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30화
71. 버라이어티 쇼? 쑈(5)
“거북이야.”
“마, 만져 봐도 될까?”
“그래.”
배토벤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스칼라의 숨이 거칠어지고 조심스 레 뻗은 손을 경계하는 듯 배토벤이 목을 움츠렸다.
“어, 얼굴이 들어갔어.”
“겁먹어서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스칼라가 아쉬운 듯 손을 내려놓았다. 자꾸만 힐끔거리는 게 영혼을 빼앗긴 듯하다.
이 녀석이 귀여운 탓도 있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해 뭐든 신기하고 좋을 때다.
같은 경험을 했던 덕에 스칼라의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응하는 건 어때?”
“매일 놀랄 뿐이야. 이렇게 멋진 세계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거듭 감사하지.”
거부감이 없어 다행이다.
지금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통 해 간접적으로 체험할 뿐이지만 말을 어느 정도 익힌 뒤에는 사회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적응이 빠를 거다.
나처럼 성장 과정을 거치는 게 아 니기 때문에 기본 상식조차 없는 녀 석은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럼.”
“잠깐만.”
일어서려 하는데 스칼라가 날 불러 세웠다.
“뭐 필요한 거 있어?”
“그게 아니라. ……어제 연주회에 서 요란한 복장을 하고 여러 악기를 다루던 여성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 지?”
“왕소소.”
녀석이 반복해 소소의 이름을 중얼 거렸다.
“훌륭한 연주자를 기억하고 싶은데 이유가 있나?”
“그래.”
조금 이상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다.
문 앞에 스칼라가 남긴 쪽지가 있어 챙겼는데 하루에 한 번, 필요한 물건을 적어두라 했더니 이상한 걸 써놓았다.
‘장작은 그렇다 쳐도 활은 어디다 쓰려는 거야?’
사냥한답시고 동물원에 가기 전에 난방과 음식을 잘 챙겨주라 말해야겠다.
퇴근한 왕소소는 방에 들어서자마 자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졸려.’
오케스트라 대전까지만 해도 일부 매니악한 팬들만 있었던 왕소소에게 최근 몇 달간의 인기는 무감각한 그 녀로서도 기쁜 일이었지만.
평소에 쓰지 않는 안면근육을 써 계속 웃고 있자니 그 피로감이 누적 되고 있었다.
오늘도 쓰러지기 직전이라 씻을 생각도 못 하고 잠을 청하는데.
부우웅-
핸드폰이 진동했다.
재수탱이라는 단어가 액정에 비치자 왕소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남매의 강압적이고 극적인 화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그녀는 전화기를 들 힘도 없어 스피커 모드 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가우왕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왕소소가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럼에도 가우왕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가식적으로 웃으면 팬들은 다 느낀다니까?
‘어쩌라고.’
왕소소는 왜 그런 부탁을 했을까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누구도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 만 배도빈이 없는 베를린 필하모닉 B는 디지털 스트리밍에서 확연히 차이가 났었다.
오케스트라 대전 때부터 원맨팀이 라는 이미지가 박혔거늘, 우승 후 그러한 이야기는 사그라질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동시 시청자 수 수백만을 넘기던 B팀의 티켓 파워는 곤두박질쳤고 그 한계는 누구보다도 B팀 단원들 이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배도빈은 케르바 슈타인을 B팀 지 휘자로 임명, 찰스 브라움과 나윤희를 A팀 악장으로 보냈고 B팀 악장 중 원년 멤버는 왕소소뿐이었다.
그녀로서는 위기 상황에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고민을 오빠 가우왕에게 꺼 냈던 것이 화근이었다.
‘연주회는 퍼포먼스야. 연주를 잘 하는 건 기본이고 이목을 끌 요소가 필요하지. 꼬맹이가 없는 베를린 B 에는 그게 없어.’
‘그럼?’
‘만들어야지. 연주할 때 머리도 한 번씩 튕겨주고 웃어주기도 하고 노려보기도 해. 의상도 중요하지.’
