

    본인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 라고 자부하던 배도빈의 말이 떠오르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그게 헛소리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피아노 연주를 접한 지 얼마 안 된 스칼라였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성은 굳이 다른 이의 연주를 듣지 않아도 배도빈이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거기다 헨리 빈프스키와 나윤희란 바이올리니스트와 여러 악기를 다루는 아름다운 여성까지 본인의 실력을 숨긴 채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을 보며.

    정말 밖으로 나오길 잘했다고.

    이런 곳이라면 정말 테메스 신을 기쁘게 할 연주를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칼라는 그날 밤 찾아온 배도빈을 붙잡았다.

    “날. 날 베를린 필하모닉에 넣어줘. 그들과 함께라면 나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다.”

    간절한 호소와 희망찬 눈빛을 보며.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나 없으면 의사소통도 못하면서 무슨 소리야?”

    그러고는 잠시 생각한 끝에 좌절한 스칼라에게 좋은 제안을 했다.

    “유치원이라도 다녀볼래? 이것저것 가르쳐 줄 텐데.”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하지.”

    “얌전히 공부해야 해.”

    “물론.”

    스칼라는 환하게 웃는 배도빈을 보 며 약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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