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27화
71. 버라이어티쑈(2)
‘ 따분하구만.’
집에서 하루를 쉬고.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의 강요로 병원에서 갖은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벌써 12월이라 당장에라도 무대에 복귀하고 싶었지만 어딘가 다치지 않았는지 병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 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며칠간 병원 신세를 졌고.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순순히 검사를 받았는데 그런 도중에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찾아와 그나마 지 루한 병원 생활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의 경우에는.
“이놈아! 누가 멋대로 떨어지라더 냐! 어!”
“그게 마음대로 되어억.”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달려든 푸르트벵글러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내 몸을 주물러댔고.
“야, 이 빌어먹을 새끼 악마야! 살 아 있으면 살아 있다고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누구 숨넘어가는 거 보고 싶어?”
“조난당했는데 어떻게 얘길하라느 거어억.”
볼이 푹 파여 핼쑥해진 마누엘 노 이어가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환자한테 무슨 짓이에요!”
환자는 아니지만 카밀라 국장이 그 런 푸르트벵글러와 마누엘 노이어를 밀쳐 냈다.
살았다.
“도빈아, 괜찮아?”
“네. 이상 없고 요양할 겸 며칠 쉬는 거니 곧 복귀할 거예요.”
“보스••••••
카밀라 뒤에 서 있던 이자벨 멀핀 부장이 눈물을 글썽였다.
“잘 지냈죠?”
반가워 웃으며 안부를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다가와 손을 잡았는데 끝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정말 괜찮아요. 악단은 어때요?”
“도빈아, 일은 쉬고 돌아와서 하자.”
카밀라가 나서서 말렸다.
“정말 괜찮아요. 답답해서 그러니 까 요약해서 알려주세요.”
멀핀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시간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세 달 전에 BBC 프롬스에서 초청이 왔는 데 이건 거절했어요.”
사카모토랑 작업 중일 때다.
푸르트벵글러와 악장단, 카밀라에 게 전권을 위임했는데 영국에서 먼저 우리를 초청하다니.
별일이다.
그간 워낙 사이가 안 좋았던 탓에 의아해 물으니 멀핀이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참여하 지 않으면 권위가 생기지 않으니까요.”
씩 웃으니 카밀라가 거들었다.
“우리도 가급적 참여하고 싶었는데 오케스트라 대전 때문에 정기 연주회를 거의 못 했잖아. 게다가 그땐 너는 료이치 사카모토와 있었고. 어 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네요. 다음은요?”
“UN 데이 콘서트 초청을 받았는 데 거절했어요. BBC 프롬스와 같은 이유였고요.”
이상하게 UN총회장에 대한 이야 기만 나오면 홍승일과 있었던 한국 초등학교 피아노부실이 떠오른다.
한쪽에서 부러진 의자를 낑낑대며 고치고 있는 벗을 생각하면 언젠가 반드시 그 자리에서 대교향곡을 연주하리라 다짐하게 된다.
“어쩔 수 없죠.”
“네. 계속 말씀드리면 도이체 오퍼 에서 새 오페라 공연을 제안해 왔어요. 내년 3분기까지 보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라 이건 보류해 둔 상태에요.”
“뭘 하자고 해요?”
“피델리오에요. 워낙 장대하고 큰 작품이라 도이체 오퍼에서도 지난 번 투란도트 이상의 투자를 할 생각 인 것 같아요. 꼼꼼히 따져서.”
“하죠.”
“네?”
멀핀의 말을 끊어내고 즉답했다.
“이 녀석아, 이제 겨우 숨 좀 돌렸구만 일은 나중에 생각해라. 규모 면에서 쉽게 결정할 일도 아니다.”
푸르트벵글러가 말렸지만 피델리오의 지휘를 직접 맡았다가 제대로 해 내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내게도 수많은 실패를 안겨다 주었던 오페라.
피델리오만큼은 지금의 나로서도 도전의 영역이라 의지가 생긴다.
“어차피 내년을 목표로 두고 있잖아요. 해요.”
“끄응. 욕심하고는.”
그렇게 말하는 푸르트벵글러도 내심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다음은…… A팀은 정기 연주회를 진행하고 있었고 B팀은 2주 뒤에 1 주일간 이어지는 무대를 준비했어요. 지휘는 케르바 슈타인 지휘자가 맡고요.”
“규모가 꽤 있나 봐요.”
“네. 소소 악장이 준비 정말 많이 했어요.”
소소가 메인이라.
다채로울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대전 일정에 변동이 생겼어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원래는 12월까지 내년 대회를 위한 예선을 준비해야 하는데 각 악단 에 부담되는 일정이 너무 크다는 이 야기가 나왔어요. 게다가.”
멀핀이 말을 거르고 있는 듯한데 카밀라가 입을 열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네 실종도 이유라고 보고 있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는데 카밀라가 설명을 계속해 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1주일 뒤에 예선에 참가해야 하는데 네가 없잖아. 배도빈이 없는 오케스트라 대전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거지. 그리고 멀핀 부장이 말한 대로 각 악단에게 부담되는 것도 문제가 많았으니까.”
이해가 된다.
“그래서 내년 오케스트라 대전은 없어. 해가 넘어가면 관련 이야기를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 이름으로 발 표한다고 하는데, 우리끼리는 아마 3년이나 4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운영할 거라고 보고 있어.”
“이것저것 바뀌는 게 많네요.”
“그들도 처음이니까. 아마 다음 오케스트라 대전은 그런 문제들을 상당히 해결하고 개최될 테니 지금은 우리 할 일만 집중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네요.”
그렇게 대충의 근황을 듣고는 누워 있자니 악장단이 찾아왔다.
“정말 무슨 일이래.”
“천만다행이다.”