반신반의하며 그런 이야기를 케르 바 슈타인에게 전한 왕소소는 의외의 대답을 받았다.
‘ 해보자.’
케르바 슈타인 역시 정식 지휘자로 부임하고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었기에 천재 왕소소를 전면에 내 세운 것에 가능성을 보았다.
오랜 시간 교류가 없던 탓일까.
가우왕은 마치 자신의 무대를 준비 하는 것처럼 왕소소의 모든 것을 검 토했고 거기에 퍼포먼스라고 하면 빠지지 않는 찰스 브라움까지 가세 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데.
그게 또 새로운 팬을 유입시키니 왕소소는 어쩔 수 없이 이끌려 다니 게 되었다.
케르바 슈타인도 차차 호전을 보이는 관객 수에 만족하며 왕소소를 위 해 곡을 편곡해 나갔다.
그런 상황이 몇 달째 누적된 지금.
왕소소는 다시금 오빠를 저주하게 되었다.
‘죽어. 죽어.’
그녀가 오빠를 저주하고 있는 와중 에도 가우왕은 계속해 잔소리를 늘 어놓았다.
-팬들이 열광하는 건 항상 웃는 네가 아니라 가끔씩 웃는 너라고. 힘들어 죽겠는데 억지로 웃고 있어 요라고 해봤자 동정표를 얻을 뿐이 야. 네게 빠져들게 해야 해.
가만히 듣고 있던 왕소소가 벌떡 일어나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다.
“몰라!”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 어버렸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다.
이미 베를린 B의 주 레퍼토리가 된 것을 변경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전면에 나서서 요상한 짓을 해대자니 그럴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늘어난 팬이 눈에 밟혀 쉽 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정말 하기 싫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자신을 좋아해주는 모습을 보면 행복했다.
소소는 죽은 듯이 엎드려 생각을 정리하다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방문을 열어젖혔는데 마침 복도에 해결해 줄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도빈!”
* * *
말을 끊어 말해서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소소의 답답함은 이해할 것 같다.
전과 다른 모습에 이상하다 생각은 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연주와는 별개 문제다.
귀가 좋아지면서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연주에 실망했던 일은 차치하 고, 소소가 겪는 부담은 분명 해결 해야 할 중대 사항이다.
‘대체 무슨 짓을 시킨 거야.’
집은커녕 방 밖으로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 요란한 퍼포먼스를 한다든가 공연 뒤에도 팬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어주는 등 훌륭한 ‘스타’로서 활동했으니 부담을 느끼는 것도 당연 하다.
가우왕이나 찰스 브라움 같은 경우는 그런 걸 즐기는 사람들이라 모르겠지만 소소의 성격상 그런 걸 받아 들일 수 있을 리 없다.
“소소가 하고 싶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어요.”
우선은 안심시켰다.
“팬들이 좋아해. 그런 짓 하지 않으면 좋아해주지 않게 될 거야.”
이게 가장 큰 문제다.
만들어진 이미지를 유지하는 게 개인으로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는
데 그걸 유지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게 지금 소소를 괴롭히는 걱정거리.
새로운 시도는 내가 항상 추구하는 일이고.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도 연주회의 가장 앞선 목적이지만 그것만을 생 각해 연주자가 망가지는 건, 내 사람이 괴로워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연주를 듣는 사람이 중요한 만큼.
연주를 하는 사람도 중요하니까.
한쪽이 일방적이 되어서는 ‘대화’ 가 즐거울 리 없다.
“오늘은 걱정 말고 푹 자요. 내일은 답이 생길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그리 믿지는 못하는 것 같다.
다음 날.
출근 시간에 조금 앞서 케르바 슈 타인과 찰스 브라움을 회의실로 불렀다.
우선.
이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싶어 케르바 슈타인에게 이번 ‘버라이어티 쑈’에 대해 물었다.