“푹 쉬고.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
케르바 슈타인과 헨리 빈프스키, 파울 리히터와 안부를 나누었고.
찰스 브라움은.
“허거어헙으흥. 걱정 같은 거 안 패행! 안 했다고!”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모습을 보였다.
질질 짜고 코 찔찔 흘리는 찌질이.
좋은 느낌이다.
고마웠다.
“시력을 잃은 것 같다고 들었는데. 이제 괜찮은 거야?”
아내와 함께 찾아온 니아 발그레이는 나를 유심히 살피곤 다정하게 물었다.
“네. 일시적인 현상이었나 봐요.”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야 숨을 길게 내쉬며 안도했다.
그리고.
“도빈아!”
“도빈 군!”
미국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히무라 와 박선영, 사카모토 료이치.
“오오. 신이시여.”
사카모토가 두 손을 모았고.
히무라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보더니 내 손을 잡고 바닥에 주 저앉아 울고 말았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아들에게 줄 사랑을 내게 주었으니 아마 ‘그때’ 의 기억과 겹쳤을 것이다.
“괜찮아요. 걱정 마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렇게 히무라를 달래며 고개를 들었다.
입을 막고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는 박선영과 이제는 정말 건강해 보이는 사카모토.
그를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괜찮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혹시나 내 일로 충격을 받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찮은 모양이다.
“사카모토.”
사카모토와도 끌어안아 서로를 달래준 뒤 그간의 일을 나누었다.
3일 차에는 아침부터 복도가 시끄러웠는데 가우왕이 병실 문을 벌컥 열고는 요란스럽게도 찾아왔다.
숨을 헐떡이는 걸 보니 뛰어올라온 모양.
“가우왕.”
반가워 인사하자.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사람 애태우는 법도 가지가지네! 어?”
갑자기 달려들어 검지와 엄지로 양쪽 볼을 꽉 눌러버렸다.
너무 아파서 입을 벌리자 뭔가가 입속으로 쑥 하고 들어왔다.
가우왕의 손을 쳐내고 소리쳤다.
“무슨 짓이에요!”
“잔말 말고 꼭꼭 씹어 먹어!”
폭력을 휘두른 주제에 너무나 당당 해 어이가 없자니 가우왕이 가방에 서 뭔가를 잔뜩 꺼냈다.
“웩.”
지옥 음식도 이것보단 덜 쓰겠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뱉으려고 휴지 통을 찾는데 녀석이 호통을 쳤다.
“야! 그게 얼마짜린데 뱉으려고 해?”
“뭔데요!”
“중국에서 유명한 한의사가 지어준 단이야. 좋고 비싼 건 다 들어가 있으니 하루에 하나씩 먹어. ……뱉지 마!”
“너나 많이 먹어요! 멀쩡한 사람도 먹다 죽겠네!”
“이 꼬맹이가!”
가우왕과는 한 시간 내내 싸우다가 겨우 진정했다.
담당의가 먹어도 되는 거라고 판정해 주었을 때는 정말이지 최악이었지만 말이다.
이후로도 단원들과 페터 형제, 마 리 얀스와 제르바 루빈스타인, 칼 에케르트, 차명운 등이 멀리서 병문 안을 와주었고.
나카무라 부녀도 조용할 때쯤 와 부담을 덜어주었다.
퇴원 후 찾아간다고 하는데도 굳이 와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도빈아!”
“이시하라.”
열일 제쳐두고 기자로서가 아닌 지 인으로 와준 이시하라 린에게는 기자들에게 빼앗길 시간을 덜기 위해 서라도 대충의 이야기를 전해 기사화를 부탁했고.
SNS를 통해 팬들의 응원을 하다 보니 드디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2주일 정도의 간격을 두고 신년 연주회를 복귀 무대로 삼을 예정이다.
준비 기간이 짧은 탓에 송년 연주 회는 짧게 연주자로 나서서 팬들을 위로할 생각이다.
“끄아아아아아.”
“……말도 안 돼.”
기분 전환도 하고 페터 형제와 스칼라의 견문도 넓혀줄 겸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찾았다.
입을 떡 벌린 녀석들이 귀엽다.
특히나 스칼라는 ‘별세계’에 떨어진 기분인지 외출을 하면 내 옆에서 떨어지질 않았는데 이만한 규모의 건축물이 전부 ‘음악을 위한 곳’이 라 들으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여, 여기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는 곳이라는 말이지.”
“그래.”
“도빈 님, 도빈 님! 어서 들어가요! 스칼라 씨도요!”
프란츠의 재촉에 들어섰다.
관객으로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케르바 슈타인 체제 아래의 B팀이 얼마나 멋진 연주를 들려줄지 기대 되었다.
‘소소가 메인이라 했지.’
팸플릿을 펼치자 차이나풍의 현악기 버라이어티 쇼라는 상당히 촌스러운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나 잠깐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 알았다.”
“프란츠, 얘 어디 못 가게 해.”
“넵!”
객석을 빠져나와 무대를 통해 뒤로 돌아갔는데 악장 대기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뭐지?’
공연 시작 30분 전인데 자리에 없다니 무슨 일인가 싶어 핸드폰을 꺼냈는데.
“도빈이다.”
소소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 옷…… 뭐예요?”
“변검.”
괴상한 가면들과 화려하다 못해 정 신 사나운 차림은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함을 풍겼다.
“오늘 콘셉트예요?”
“응.”
소소가 기쁘다는 듯 살짝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쭉 폈다.
“다들 좋아할 거야.”
“버라이어티 쇼라고 했죠.”
“아냐. 아냐.”
소소가 손바닥을 보이곤 좌우로 돌렸다.
“오늘의 나는 버라이어티 쑈야.”
“……네. 버라이어티 쇼.”
“아니. 쑈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