“부끄럽지만 네가 없어지고 나서 확실히 B팀을 찾는 관객이 줄어들었어. 소소 악장을 앞세운 버라이어 티 쑈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 녀에겐 정말 감사하지.”
찰스 브라움이 거들었다.
“단순 구성원을 벗어나 스타성을 가진 인재야. 덕분에 B팀 운영이 수월해졌고.”
예상대로 케르바 슈타인과 찰스 브라움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하고 있다.
아마 가우왕의 경우에는 소소 본인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거다.
“결과는 확실히 좋네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소에게 가해지는 짐이 너무 커요. 이번 장기 연주회 하루에 한 번씩 일주일 넘게 하잖아요.”
“……그렇지.”
“또 소소는 연주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것도 준비해야 하니까요.”
케르바 슈타인의 표정이 어둡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다행이다.
“또 정말 그걸 팬들이 바라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건…… 관객 수가 늘어나니까.”
부정하는 케르바 슈타인을 보며 고 개를 저었다.
“이번 일에 조언을 한 찰스나 가우왕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솔로로 활 동했어요. 찰스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은 찰스를 보러 오는 거지만, 우리 콘서트홀을 오는 사람은 뭘 기 대하고 올까요?”
찰스가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군.”
“네. 지금은 기존 팬들이 남아 있어 주니 소소의 개인 팬들이 유입되 면서 일시적으로 관객이 늘 거예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되다간 기 존 팬들을 잃을 테고요.”
케르바 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푸르트벵글러를 휴가 보낼 때처럼 임시가 아니라 악단 내외적으로 공식 지휘자가 되면서 느끼는 압박이 컸으리라.
뭘 해도 안 되니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게 되는데,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못할 거라 생각한다.
“첫 번째 날 객석에 있는데 소소의 개인 팬들이 소리를 치더라고요. 악장 사이마다 그러기도 하고.”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불문 율은 악장 사이의 침묵.
기침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숙해야 한다.
“티를 내진 않지만 분명 그것에 불 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미래의 고객을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챙기는 게 우선이겠죠.”
“맞아. 내 생각이 짧았어.”
케르바 슈타인이 얼굴을 감싸 쥔다.
“전 도전은 언제나 응원하고 지원 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될 일은 할 생각 없어요. 관객이 즐거운 게 최우선이 지만 이번 콘셉트는 아닌 것 같아요.”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라면.
여러 악기를 다루는 왕소소야 보고 싶겠지만 가면을 바꿔 쓰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함께 찍는 왕 소소를 보고 싶어 하진 않을 거다.
이건.
나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
내가 나로서 있지 못할, 베를린 필하모닉이 정체성을 잃게 될 일은 지 양해야 할 것이다.
또.
B팀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함으로써도 좋은 기회다.
“당분간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요. 편법이 아니라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는 쪽으로. 케르바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 당장 오늘부터 그래야겠어. ……미안하네, 소소 악장한테도. 너 한테도.”
“최고의 자리에 있잖아요. 따를 만 한 사람도 보고 배울 게 없으니 시행착오를 겪는 건 어쩔 수 없죠.”
“나도 명심하지.”
찰스도 케르바 슈타인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미팅을 마치고.
이러한 이야기를 정리해 푸르트벵글러에게 말해주니.
흡족하게 웃었다.
“잘했다. 완벽한 음악도, 관객을 위한 음악도, 재밌는 음악도 중요하지 만 정체성을 잃은 연주가 관객들에 게 전달될 리 없지.”
푸르트벵글러는 그렇게 고쳐나가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래, 이제 슬슬 신년 연주회도 준비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할 테냐.”
“아, 잊고 있었는데 마침 잘 말하셨어요.”
“ 음?”
“단원들 조율 좀 들어가려고요. 모레부터 A랑 B에서 몇 명 차출할 거예요.”
“학하하하! 녀석들 우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구나. 그래, 네 악단이니 마음대로 해.”
그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